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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나 Sep 20. 2020

반업주부의 고백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난 주당 6시간에서 9시간 강사 일을 하고 있다. 물론 월급은 시급제이고 학기에만 월급을 받는다. 얼마 전 시행된 강사 법으로 일 년에 4주 치 월급을 추가로 받게 되었지만 달라진 것은 크게 없다. 워킹맘이라 하기에는 그들과 정서를 같이 할 수 없다. 코로나19 시대에 워킹맘이 느끼는 막막함, 치열함, 그들의 고통을 경험하고 있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나를 전업주부라 소개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는데,  독서 모임에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를 읽고 이야기하던 중 내가 일(경제적 활동)하고 있으면서도 스스로를 ‘전업주부’라 칭하는 이유에 대해 송곳 같은 질문을 받았다.  



 

난 3교대 근무를 하는 응급실 간호사였다. 신속한 결정과 치료가 이루어지는 응급실은  나의 급한 성격과 에너지 넘치는 기질과 잘 맞아 즐겁게 일했던 소중한 공간이었다. 하지만 결혼 후 연년생 두 아들 육아현실 앞에서 결국 남편과 나, 둘 중에 한 명은 큰 변화가 필요했다. 연봉, 문화, 무엇을 기준으로 해도 사직을 선택해야 하는 사람은 나였다. 이런 결정에서 ‘나의 선택’이라는 꼬리표가 붙기를 남편과 나 모두 바랬다. 나에게는 타인에 의한 선택이 아니었다는 자존심을, 남편에게는 나에게 희생을 요구한 미안함을 덜 수 있는 중요한 표식이었다. 병원 사직 후 선택한 '시간강사' 일은  임상 경험과 전공을 살려 육아와 병행할 수 있고,  수학선생님이 꿈이었던 나에게 가르치는 일이라는 점에서도 괜찮은 선택이었다.  대학 강사일은 나에게도 남편에게도 위안이었고 희망의 불씨였다.


 독박 육아로 허우적거리며 힘든 시간 속에서도 강의 준비는 나 혼자 몰입할 수 있는 합법적 시간이 되어주었고, 나의 지적 욕구를 채워줄 수 있는 좋은 도구였다. 또한 강의는 나만을 위한 무대처럼 즐길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늦둥이 임신 전 까지는 교수를 꿈꿀 수 있는 좋은 발판이기도 했다. 인맥, 경험을 위해서라도 많은 강의 기회를 얻기 위해 노력했고 일주일에 4일씩 강의를 나갔으며, 춘천, 천안까지 다니느라 아침 7시에 나가 저녁 5시에 귀가하는 날도 많았다. 육아와 조화롭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어느 순간 나는 워킹맘 같은 라이프 스타일을 유지하고 있었다. 육체적으로 힘들었고 맘의 여유도 조금씩 사라져 갔다. 그 당시 나를 전업주부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남편의 연구년 동안 모든 가족이 1년 동안 외국생활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을 때  강제 전업주부가 되었다. 그곳에서 나는 예전에는 몰랐던 전업주부의 매력을 경험했다. 하교하는 아이들에게 간식을 주었고, 남편 한 사람의 시간만 허락한다면 언제든지 가족여행을 떠날 수 있었으며, 아이들의 행동과 말을 긴 스펙트럼 내에서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 모자관계는 물론 맘의 여유 덕분에 부부관계도 더 좋아졌다. 그리고 늦둥이 딸을 뱃속에 품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5남매 중 둘째인 나는 본능적으로 내가 서 있어야 할 곳을 잘 알아차린다. 늦둥이 임신과 함께 내가 속할 무리는 워킹맘이 아니라 전업주부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나를 소개할 때 전직 간호사, 강사라는 지분은 조금씩 줄어들었고, 경제적 또는 사회활동에 대해 부럽다고 말하는 엄마들 사이에서 몸을 낮추어야 했다. 의도치 않은 박탈감, 실체보다 부풀려 보는 사람들의 시선 모두가 부담스러웠다.  


늦둥이를 낳고 한 달 후부터 시간강사로 다시 일하기 시작했다. 막내딸 임신 사실을 아는 순간부터 교수가 되려던 나의 꿈은 자연스럽게 소멸되었고, 시간 강사는 더 이상 나에게 희망의 불씨가 아니었다. 예전처럼 많은 강의를 맡지 않았으며 육아는 일주일에 한두 번 시간제 베이비시터의 도움을 받았다. 연년생 두 아들은 멋모르고 키웠다면, 마흔에 얻은 막내딸 육아는 조금 달랐다. 늦둥이  출산 후 내 삶의 변화는 ‘나의 선택과 책임’이라는 꼬리표 없이도 지낼 수 있을 만큼 난 단단하고 여유로운 사람이 되어 있었다.


 전공과 관련되지 않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기 시작했다. 늦둥이 임신 때부터 평생 읽지 않았던  책을 가까이 하기 시작했고, 노산 탓에 순산을 위한 산전 요가로 요가를 시작했으며, 출산 후 두 달 후부터 동네 피아노 학원에서 플루트를 배우며 막연한 악기 로망을 실현했다. 그리고 1년 전 시작한 글쓰기는 나의 가사 노동, 돌봄 노동의 가치를 스스로 평가절하하는 못된 습관을 버리게 도와주었다. 돈을 버는 것으로 내 존재를 증명할 필요성도 없어졌고, 그럴 욕구도 없어졌다. 물론 그 배경엔 남편의 든든한 경제적 활동이 있어 가능했다. 그 사실을 놓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내 삶에 대한 나의 노력과 열정을 남편의 돈으로 쉽게 환산하는 것도 참을 수 없다.


  내 삶에서 누리는 것들에 대해 좀 더 당당해졌다고 스스로 느낄 때, ‘요즘 너무 멋지게 살고 있는 것 같아.’라는 생일 메시지를 남편으로부터 받았다. 그는 진심을 다해 나의 삶을 응원하고 있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의 영선(남편의 성공을 내조하다 알코올 중독과 우울증으로 자살을 선택한 인물)이 되지 않아 감사한 마음도 한 켠에 있을까?





이제 질문에 답해야겠다. 처음엔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 돈과 시간 소요가 남편의 것에 비해 적어 그 일의 가치가 낮다고 대답했다. 표면적으로 떠오른 생각이었다. 그런데 좀 더 생각해보면 난 지금 그 일에 대한 흥미와 관심도 덜해졌다. 강의 준비, 강의 시간에 대해서도. 사실 1년 전부터 강사 일을 그만둘까 고민 중이었다. 현실적으로 중고생 두 아들에게 사교육비 지출이 많은 이 시기가 아니었다면 아마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남편과 비교해 내가 하고 있는 일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열정과 관심이 조금씩 이동 중이었다. 강사일은 내 안에서 예전과 같은 존재감을 갖고 있지 않다. ‘왜 네가 아니고 내가 일을 그만두어야 해’, ‘너만 일 하냐 나도 집에서 일 해’, ‘저 친구는 저렇게 사회적으로 성공했는데...’ 이런 내적 갈등은 나에게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일이 되었다고 고백해야겠다.  내가 간호사 일, 강사 일에 열정을 쏟았던 것처럼  요즘 나는 요가, 글쓰기, 책 읽기, 플루트 연습에 열정을 쏟고 있다. 대학교수라는 꿈은 없어졌고 이젠 요가 강사, 나만의 책 한 권, 독서모임 운영자, 아마추어 교향악단 연주자를 상상해 본다. 이 중에 아무것도 되지 않아도 상관없다. 지금 하고 있는 것 자체가 즐거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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