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피디의 이븐한 음악 일기 #4 - 최백호
꽃장년의 품격 - 최백호가 들려주는 진짜 낭만
천피디의 이븐한 음악 일기 #4 - 최백호
아이유와 함께 "아이야 나랑 걷자"를 부르는 최백호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 그 깊이에 놀랐다. 젊은 가수와 나란히 서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오히려 더욱 묵직하게 울리는 그 음성에서 세월이 빚어낸 진짜 어른의 매력을 느꼈다. 그때 떠오른 생각이 "이분은 꽃중년이 아니라 꽃장년이구나"였다.
젊은 세대인 내가 들어도 최백호는 단순히 나이든 가수가 아니었다. 긴 인생이 만들어낸 여유로움과 삶의 진정성이 목소리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있는, 그야말로 시간의 깊이를 아는 음악가였다.
천피디의 이븐한 음악일기 서른 두 번째, 꽃장년의 진짜 매력을 지닌 가수 최백호와 그의 '내 마음 갈 곳 잃어', '낭만에 대하여' 이야기다.
운동장에서 무대로, 운명적 전환
최백호는 1970년대 후반 한국 대중음악계에 혜성처럼 나타난 인물이다. 독립운동가의 아들로 태어나 원래는 마라톤 선수였으나, 과로로 선수를 그만두고 군 복무 중 결핵을 앓아 의병 제대하게 된다. 체력으로 승부하던 운동선수에서 감성으로 승부하는 가수로의 극적인 전환이었다.
부산 음악살롱 무대를 전전하며 시작된 그의 가수 생활은 우연의 연속이었다. 데뷔곡 '내 마음 갈 곳을 잃어'는 3개월 만에 6,000장이 판매되며 가요계에 최백호라는 이름을 각인시켰다.
[최백호-내 마음 갈 곳 잃어]
https://www.youtube.com/watch?v=i9YdMpdj8PI
절제된 감정의 힘
최백호의 가장 큰 무기는 MZ인 내가 듣기에 ‘절제’다. 다른 이가 부르면 감정 과잉으로 흘러갈 가사들을, 그는 담담하면서도 깊이 있게 소화해낸다. '낭만에 대하여'라는 제목만 봐도 자칫 진부할 수 있건만, 그의 목소리로 전해지면 전혀 다른 차원의 울림이 된다.
1977년 자신이 직접 쓴 '낭만에 대하여'는 1978년 윤정하와 함께 발표되어 MBC 10대 가수 신인상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이 곡이 진짜 빛을 발한 건 훨씬 나중의 일이었다.
침묵 끝에 찾아온 진짜 목소리
1987년 삼각산 경국사에서의 은둔. 1989년 미국행과 라디오코리아 DJ 생활을 거쳐 1990년 귀국한 그가 1994년 다시 내놓은 '낭만에 대하여'는 완전히 새로운 곡이었다.
20년 가까운 세월을 품고 1994년 새롭게 작사, 작곡한 이 노래는 삶의 허무와 지나간 시간에 대한 그리움을 오롯이 담아냈다. 1995년 KBS 드라마 '목욕탕집 남자들'에 삽입되어 폭발적 인기를 끌었고, 1996년 가을 역주행하며 가요톱텐 17위까지 올랐다. 젊은 시절 불렀던 같은 제목의 노래가, 세월의 무게를 견딘 목소리로 되돌아온 것이다.
[최백호-낭만에 대하여]
https://www.youtube.com/watch?v=znHnfR0wdXU
중년 남성들의 마음을 읽어주는 노래
"첫사랑 그 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
이 가사를 읽고 있으면 우리나라 아버지들이 술잔을 기울이며 '아, 젊었을 때가...' 하고 중얼거리는 모습이 떠오른다. 유튜브 댓글 하나가 이를 증명한다. "내 나이 스물하고도 여섯... 아버지가 듣던 이 노래가 생각나서 여기까지 찾아왔네요... 이 노래가 생각나는 거 보니 저도 늙었나봅니다 ㅠㅠ"
다시 오지 않을 것들에 대한 그리움. 지나간 청춘에 대한 미련. 첫사랑에 대한 추억. 이 모든 감정이 '낭만'이라는 한 단어로 응축되어 있다. 최백호는 단순히 노래를 부른 게 아니라 한국 남성들의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한 그 서늘한 그리움을 대변해준 셈이다.
세대를 가로지르는 음악적 품격
최백호의 진면목은 젊은 세대와의 협업에서도 드러난다. 아이유와 함께한 "아이야 나랑 걷자"에서 보여준 그의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세대 간극을 전혀 느끼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럽고 품격 있게 노래를 소화하는 모습에서, 진짜 음악가가 지닌 힘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이가 들수록 더 깊어지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최백호 같은 이가 아닐까.
현재진행형으로 이어지는 낭만
낭만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다른 가수가 낭만을 말하면 어딘가 어색할 때도 있는데, 최백호가 말하면 그것이 진짜 낭만이 된다. 2008년부터 지금까지 SBS 러브FM '낭만시대'를 진행하며 여전히 사람들과 소통하는 최백호. 화려한 무대나 완벽한 퍼포먼스가 아닌, 삶이 고스란히 녹아든 진정성 있는 목소리. 묵묵히 자신만의 길을 걸어온 한 음악가의 이야기. 그것이 바로 최백호가 낭만을 노래할 수 있는 이유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