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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꼬르륵 Feb 21. 2024

첫 번째, 탄원서를 쓰다

두 달 뒤 회사가 문을 닫습니다.

며칠 뒤, 선배님에 대한 해고 통보에 대해 후배들이 탄원서를 써보자는 의견이 나왔다.

혹시나 앞으로 남은 회사 생활에 불이익이 따를까 걱정하는 목소리가 있었고,

나 역시 내 안위가 걱정이 됐지만

고민 끝에 나는 실명으로 이 탄원서를 작성해 제출했다.     



      

탄 원 서          

사  건  인사위원회 (000 전 000 0000장 징계(해고)에 대한 재심)     

피 탄원인 000(前 000 0000장)       

        

탄  원  인          

(생년월일 :..  )     


  연락처 :      

  피탄원인과의 관계 : 000 00 본부 직원  

             

탄 원 취 지          

위 사건에 관하여 피탄원인에게 최대한의 선처를 내려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탄 원 이 유          

존경하는 인사위원님들께.          

안녕하세요.  인사위원님들.           


저는 피 탄원인이자 oooo의 선배인 ‘ooo 전 0000장’에 대한 기존의 ‘해고 조치’를 인사위원님들께서 다시 한번 숙고해 주시기를 정중히 부탁드립니다.           


피 탄원인은 수십 년간 ooo에서 헌신한 조직의 리더이자 선배입니다.      


입사 초, 피 탄원인이 00 부장으로 근무하실 때 모습이 떠오릅니다. 당시 피 탄원인은 허리 수술 이후 아직 몸이 다 회복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사무실에 나와 근무를 했습니다. 당시, 피 탄원인이 허리에 ‘복대’를 차고 나와 치열하게 일하시던 모습을 0000 동료들 모두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피 탄원인은 오랫동안 000에서 성실하게 근무하며 성과를 낸 바 있습니다.          


또, 피 탄원인은 후배들의 애로사항을 공감하고, 위로하는 선배였습니다. 프로그램의 성패, 개인적인 업무 성과 등 피 탄원인은 후배들의 상황이 좋으면 좋은 대로, 또, 나쁘면 나쁜 대로 술잔을 기울이거나 커피를 사며 격려하는 선배였습니다.           


무엇보다 피 탄원인은 또한 000에서 오랫동안 근무한 경험을 토대로 늘 000의 역할에 대한 질문을 후배들에게 던지는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이처럼 피 탄원인이 조직의 분위기와 발전 방향에 대해서 고민하고 노력한 것을 참작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제가 그동안 피 탄원인을 지켜보며 느낀 것은 피 탄원인은 ‘장고 끝에 결정하는 리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태만이 아니라 치열함이었습니다. 피 탄원인은 한 가지를 결정하더라도 다양한 의견을 경청했고, 신중하게 결정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피 탄원인은 개인의 기호나 이익을 추구하거나, 고민을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최근 나타난 결과가 ‘회사의 경영상 어려움’이라고 해서 피 탄원인의 장고(長考)한 과정이 ‘태만했다’고 한다면 그 과정을 함께 지켜본 후배로서 두려움이   앞서기도 합니다. 평가를 받는 것이 리더의 숙명이긴 하나 누구도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제 000 직원들은 리더가 되는 것 자체를 주저하게 될 것입니다.        


혹자는 회사를 건물과 조직 구조로 떠올릴 수 있으나 저에게 회사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저는 000이라는 회사를 떠올리면 피 탄원인도 함께 떠오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피 탄원인은 누구보다 치열하고 고민하고, 성실하게 근무한 선배였습니다.           


부디 피 탄원인이 그동안 000에 헌신해 온 노고, 능력과 성과, 조직의 리더이자 선배로서의 덕망 등을 참작하시어 최대한의 선처를 내려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2023년 10월 16일     

000 올림



하지만 결과적으로 우리의 탄원서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나는 탄원서라는 것이 생각보다 무력한 것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됐다. 


(여기에 나의 속마음을 더 덧붙여보고자 한다. 대학시절 나는 200여명 남짓한 동아리의 회장을 맡은 적이 있다. 1년 동안 그 책임을 맡은 후 무거운 짐을 내려놓으면서 내가 알게 된 것은 리더는 어떻게든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는 자리라는 것이었다. 과정이 아니라 결과에 책임지는 자리. 그래서 사실 선배님의 해고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결과에 대한 해석이 정권에 따라 바뀐다면, 그래서 어떤 정권에는 해고 사유였던 것이 다른 정권에서는 해고 사유가 아니라면 과연 그 사유는 정말 해고할 사유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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