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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나 Sep 16. 2020

아들방 하얀 문

  Feat. 남편 


'당신이 들어와서 어떻게 좀 해봐'
  일이 많아 오늘 밤 집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던 남편에게 어쩔 수 없이 SOS 문자를 보냈다. 오늘은 아들의 기말고사 3일 중 둘째 날이다. 어제는 수학시험이 있었고 아들은 집에 들어서면서부터 수학 문제가 이상했느니 어려웠다느니 투덜거려 시험 결과를 예상할 수 있었다. 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꿀꺽 삼키고 그냥 수고했다는 말만 건넸다. 오늘은 과학시험 날. 아들은 인사도 없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오늘따라 굳게 닫혀있는 아들의 방문이 모든 것을 반사시켜 거부하는 하얀색으로 보였다. 사춘기 아들을 둔 엄마라면 이 순간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아들을 혼자 두는 것이다. 한두 시간이 지났는데도 방문 밖으로 나오지 않는 아들. 평소라면 배고프다며 지금쯤 나왔을 텐데 여전히 문은 틈 없이 꼭 닫혀있다. 아들의 방문에 살짝 귀를 대었다. 유튜브 소리만 하얀 방문을 뚫고 흘러나왔다. 용기 내어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아들의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밥 줄까?”
 내가 한 말은 단 세 글자. 기다렸다는 듯 아들은 동물스러운 울부짖음으로 오열하기 시작했다. 당황스러웠지만 애써 괜찮다는 표정을 지었고 머릿속은 그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바빴다.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어? 시험 망쳤어?”
 나의 질문에 울음으로 반응할 뿐 말이 없었다. 이쯤 되면 답답함에 큰소리가 나올법하지만 난 연년생 사춘기 아들을 4년 겪은 엄마 아니었던가. 심호흡 한 번 하고 위로랍시고 아들에게 한 마디 했다.  
 “살다 보면 중학교 기말고사 망친 것은 아무 일도 아니야. 기억도 안 나는 일이야. 괜찮아.”
 아이는 미끼를 덥석 물 듯 내 말에 토를 달며 미친 듯이 화냈다. 아차 싶었다. 낚였다. 일단 아들방에서 나와 문을 닫았다.


 몇 시간 후 좀 진정되었나 싶어 다시 아들방으로 갔다. 아들은 내 얼굴을 보자 또 울기 시작했다. 미치겠다. 나는 참았던 말들을 아들에게 쏟아냈다. 나와 성격이 비슷한 아들이라 내 말에 반응하여 목청껏 자신의 이야기를 질러댔다. 적어도 옆집, 아랫집, 윗집은 우리 집 아들이 과학시험 망쳐서 세상 무너진 것처럼 화내고 슬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리라. 이렇게 고함치며 말하는데 모를 리 없다.  

한바탕 쏟아 냈으니 괜찮아진 줄 알았다. 아들은 내가 차려준 저녁식사도 했다. 그런데 아이는 다시 방에 들어가 유튜브만 보고 있었다. 아들에겐 여전히 하루의 시험이 더 남았고 다음 날은 아이가 가장 많은 시간을 공부했던 영어시험이 기다리고 있는데도 말이다. 

