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피디의 이븐한 음악 일기 #27, 외인부대 - 줄리
지금 쓰고 있는 글의 이름 속 '이븐한 음악 일기'의 '이븐하다'는 말은 "골고루 잘 익다"는 뜻이다. 최근 화제가 된 방송 에서 안성재 셰프가 자주 언급하며 유행어처럼 퍼지고 있는데, 나 역시 그 '이븐함'을 음악 일기에서도 느끼게 하고 싶어 이 제목을 붙였다.
며칠 전, 오랜만에 만난 지인이 웃으며 말했다. 요즘 자기 아들이 "엄마, 참 이븐하게 나이 드셨네요"라고 놀린다는 것이다. 초등학교 6학년짜리의 참신한 표현력에 나도 웃음이 나왔다.
이븐한 나이 듦, 그리고 음악의 진정성
웃자고 한 이야기지만 조금 진지한 맥락으로 보자면 정말 중요한 부분이다. 외모는 나이가 들었는데 정신이 나이를 먹지 못하면 그것만큼 난감한 경우가 없다. 반대로 시간의 흐름 속에서 태도, 말이 멋지게 익어가는 누군가를 보며 덩달아 외모까지 멋있어 보이는 때도 있다. 그리고 나는 그런 느낌을 최근 임재범 씨를 보면서 느꼈다.
더 중요한 건, 그의 음악 역시 함께 성숙해왔다는 점이다. 어딘지 모르게 불안한 눈빛과 자칫하면 화풀이의 대상이 될 것 같던 예전 모습과 달리, 몇 달 전 '싱어게인3-무명가수전'에서 본 그는 배려가 돋보이는 인생 선배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성숙함은 그의 노래에도 그대로 스며들어 있었다.
그는 통과시켜 줘서 감사하다는 참가자에게
"기회는 저희가 드린 게 아니라 본인이 얻은 거다. 감사하다고 얘기 안 하셔도 된다. 저희도 노래하는 선배일 뿐이고 먼저 노래했다는 것밖에는 더 내세울 건 없다"
고 했고, 평가에 앞서 항상 개인적인 의견이라는 말을 붙였다.
못 본 사이 그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자세히 알 순 없어도 나는 임재범 씨가 참 멋있게 나이 들고 계신다고 느꼈다. 지인 아들의 표현대로 "참 이븐하게 잘 나이 드셨다"라고 해야 하나.
진정성이 만들어낸 명곡, 외인부대의 '줄리'
그런 그가 프로그램 막바지에 특별히 마이크를 잡은 순간, 여전히 대체 불가능한 실력까지 보여주다 보니 나의 호감은 배가 됐다. 그때 문득 떠올린 게 그의 젊은 시절, 외인부대 시절의 모습이었다.
"여기 심사위원이라고 앉아 있는 저희도 가수고요. 우리도 어떻게 될지 몰라요. 진짜…. 백지영 심사위원님 말대로 우리도 어떻게 될지, 내일 당장 어떻게 될지 모르고…. 수없이 쓰러지고, 수없이 후회하고, 수없이 포기해 보고, 또 악에 받쳐 노래할 때도 있었고, 내가 행복해지고 싶어서 노래할 때가 있었고, 남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서 노래할 때도 있었고…. 많은 것들을 겪게 되고 또 겪게 될 거예요. 을 통해 시청자분들이 보시고 여러분들 얼굴 기억하시고 응원해 주실 거예요. 분명히."
한 번의 실패가 인생의 실패는 아니라는 메시지를 계속 주던 그. 천피디의 이븐한 음악일기 일곱 번째 곡은 그런 그의 젊은 시절, 가장 날것의 진정성이 담긴 외인부대의 '줄리'다.
[외인부대- 줄리]
https://www.youtube.com/watch?v=JKVbAEUUjAs
그룹 '외인부대'는 한국 헤비메탈의 원년을 연 '부활'과 '시나위' 출신 멤버들로 결성되었다. '부활'의 기타리스트 이지웅과 '시나위'의 보컬리스트 임재범, '다섯손가락'의 박문일, '바퀴자국'의 손경호, '셀프서비스'의 손무현이 합류해 밴드의 라인업을 완성했다. 이렇게 각기 다른 팀에서 활동하던 멤버들이 모였다는 의미로, 만화 '공포의 외인구단'에서 영감을 받아 '외인부대'라고 이름을 했다고 한다.
상업성보다 개성을 택한 음악
외인부대가 활동했던 1990년대 초는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특별한 시기였다. 아직 기획사 시스템이 완전히 자리 잡기 전, 뮤지션들이 자신만의 색깔을 찾아 실험할 수 있었던 시대. 상업적 성공보다는 음악적 진정성을 추구하던 시절이었다.
'줄리'는 이들의 1집 앨범 타이틀곡으로 작사는 기타리스트인 이지웅, 작곡은 이지웅과 임재범이 함께 했다. 이 곡은 단순한 러브송이 아니다. 록 발라드의 형식을 빌렸지만, 그 안에는 20대 청년의 순수하고 간절한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한 여인의 모습이 밤마다 마음속에 떠오르고, 설레는 마음으로 밤을 지새우는 남성 화자의 애틋한 감정을 담고 있다. 사랑을 갈망하고, 사랑을 고백하고, 그 존재를 필요로 하는 마음이 단순하면서도 진솔하게 표현되어 있다.
가사만 보면 평범해 보일 수 있지만, 임재범의 보컬이 더해지면 완전히 다른 곡이 된다. 그의 목소리에는 계산된 테크닉이 아닌,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이 담겨 있다. 고음 처리에서도 무리하지 않으면서 감정의 절정을 표현하는 그의 방식은, 지금 봐도 배울 점이 많다.
개성이 만든 대체 불가능한 목소리
무엇보다 임재범 씨의 가창력이 돋보이는 곡이기도 하다. 하지만 단순한 기교의 과시가 아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고유한 색깔이 있다. 거칠면서도 섬세하고, 파워풀하면서도 서정적인 그만의 음색.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개성이 아닐까.
가수 윤도현이 이 곡을 들으면서 가수 데뷔를 꿈꿨다고 했을 정도라고 한다. 한 곡이 다른 아티스트의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성 있는 음악의 힘이다.
지금 시대에는 완벽하게 다듬어진, 어디서 들어도 무난한 음악들이 넘쳐난다. 하지만 '줄리' 같은 곡을 들으면 알 수 있다.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건 완벽함이 아니라 진정성이라는 것을. 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그 사람만의 이야기를 담는다는 것을.
나다운 소리를 찾아가는 여정
외인부대의 '줄리'에서 지금의 임재범까지. 그의 음악 여정을 보면서 느끼는 건, 진정한 아티스트는 시간이 지나도 자신만의 색깔을 잃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나이가 들수록 그 색깔이 더욱 깊어지고 풍성해진다.
그의 동영상에 달린 재밌는 댓글을 소개하며 글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나이 들어서 멋있으려면 젊을 때 잘생기면 된다".
외람되지만(?) 외모뿐 아니라 내면도, 그리고 음악도 이븐하게 익어가시는(ㅎ) 가수 임재범 씨를 나도 진심으로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