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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다디에서 이상은까지, 그녀가 선택한 길

천 피디의 이븐한 음악 일기 #12 - 이상은, 사랑해 사랑해

by 꼬르륵


88년 강변가요제 우승자가 사라진 이유

1988년 MBC 강변가요제에서 '담다디'로 우승한 이상은. 90년대 초반 확실한 포지션을 잡아가던 그녀가 갑자기 해외로 떠났다. 일본, 미국, 영국을 오가며 음악과 미술을 공부했다고 한다.

당시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선택이었다. 인기 상승 곡선에서 스스로 이탈한 셈이니까. 그 시절 연예계 시스템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돈과 인기를 버리고 떠난 이유

인기 절정의 순간에서 나라면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이 없다. 확실한 수입, 대중의 관심, 업계에서의 입지. 이 모든 걸 포기하고 불확실한 길로 떠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이상은이 해외에서 보낸 시간은 단순한 유학이 아니었다. 음악이 뭐길래, 그녀가 찾고 싶었던 음악적 정체성이 뭐길래 기존의 모든 걸 버릴 수 있었을까? '언젠가는', '비밀의 화원', '사랑해 사랑해' 같은 곡들이 그 답의 일부다.


[이상은-사랑해 사랑해]

https://www.youtube.com/watch?v=VllvuhC7hAM


90년대는 지금보다 선택지가 적었던 시기다. 그런데도 그녀는 자신만의 길을 찾아 떠났다. 지금은 오히려 선택지가 많아졌는데도 그런 과감한 결정을 내리는 아티스트를 찾기 어렵다.


라디오에서 알고리즘까지

"라디오에선 귀 익은 음악소리" - 90년대 라디오의 기능과 2025년 플레이리스트의 기능은 다르다. 라디오는 예측 불가능했다. 지금은 알고리즘이 내 취향을 학습해서 음악을 추천한다.

하지만 '그 사람이 좋아했던 노래'가 갑자기 나올 때의 감정은 비슷하다. 지금은 인스타그램 스토리나 유튜브 자동재생에서 그런 일이 일어난다.


직설적 가사의 힘

"혼자서 소용없어"라는 표현이 인상적이다. 90년대 발라드치고는 꽤 직접적인 편이다. 돌려서 말하지 않고 외로움을 인정하는 방식. 이런 솔직함이 지금 MZ세대가 선호하는 가사 스타일과 맞닿아 있다. 복잡한 은유보다는 내 감정을 대신 말해주는 가사를 좋아하는 경향과 비슷하다.


미니멀한 접근

"사랑해 사랑해"라는 단순한 반복. 복잡한 편곡이나 화려한 보컬 테크닉 없이도 감정을 전달하는 방식이다. 2010년대 이후 팝 음악의 미니멀리즘 트렌드와 맞는 지점이 있다.

물론 이게 의도적인 트렌드 선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냥 그녀가 표현하고 싶었던 방식이었겠지. 결과적으로 시대를 앞서간 셈이다.


이상주의자가 사라진 시대

점점 더 이상주의자를 찾아보기 힘든 요즘, 이상은 같은 아티스트가 정말 신기하다. 지금은 모든 게 계산되고 전략적이다. 데뷔 전부터 컨셉이 정해지고, SNS 반응을 실시간으로 체크하고, 스트리밍 수치로 성공을 측정한다. 그런 환경에서 '순수한 음악적 이상'을 위해 기존의 모든 걸 포기한다는 게 상상이 안 된다. 이상은의 선택이 더 특별해 보이는 이유다. 음악 그 자체를 위해 모든 걸 걸 수 있었던 시대와 사람.

물론 그녀도 완전한 이상주의자는 아니었을 것이다. 현실적 고민도 있었겠지. 하지만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음악이 돈과 인기보다 중요했던 거다.


2025년에 듣는 감상

지금 이 곡을 들으면 과잉 생산된 감정들 사이에서 담백함이 돋보인다. 15초 만에 소비되는 틱톡 사운드들과는 확실히 다른 호흡이다. 라디오 PD 입장에서 이런 곡을 틀 때의 장점은 안전하다는 것이다. 세대를 가리지 않고 거부감 없이 들을 수 있다. 특별히 인상적이지도 않지만 거슬리지도 않는다.

이상은이 90년대 초반에 한 선택들이 지금 보면 '앞서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시에는 단순히 자신이 하고 싶은 음악을 하려고 한 것일 뿐이다. 스타 시스템에서 벗어나 독립적으로 활동하려는 뮤지션들에게는 여전히 참고할 만한 사례다. 물론 지금은 환경이 많이 달라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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