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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나 Sep 24. 2020

 보내지 않을 편지

그래도 읽어주길 바래



 어느 날 갑자기 이유도 모른 채 하늘에서 떨어진 작은 냄비 때문에 불편함을 느끼고 세상 사람들과 섞이지 못해 외로워진 ‘아나톨’에 대해 들어 본 적 있니? 아나톨의 작은 냄비처럼 나를 불편하고 외롭게 했던 것을 생각해봤지. 그런데... 미안하게도 너희들이 떠오르더라. 그래서 이 글은 보내지 않을 편지가 될 것 같아. 



 연년생 두 아들을 중고등학생만큼 키워 놓고 보니 육아에 지친 다른 엄마들이 눈에 들어오더구나. ‘나처럼 그들도 외로운 시간이겠구나.’ ‘부디 잘 버티기를...’ 이런 말들이 엄마도 모르게 불쑥 튀어나올 것 같단다. 첫째 널 키울 때 우리 가족은 다세대 주택 2층 전셋집에 살았지. 무더운 여름날 에어컨 없는 방에서 아빠 퇴근할 때까지 선풍기 하나로 버텼어. 엄마 혼자서 널 데리고 먹이고, 놀아 주고, 달래고, 재우고. 이 뫼비우스 띠를 몇 바퀴 돌면 응급실 24시간 당직이 끝난 아빠가 퇴근을 했지. 그러면 아빠 차를 타고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동네를 몇 바퀴 돌았어. 얼마나 시원했는지 ‘살 것 같다’는 말이 절로 나왔지. 모든 게 처음이라 서툴렀고 요령이 없어 배로 고생스러웠단다. 온종일 어린 너와 나누는 대화로는 엄마의 외로움을 풀 수는 없었단다. 나에게 첫 육아는 외로움이었단다. 



 둘째 이야기도 좀 해볼까? 네 출산을 앞두고 엄마와 아빠는 이사를 결정했지. 풍납동은 문화재 개발 제한구역이라 다행히 집값이 인근 지역에 비해 쌌단다. 엄마, 아빠 둘 다 응급실 출신인 것 알지? ‘집사자’라는 말이 나온 바로 다음날 근처 부동산에 가서 두세 개 집을 구경하고 남들은 집값이 오르지 않는다며 꺼리는 한 동짜리 아파트를 계약했어. 한강 조망이 맘에 들었고, 전세 보증금에 1억 은행 빚만 더하면 우리 집이 될 수 있었거든. 엄마에겐 이사 말고 중요한 결정이 하나 더 남았었지. 너희 형 출산 후 이미 육아휴직을 했기 때문에 너의 출산을 앞두고는 회사에 육아휴직 이야기를 도저히 꺼낼 수가 없더라. 16년 전이라 육아휴직이 보편화된 지금이랑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거든. 그래서 사직을 결심했어. 

 사직은 고등학교 3년, 대학교 4년, 그리고 응급실 간호사 6년의 시간이 하루아침에 무용지물처럼 느껴지게 만들더라. 엄마는 응급실 간호사 일을 정말 좋아했거든. 선택의 여지가 없었는데 ‘나의 선택’이었다고 스스로 위로하며 너희 둘을 키웠지. 그냥 하루하루 버텼다고 하면 좀 서글퍼질까? 모두 그렇게 사는 줄 만 알았어. 육아에 지친 어느 날 8층 아파트 창밖을 내다보는데 한강이 내 눈앞에 서 있더라. 마치 술 취하면 땅이 내 눈 앞에 서 있는 것처럼. 그때 알았어. 내가 응급실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 한다는 것을.  



 엄마는 경력 간호사로 다시 입사했고 너희들이 기억하는 응급실 간호사인 엄마 모습은 그렇게 만들어졌단다. 너희 모두 장염이 심하게 걸렸을 때 기억나니? 소아 응급실에서 너희들은 수액을 맞았고 엄마는 성인 응급실에서 다른 환자를 돌봐야 했어. 근무 끝난 다른 간호사 선배가 너희들의 보호자가 되어 엄마의 일이 끝나는 밤 11시까지 함께 있어 주었지. 아빠는 뭐했냐고? 아빠도 병원 생활에 묶여 있어 시간을 낼 수가 없었단다. 너희들이 병원 이모들이랑 놀았다고 기억하는 여행도 사실은 엄마가 참가한 응급전문 간호사 워크숍이었어. 눈치가 보였지만 어떻게든 버티고 싶었어. 그런데 결국은 또 사직을 하고 말았네. 그 이유도 궁금하지? 다음에 기회 되면 이야기할게.



 셋째 이야기도 궁금하지? 

네 이름이 왜 보서인 줄 알아? 메이드 인 스턴, 본 인 울(Made in Boston, Born in Seoul)이라서 보서라 지었어. 우리 가족 모두 1년 정도 보스턴에 머물렀던 적이 있는데 엄마는 한국으로 돌아가면 박사 공부도 시작하고 오빠들 육아로 그만두었던 직장 일도 다시 알아보려 했단다. 실제로 나의 귀국에 맞춰 취업 제의를 받기도 했었지. 그런데 너를 임신하면서 엄마는 마지막 남은 직장생활의 꿈을 완전히 묻어 버렸어. 또다시 수유하고, 기저귀 갈고, 밤잠을 설쳐야 하며, 앞으로 10년 생활은 육아가 우선순위가 되어야 했지. 하지만 더 이상 불편하고 외롭게만 지낼 수는 없다고 마음먹었어. 



 <아나톨의 작은 냄비>에는 맘 좋은 아주머니가 한 명 나타나 아나톨에게 “나도 냄비가 있다”라고 말하며 작은 냄비를 이용하여 살아가는 법을 알려 준단다. 아나톨은 더 이상 불편해하거나  위축되지 않고 작은 냄비를 잘 다루며 친구들과 놀게 되고 냄비를 만나기 이전의 아나톨이 되었단다. 


 엄마는 어떠냐고? 너희도 눈치챘겠지만 나에게 아나톨의 작은 냄비처럼 느껴진 것은 바로 ‘엄마’라는 역할이었어. 엄마라는 이유로 세상에서 잊혀서 외로웠고, 지쳤고, 슬펐던 시간들이 있었단다. 하지만, 엄마는 맘 좋은 아주머니 한 명 대신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어. 나보다 먼저 엄마가 되었던 사람들, 그 이야기를 책으로 쓴 사람들, 엄마의 이야기를 정성 들여 귀 기울이고 읽어주는 사람들을 만나서 힘을 얻었지.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외로움이 덜 해지더라. 무엇보다도 너희들의 성장만큼 엄마를 확실하게 구원한 것은  없었지. 너희들은 몸만 큰 게 아니라 마음도 함께 성장했어. 지금은 나에게 말을 걸어주고, 슬플 때 날 위로하며, 지치고 힘들었을 때 날 토닥일 줄도 알지. 그래서 이젠 외롭지 않단다. 

세 아이 육아(育兒)를 통해 사람이 서로 다른 존재라는 것, 사람의 몸과 마음을 돌보는 것의 어려움, 사람에게는 스스로 성장하는 힘이 있다는 것을 배웠어. 너희들의 엄마로서 17년을 살다 보니 나 스스로도 성장하는 육아(育我)가 되더라. 이젠 엄마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행복한 지도 알 것 같아. 

얘들아, 이 편지를 읽게 되더라도 엄마에게 미안해하거나 슬퍼하지 마. 너희들 마음에 조그만 스크래치가 나는 것도 싫은 게 엄마의 맘이란다. 너희들의 엄마로 살아온 시간은 나의 선택이지 너희들의 선택은 아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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