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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위에 쓴 사랑의 시

천 피디의 이븐한 음악 일기 #11 - 하덕규, 사랑일기

by 꼬르륵

1986년 어느 날, 한국 가요계에 시적인 울림을 주는 곡 하나가 조용히 등장했다. 시인과 촌장의 "사랑일기". 화려한 편곡이나 자극적인 가사 대신, 일상의 소박한 풍경 위에 사랑이라는 감정을 시처럼 적어낸 이 곡은 80년대 중후반 우리 가요의 서정성을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각설하고 천 피디의 이븐한 음악 일기 열한 번째, 세상을 향한 따뜻한 시선을 담은 시인과 촌장의 "사랑일기"다.


[시인과 촌장-사랑일기]

https://www.youtube.com/watch?v=Ee_yTLvNjeE


86년생이 만난 80년대의 사랑 언어

처음 이 곡을 들었을 때 묘한 기분이었다. 요즘 우리가 말하는 '사랑'과는 완전히 다른 접근이었다.

"새벽공기를 가르며 나르는 새들의 날갯죽지 위에"

하덕규는 사랑을 개인적인 감정으로만 보지 않았다. 일상의 평범한 순간들 - 새벽 새들의 비행, 출근하는 사람들, 광장의 비둘기들 - 이 모든 것이 사랑의 대상이었다. 지금 우리가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일상의 순간들을 38년 전에 이미 시로 만들어놓았다는 게 놀랍다.


다른 시대, 같은 마음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은 확실히 달라졌다. 80년대에는 이렇게 철학적이고 시적으로 사랑을 노래했지만, 지금은 더 직접적이고 감각적이다. 하지만 이 곡을 들으면서 느끼는 건, 사랑의 본질은 결국 같다는 것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 평범한 순간들에서 찾는 의미, 일상을 특별하게 만드는 마음. 이런 감정들은 2024년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다만 우리는 이런 마음을 SNS에 올리고, 그들은 노래로 만들었을 뿐이다.


"~위에"라는 포용의 언어

"~위에"라는 반복되는 표현이 특히 인상적이다. 새들의 날개 위에, 인부들의 팔뚝 위에, 비둘기들의 노래 위에. 모든 것을 감싸 안는 이 시선이 MZ세대인 나에게는 오히려 신선하다.

요즘 우리는 개인의 감정에 집중하는 경우가 많다. '나'의 사랑, '나'의 상처, '나'의 행복. 하지만 하덕규는 '나'를 넘어서 세상 전체를 품으려 했다. 이런 시각이 38년이 지난 지금 더 특별하게 느껴진다.


지금도 필요한 감정의 언어

하덕규가 1986년에 제시한 사랑의 방식이 2024년에도 여전히 마음을 움직이는 이유는 뭘까. 아마도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을 이 노래가 간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SNS와 메신저로 소통하는 시대에, 천천히 세상을 바라볼 여유를 잃어버린 우리에게 이 곡은 다른 속도의 사랑을 제안한다. 빠르게 스와이프하는 대신 천천히 바라보는 시간, 화려한 표현 대신 진솔한 마음. 지금도 어디선가 누군가는 새벽 공기를 마시고 있을 것이다. 출근길에 서 있을 것이고, 광장을 걷고 있을 것이다. 그 모든 평범한 순간들이 언젠가는 아름다운 사랑의 기록이 될 수 있다는 걸, 하덕규가 보여줬다. 그리고 그 메시지는 지금 내 일상의 감정도 똑같이 건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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