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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나 Sep 01. 2020

외롭지 않게

이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 


 세면대 있는 집, 욕조 있는 집, 식탁 놓을 수 있는 집으로 나의 욕구가 하나씩 추가될 때마다 이사를 다녔다. 마흔세 살이 되던 해 처음으로 인테리어라는 욕구까지 챙기며 지금의 집으로 이사를 왔다. 인테리어 비용을 아끼기 위해 각 업체를 직접 알아보고 날짜를 조율하여 공사는 진행되었고 업체의 일이 아닌 쓸고, 닦고, 정리하는 잡일은 온전히 나의 몫이 되었다. 이사 후 며칠 뒤 오른쪽 새끼손가락 관절이 아프더니 심해졌다 덜해졌다한다. 이번엔 왼쪽 약지 손가락 관절이 아프다. 겉으로 봐서는 특별한 이상이 없어 보이고 나만 통증을 느끼니 남편에게 이야기를 해도 돌아오는 답은 위로가 안 된다. 

“나도 컴퓨터 자판 많이 두드리고 나면 그다음 날 손가락 붓고 아파.”

“......”

남편이 수개월 전부터 오른쪽 어깨가 아프다고 했을 때 “오십견이야?”라며 되묻거나 ”병원에 가서 물리치료라도 좀 받아 “라고 했던 나였기에 남편의 무심한 대답에 할 말이 없었다. 결국 나 혼자 느껴야 하는 통증이라 시간이 지나 좋아지기를 기다려 보자. 

“나이가 좀 빠르긴 한데 퇴행성 관절염이에요”

“네? 퇴행성 관절염요? “

“며칠 약 먹고 지켜봅시다. 악화와 완화를 반복할 거예요”

약 없이 참을 정도의 통증이었으나 염증이라도 가라앉혀야 할 것 같아 병원에 갔었다. 동네 병원을 나오며 이 상황에 헛웃음이 나왔다.


좀 좋아지나 싶었는데 몇 달 뒤 같은 부위에 열감과 통증이 재발한다. 열감과 쑤시는 통증이 심해지더니 관절 부위가 붓고 살짝 변형이 오는 듯하였다. 이대로 두면 안 되겠다. 시장 골목에 위치한 물리치료 가능한 다른 병원에 갔다. 아침부터 물리치료받으러 온 노인들이 긴 의자에 나란히 앉아있다. 나도 한쪽 끝에 앉아 ‘이 공간에 나는 좀 안 어울려’라는 표정으로 순서를 기다렸다. 드디어 나의 진료 순서다. 

“퇴행성 관절염이라기에는 나이가 너무 젊은데... 좀 자세히 검사를 해봅시다.” 

의사는 진료용 침대 옆 초음파 기계를 내 팔에다 갖다 대고 내가 아파하는 부위에 펜으로 표시를 한다. 그리고 초음파 기계를 움직이며 몇 가지 질문을 더 한다.

“결국 많이 써서 아픈 거예요. 이대로 많이 사용하면 퇴행성 관절염이 되고요. 우선은 초기니까 근육에 직접 주사를 몇 번 맞아보고 물리치료도 해봅시다. 관절에 염증도 있으니 약도 먹어야 하고요. 무슨 일을 하기에... 이제 쉬어가며 하세요.” 

 그렇게 2주 동안 매일 병원에 가서 팔 근육에 주사를 맞고 노인 환자들 사이에서 순서를 기다리고 물리치료실 침대에 누워 팔과 손가락 물리치료를 받았다. 

어릴 때부터 손가락 관절 꺾을 때 ‘딱’ 소리 나는 게 재밌어 습관적으로 해서 그런가, 간호사 생활하며 무거운 환자들을 번쩍번쩍 들어 올려서 그런가, 아니면 10년 넘게 마트에 장 보러  다니며 여러 봉지를 손가락에 걸고 한 번에 옮기려고 무리한 탓일까, 이 나이에 왜 손가락 관절이 아픈지를 설명하고 싶었다. 마흔에 출산한 막내딸이 너무 예뻐 계속 안아줘서 그런가 생각도 해보고 나보다 10살 나이 많은 시누이와 손윗동서도 아직 괜찮은데 내가 퇴행성 관절염이라니 아픈 것보다 서글픔이 더 컸다. 

 그 날 이후로 난 무거운 것을 들지 않겠다고 가족들 앞에서 선언했다. 

