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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나 Nov 10. 2020

유니폼의 힘


꽃무늬, 과일무늬, 체크무늬 등등 다양한 디자인과 색상의 앞치마를 갖고 있는 나. 여행지 기념품 가게에서조차 앞치마를 고르기도 했다. 그것은 나에게 주부 유니폼과 같았다. 아니 유니폼이라고 나에게 세뇌시켰다.


여고시절 교복, 간호대학 병원 실습복, 응급실 간호사 유니폼으로 이어졌던 17년이라는 시간. 교복을 입으면 누가 봐도 난 학생이었고 그에 걸맞는 행동을 요구받았다. 그리고 난 그 요구에 순응하는 척 했다. 적어도 교복을 입고 대학가 뒷골목 소주방에서 술을 마시진 않았으니까. 교복 입은 우리에게 술을 팔지 않았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유니폼은 사회생활에서도 역할이 분명했다. 직장에서 유니폼은 그 사람의 권리와 의무를 알려주는 역할을 담당한다는 사실을 간호사 유니폼을 입는 동안 더욱 분명히 알았다. 응급실 간호사 유니폼은 반팔 셔츠와 허리끈을 묶어 입는 긴 바지였다. 미국 드라마 <ER>에 나오는 녹색 유니폼이 회색으로 바뀐 것이라 생각하면 된다. 의사와 간호사 유니폼은 동일하였기에 의사는 그 옷에 하얀 가운을 덧입어 자신이 의사임을 밝혔다.




유니폼 입었던 그 시간들을 과거로 보내고 육아와 가사 일을 전적으로 책임지는 ‘주부’에 정착한 지 10년이 넘어간다. 육아를 위해 주부의 삶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나에게 부엌일은 물론 빨래, 청소 같은 일도 쉽게 손에 붙지 않았다. 서툴렀으니 재미도 없었다. 이렇게 재미없고 반복되는 일을 평생 할 수도 있다 생각하니 끔찍했다. 그래서 또 유니폼을 생각해냈다. 집안일하기 전에는 반드시 앞치마를 둘렀다. 좋아하는 음악을 크게 틀고 예쁜 앞치마를 입고 난 프로페셔널 주부라고 자신에게 착각을 강요했다. 앞치마를 두르는 것만으로도 일을 대하는 나의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내가 아프고 힘들어도 간호사 유니폼을 입으면 직업정신을 발휘하여 8시간동안 펄펄 날며 일했던 과거의 나처럼.



어벤져스 아이언 맨 슈트라도 되는 듯 앞치마를 입으면 집안일에 대한 걱정이나 두려움이 줄어들었다. 일상의 집안일은 물론 김치 담그기, 장 담그기, 감자탕 끓이기 등등 내가 하지 못할 것 같은 일에도 근거 없는 자신감이 생겼다. 시간은 꾸준히 흘렀고 나의 집안일도 어김없이 반복되었다. 남편이 출근한 사이 집안 가구를 이리 저리 바꾸고, 가정 지출은 나의 결정과 손길이 필수적이었으며, 시집 부엌에서도 어느덧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더 이상 집안일이 어색하지도, 어렵지도 않았다. 난 찐주부가 된 것이다. 반복이라는 경험이 쌓이면 요령이라는 것이 생기게 된다. 그 다음은 힘이 절반 밖에 들지 않는다는 사실이 주부의 일을 어렵지만 어쩜 쉬운 일로 만들어버리기도 했다.



힘이란 나에게 두 개의 얼굴을 가진 단어다. 내가 지치고 힘들 때 ‘힘’이란 단어는 응원이었고, 다양한 형태의 힘에 의해 정신과 육체를 구속받으면 반감이 생겼기 때문이다. 유니폼의 힘이 나에겐 그랬다. 학생 교복을 입거나 응급실 간호사 유니폼을 입으면 역할에 맞는 마음가짐으로 몰입되어 주어진 일을 효율적으로 해냈다. 앞치마라는 유니폼의 힘을 빌려 주부라는 일에 몰입하려 애를 썼고, 부분적으로는 효과적이었다. 하지만 유니폼에 의해 모든 가사 일이 내 몫으로 여겨지는 것이 싫기도 했다.


요즘은 집안일을 할 때 더 이상 앞치마를 입지 않는다. 굳이 앞치마를 두르지 않아도 집안일을 척척 해치우고, 일하는 몸짓과 풍기는 여유가 누가 봐도 내 모습은 주부다. 주부라는 정체성이 내 몸에 딱 붙었다. 더 이상 나에게 유니폼이라는 외적 장치가 필요하지 않다. 원하면 언제든지 주부 모드로 전환이 가능해졌다.


가끔씩 주부라는 정체성에서 조금 벗어나고 싶어 글을 쓰고 있다. 주부 이외의 내 모습을 찾기 위해 또는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글을 쓰기 위한 유니폼을 특별히 찾지는 않는다. 왜냐면 유니폼이 가지는 본질은 마음가짐의 리셋이라고 나름대로 정의를 내렸기 때문이다. 아침마다 컴퓨터 앞에 앉아 하얀 페이지를 마주보는 행위가 나에겐 글 쓰는 사람의 유니폼같이 느껴진다. 이 행위만으로도 글 쓰고자 하는 마음의 그린 라이트가 켜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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