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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나 Aug 24. 2020

10년 후 일기를 꺼내어

그날이 올까?

 

< 2030년 8월 23>

 잠에서 깨어 라디오를 켠다. 커피 내리고 베이글 굽고, 과일, 견과류 넣은 요거트로 아침 식탁을 차린다. 먹을 사람 먹고, 먹기 싫은 사람 먹지 않아도 된다. 식사 후 빈 접시를 정리하고 간단히 청소기 돌리며 집안 정리를 한다. 중학교 3학년 딸이 학교를 가면 동네를 가로질러 요가원으로 향한다. 요가원에서 들숨, 날숨에 맞추어 내 몸을 움직이고 나면 개운한 상태가 되어 집으로 돌아온다. 샤워를 마치고 라디오를 켠다. FM 93.1에서 생생 클래식이 흘러나온다. 지난번 딸아이와 함께 음악회에서 들었던 곡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니 우연히 친구를 만난 듯 반갑다. 

 가지를 얇게 썰어 에어프라이어에 넣고 허브솔트 잔뜩 뿌린 다음 10분 정도 굽는다. 다시 뒤집어 모짜렐라 치즈 반 봉지를 탈탈 털어 넣고 5분을 더 굽는다. 그렇게 치즈가 덮인 구운 가지와 아침에 먹다 남은 베이글 조각으로 나홀로 점심을 해결한다.  

 오늘은 도서관 글쓰기 수업으로 인연이 된 사람들을 만나는 수요일이다. 지난 한 주 읽었던 책, 글쓰기,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고 집으로 돌아온다. 

 아침에 빨래거리를 넣어둔 세탁기를 작동시키고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창문을 닫고 플루트 연습을 시작한다. 올해로 14년째 하고 있는 연습이니 이제 아마추어 악단에 오디션이라도 볼까 싶어 인터넷을 뒤적여본다. 좀 더 용기가 필요한 것 같기도 하다. 

 중학생 딸이 하교할 시간이 다가온다. 지금은 성인이 된 오빠들이 그랬듯 현관문을 열며 배고프다고 외칠 것이다. 냉동식품 핫도그를 데워 먹으라고 해야겠다. 혹시나 집에서 저녁을 먹을지도 모를 아들들과 남편, 그리고 학원 다녀온 후 저녁을 먹을 딸을 위해 전기밥솥에 쌀을 안치고, 저녁식사 반찬으로 맛있게 먹을 1찬만 준비한다. 냉장고에 있는 재료를 이용하여 30분 정도 뚝딱뚝딱 만들어 인덕션 불을 끈다. 잠시 플루트로 좋아하는 곡을 연습한 후 건조기로 옮겨졌던 세탁물을 꺼내어 각자 아이들의 방에 넣어두고 문을 닫는다. 남편과 내 것만 개어 옷장에 넣어둔다. 

 이제 내가 듣고 싶은 음악을 들으며 내가 읽고 싶은 책을 읽는다. 책을 읽다 둘러보니 12년 넘게 나랑 함께한 반려식물들이 눈에 들어온다. 식물들에게 물 주기를 30분 정도 한다. 

 저녁식사 후  빈그릇을 정리한 딸이 방으로 들어가고 아들들과 남편은 아직 집에 오지 않은 이런 날을 결혼 후 27년이나 기다렸는데 드디어 이런 날들이 일상이 되었구나. 요즘 글 쓴다고 바쁜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본다. 

"언니가 저녁으로 떡볶이에 맥주 먹고 싶은데 나올 수 있어?" 

못 나오면 혼자 먹으면 되고 나오면 더없이 좋고. 

둘은 떡볶이와 맥주를 앞에 두고 단풍이 좋은 둘레길을 걸어보자고 계획을 세워본다. 적당히 배부르고, 취한 기분으로 집으로 다시 걸어온다.      


10년 뒤, 과연 이런 날들이 올까?      


 남편이 출근하기 위해 맞춘 새벽 알람에 함께 일어나 카푸치노 한 잔 만들고 남편의 아침 약을 챙긴다. 남편 출근 후 두 아들 학교 수업에 늦지 않도록 여러 번 깨우고 세 아이 입맛 살피며 아침 식사 준비를 한다. 늦둥이딸 기분 좋게 유치원 셔틀버스 태우기 위해 온갖 비위를 맞춘다. 유치원에 보내고 부랴 부랴 요가원으로 향한다. 요즘은 코로나로 번갈아가며 집에 있는 아들을 위해 점심식사 준비를 위해 서둘러 집으로 온다. 나 혼자 먹으면 특별한 반찬 없이 그냥 있는 대로 먹어도 되는데 자식이 하나라도 집에 있으면 반찬이 신경이 쓰인다. 설거지, 빨래, 청소 등 매일 해도 표도 안나는 일, 하지만 안 하면 표가 금방 나는 일들을 또 한다. 플루트 연습을 30분이라도 하려고 애를 쓰지만 하는 날보다 못하는 날이 더 많다. 벌써 막내딸이 집에 올 시간이다. 아직 장도 못봤는데... 큰 아이들 학원 시간에 맞춰 저녁을 서너 번 차리기도 한다. 열여섯, 열일곱인 두 아들은 한 참 먹을 나이라 학원 가기 전에도 먹고 갔다 온 후에도 먹는다.  저녁 내내 막내딸은 재잘거리며 놀아달라고 한다. 힘들어 유튜브를 보여주면서도 맘이 편하지는 않다. 열 시가 넘으면 막내딸 취침시간에 맞춰 함께 잠이 든다. 막내딸이 잠든 후 다시 억지로 나의 잠을 깨워 나온다. 학원에서 돌아온 아들들의 식사 또는 야식을 챙기고, 아침에 잠깐 얼굴 본 남편의 퇴근을 맞이한다. 이 모든 것들을 마치면 드디어 나만의 시간이 되는데 잠이 쏟아진다. 그래도 날 위해 책도 읽고, 글쓰기도 해본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10년 꾸준히 하면 상상한 일 중에 하나는 내 것이 되어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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