“나중에 내 병시중 들기 싫으면 지금부터 나를 잘 보호해줘.” 

이 이야기는 나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늙어서 고생 안 하려면 지금부터라도 관리 잘해야 한다.’

 올해 팔순을 넘긴 시어머니는 퇴행성 관절염으로 여러 개의 손가락이 변형되어 있다. 칠순이 가까운 친정 엄마는 얼마전 양쪽 무릎 인공관절 수술을 받았다. 그분들이 아픈 것은 노화현상으로 피할 수 없는 것이라 생각했고 나의 통증이 아니니 머리에서 느낄 뿐 마음에서 공감할 수 없었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중학교 앞 문구사를 했던 친정엄마는 이삼일이 멀다 하고 문구 도매시장에서 물건을 떼 와서 팔았고, 각 출판사를 돌아다니며 자습서, 문제집들을 구매해서 판매하였다. 가게로 돌아오는 엄마의 손에는 늘 무거운 짐 꾸러미 또는 책 꾸러미들이 있었다. 그때는 한두 시간이었지만 물건 떼러 가는 동안 자식들에게 가게를 맡기는 게 싫었을 뿐 무거운 짐 꾸러미들은 엄마가 당연히 감당해야 하는 몫이라 생각했었다. 

 밤 10시가 넘으면 남편도 퇴근을 하고 학원에서 두 아들도 집으로 돌아온다. 그때부터 다시 부엌살림이 시작된다. 셋의 몸무게를 합하면 200kg이 넘는 우리 집 세 남자들은 집에 들어오면서부터 먹을 것을 찾는다. 저녁 식사 후 정리가 이미 끝난 부엌은 마치 다음 날 아침 식사를 준비하듯 다시 불을 밝히고 렌지 후드가 돌아가고 음식 냄새를 풍긴다. 그렇게 야식시간이 지나간 후 설거지를 위해 싱크대 앞에 다시 선다. 거의 매일 아무 생각 없이 습관처럼 척척 해치워 내지만 나의 손가락 관절이 아프기라도 하면 난 설거지를 앞에 두고 갑자기 울컥해진다. 

 하루 장사가 끝나고 1층 문구점 셔터를 내린 후 엄마가 2층 집으로 올라오는 시간이 밤 10시였다. 오남매 자식들이 있었지만 싱크대에는 저녁 설거지가 그대로였던 날이 많았으며 우리는 각자 방에 들어가 있거나 재밌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느라 엄마의 잔소리나 한숨소리는 묻히는 날이 많았다. 엄마가 느꼈을 서운함, 답답함을 넘어선 외로움을 왜 이제야 느낄 수 있을까? 같이 먹고 같이 사는 집에서 ‘집안일은 원래 너의 일이다’라고 그 누구도 입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온 몸으로 뿜어대는 답답한 공기를 엄마도 느꼈을까?

 남편은 직장을 다니고 난 집에서 살림을 하며 육아를 하고 있다. 남편이 밖에서 돈을 벌어오면 난 그 돈으로 의식주를 책임지고 해결하는 사람이다. 집안일은 나 혼자 살았어도 할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양이 좀 많아져도 늘 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집안일도 애들 키우기에 안전한 환경과 가족이 아프지 않을 정도의 위생이 유지되면 나머지는 액세서리같이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집안일에 대한 스트레스도 크지 않았다. 그런 내가 집안일을 하며 욱하는 지점이 있다. 바로 가족들이 집안일은 내가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말할 때이다.

 남편의 직장생활이 충분히 힘들다는 것을 알기에 퇴근 후 집안일하는 다른 남편들과 비교하며 집안일을 강요하고 싶지 않다. 그런데 남편이 어느 순간 나의 이런 배려를 당연히 여기거나 중고등 학생 아들들이 집안일은 당연히 엄마 또는 여성의 일처럼 이야기하면 난 화가 나며 외로워진다. 

 기본적인 의식주를 위한 집안일은 자신을 돌보는 필요조건이기에 지금 본인이 하고 있지 않다면 누군가의 배려로 채워지고 있다는 것을 가족들이 알았으면 좋겠다. 결혼하지 않았더라도 남편은 지금의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가족을 위해 직장생활을 더 견디고 힘을 낸다는 사실을 내가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고마워하는 것처럼 자신의 의식주 해결을 위한 많은 일들이 나의 시간과 노력으로 채워지고 있는 것을 가족들이 당연하게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외롭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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