 '어머니,  오늘 영어시험 직전 보강 있는 날인데 OO이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확인 부탁드려요' 학원 문자가 도착했다. 아들은 영어 직전 보강을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아! 못난 놈. 화가 났다. 아들에게 다시 한번 학원 안 갈 거냐고, 내일 시험 안 칠 거냐고, 지금 뭐하냐고, 그렇게 멘탈이 약해서 뭐에 쓰냐고, 학원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라고 숨도 안 쉬고 퍼부었다. 내 안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던  말들은 머리를 거치지 않고 입을 통해 뿜어져 나왔고 뿌연 연기가 되어 방안 공기를 무겁게 만들었다. 내일 시험이라고 나름 참았던 말들까지 쏟아내니 아들은 또 악을 쓰며 울고 흐느꼈다. 어린 시절 좋지 않았던 기억들까지 들추며 아들은 힘들어했다. 저녁 8시가 넘었다. 도저히 내 힘으로는 멈출 수 없음을 알았다. 나도 아들도 스스로 멈추기엔 너무 멀리 와 버렸다. 
 나의 긴급 문자를 받은 남편이 9시가 되어서 들어왔다. 남편은 무엇으로 아들을 멈추게 할까? 여전히 아들들이 무서워하는 아빠는 방금 전 나와 아들의 싸움을 소나기로 느껴지게 할 만큼 거대한 태풍을 만들까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남편은 아들을 불러냈고 여전히 울먹거리며 아빠 앞에 앉는 아들.  
 “네가 울면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세수하고 감정 추스르고 다시 와”
 잠시 후 아들이 다시 아빠 앞에 앉았다. 아빠가 한마디 하려면 또 아들은 자신의 감정에서 못 헤어나 울먹였다. 저러다 남편이 정말 욱하면 어떻게 하지, 내가 괜히 남편을 불러들였나 싶어 후회가 밀려왔다.  
 “감정조절도 연습이 필요해. 네가 수학 문제 풀이 연습하듯 자신의 감정이 올라올 때 가라앉히는 것도 연습이 필요해. 다시 가서 세수하고 감정 가라앉으면 다시 앉아”
 한참 후 아들은 격한 감정을 조금 가라앉힌 얼굴로 아빠 앞에 와서 앉았다. 
 “시험 잘 쳤니?”
 “아니요”
 “너는 공부를 왜 해? 원하는 학교에 가고 싶어서 공부하니? 그 학교 가서 좋은 대학 들어가서 좋은 직장 가고 싶어 공부하니?”
 “네”
 “그것은 공부의 목적이 될 수 없어. 사춘기 때 공부는 그 과정에서 배워야 하는 것들이 있어. 아빠는 네가 공부하는 과정을 통해 무엇인가를 알아가고 성취하는 경험을 배웠으면 해. 무조건 공부 잘하라고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살다 보면 해답이 없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때마다 노력한다고 해답을 찾는 것도 아니야. 해답을 찾기도 하고 어떤 문제는 해답을 모른 채 지나가기도 해. 그냥 공부해서 사람들이 말하는 유명대학 나와 좋은 직장 들어가도 결국 남의 돈 벌어주는 것 밖에 없어. 네가 왜 공부하는지 그 이유를 잘 생각해봐야 해”
 “......”
 “내가 너에게 어제도 시험 잘 쳤나 물었지? 하지만 그 결과에 대해 잘했다 못했다 평가는 안 했지?”
 “네”
 “네가 열심히 했다는 것을 아빠는 알아. 그래서 잘 쳤나 물어본 것이지 결과가 중요해서 물어봤던 것은 아니야. 너는 열심히 했다고 생각하겠지만 공부는 며칠 열심히 했다고 그 결과가 꼭 좋은 것은 아니야. 쌓여야 결과로 나타나는 거지. 그리고 네가 밤늦게까지 공부했는데 그다음 날 컨디션을 망칠 만큼 늦게까지 해서는 길게 할 수 없어. 그냥 공부를 많이 했다고 착각하게 만들 뿐이지. 넌 머리가 좋은 편도 아니니 훨씬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해. 네가 시험을 망쳤다고 울 수도 있는데 지금은 아니야. 이 달리기를 다 마친 다음에 지나온 과정들을 돌아보고 그때 울어도 늦지 않아. 오늘 시험 망친 것은 그냥 달리기 하다 넘어진 것뿐이야. 넘어졌다고 포기하고 안 뛰는 것은 찌질한 짓이야. 다시 일어나서 그 달리기는 마무리해야 하는 거야. 공부 못하는 남자를 좋아하는 여자는 있어도 찌질한 남자를 좋아하는 여자는 없어”
 아빠의 이야기가 거부감 없이 아들의 머릿속, 가슴속으로 스며드는 것처럼 보였다. 집안을 꽉 채웠던 뿌옇고 무거운 공기가 조금씩 투명해지는 것 같았다. 억울한 감정 가득 느껴졌던 아이의 표정도 조금씩 걷히는 것 같았다.  
 “너 우리 집 가훈이 뭔지 기억나? 아빠가 유치원 때 알려줬었지. 바르고 건강하고 즐겁게 살자. 여기 건강에는 몸의 건강만 이야기하는 게 아니야. 마음의 건강도 들어가는 거야. 공부해라, 성공해라, 이런 게 가훈이 아니잖아. 아빠는 네가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지냈으면 좋겠어. 지금은 남아있는 달리기 끝까지 달려. 그러고 나서 공부하는 이유도, 시험 준비했던 과정도 다시 돌아봐”
 남편은 자리에서 일어나 담배를 피우러 나갔다. 
 ‘아이한테 너무 필요하고 중요한 이야기라서 감동받았어. 우리 집 가훈이 그렇게 깊은 뜻이 있었는지 나도 이제 알았네.’라고 남편에게 문자를 보냈다. 아들은 욕실로 들어가 다시 세수하고 자신의 방 책상에 앉았다. 이제 아들의 방문은 반쯤 열린 상태였고 다시 본연의  하얀색을 찾았다. 어떤 색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 하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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