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돌밥돌밥이 뭔 줄 알아?”
“뭔데? 돌아서면 밥 먹고 돌아서면 밥 먹는 거 아니야?”
어미에게 돌밥은 돌아서면 ‘밥하는’ 것인데 자식은 돌아서면 밥을 ‘먹는다’는 뜻이었구나!
내가 마흔이 될 때까지 수없이 들어왔던 말이지만 어느 날 마음에 콕 박히는 단어가 있었다. 바로 ‘꾸준함’이다. 돈 버는 일 외는 10년 이상 꾸준히 해온 무언가 없다는 점이 후회스러웠다. 뭐든지 시작해서 꾸준히 10년을 이어갔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경험하고 싶었다. 요가, 플루트, 책 읽기 시작은 바로 꾸준한 사람이 되고 싶은 욕망과 현실 욕구가 만난 지점이다. 어느 새 글쓰기도 슬며시 보태졌다. 요가는 달마다 생리를 핑계로 며칠씩 게으름을 피웠고 플루트 연습은 주말에 쉬는 이웃을 위해 나도 쉬었다. 책 읽기는 재미없다는 핑계로 질질 끌었으며 글감이 없다는 이유로 글쓰기도 가끔 했다. 출강하는 학기 중에는 이 모든 것들과 좀 더 거리가 생겼지만, 5년 넘는 시간 동안 완전히 멈춘 적은 없다.
내 취미를 보는 누군가는 ‘남편이 벌어오는 돈으로 집에서 편하게 사네’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가장 먼저 넘어서고 싶은 것이 타인의 일방적인 시선이었다. 그 시선에서 자유롭고 싶었다. 내가 10년 간호사 생활을 왜 접어야 했는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진정 내 선택이었는지, 선택이라는 포장이 필요했는지, 남편과 나 둘의 문제인지, 사회문제인지 고민할 수록 타인의 단순한 시선은 불편했다. 육아를 위해 누군가는 삶의 큰 변화를 겪어야 했고 내가 그 대상이었다. 누군가의 말처럼 상황에 떠밀려 어영부영 살다 죽고 싶지는 않았다.
우선, 내가 지금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남편, 아이들을 나와 떨어뜨렸다 합치기를 머릿속에서 수없이 반복했다. 아이들 행복이 내 행복은 아니다. 내 행복이 아이들 행복이 아니듯 말이다. 서로의 불행을 보는 것이 가슴 아픈 관계는 맞다. 우린 끈끈하게 연결되어있지만 철저히 다른 존재다. 가족이지만 한편으로는 타인이니까.
‘꾸준함’과 더불어 ‘당연한 것은 없다’는 말도 나에겐 중요한 언어다. 가족을 위한 엄마, 아빠의 노동은 당연하지 않다. 부모가 자식을 키우는 것은 의무이자 책임이지만 서로를 위해 우리 삶을 녹이고 있다는 것은 분명 인정하고 감사해야하는 부분이다. 요가를 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육아와 가사 일에 들이는 나의 시간과 노력에 당당함이 생겼다. 잠을 자다가도 일어나 아이를 챙기는 나의 육아와 가사 노동을 위해서는 나를 충전할 수 있는 방해받지 않는 시간이 필요했다. 나의 돌봄을 받는 아이들이 집에 없는 시간이 나의 충전시간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내 삶의 에너지원이 될 수 있는 나만의 시간이 확보될 수록 행복했다. 스스로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싶었다. 육아와 가사만큼 내 생활에 공을 들였다.
코로나로 요가원을 갈 수 없는 날이 많았다. 플루트 레슨도 몇 달 동안 쉬어야 했다. 그나마 혼자서 할 수 있는 책 읽기와 글쓰기는 덜 방해받고 꾸준히 할 수 있었다. 세 아이가 집에 있는 날이 많아 나 홀로 시간은 줄었다. 세 아이는 엄마를 보고 있었다. 자신들이 등교하면 엄마가 집에서 얼마나 자유 시간을 만끽할까 상상했던 사춘기 두 아들은 끝없는 엄마의 가사노동을 보았다. 돌아서서 밥하고 치우고 반복되는 일상을 알게 되었다. 아침부터 부지런히 움직여 가사노동을 마쳐야 다음 돌밥을 하기 전에 잠시라도 엄마의 시간이 확보될 수 있었다. 수시로 방해받을 지라도 플루트를 매일 연습하는 사람, 요가 매트 위에 서려고 용을 쓰는 사람, 유치원생 막내를 재운 후 책을 펴는 사람, 아침마다 뭔가 열심히 쓰는 사람이라는 것을 아이들은 보고 있다. 꾸준함의 중요성을 아이들에게 말하지 않고 시간을 쌓아 그 힘을 보여주고 싶다. 내가 마흔에 깨달았던 것을 아이들이 좀 더 일찍 깨닫는다면 난 이미 부모역할을 잘 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나와 아들의 돌밥돌밥은 서로 달랐다. 코로나 상황으로 같은 공간에서 오랜 시간을 함께 지낸 아이들은 ‘나의 돌밥’을 지켜보고 있다. 멀리서 보면 취미 부자지만 가까이서 보면 엄마는 돌밥돌밥을 하며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열심히 하는 사람으로 보일까? 육아는 ‘말하는 대로’ 아니고 ‘보여주는 대로’라고 믿으며 난 오늘도 내 삶을 산다. 아이들도 자신들의 삶을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란다. 우리는 각자의 삶을 살다 아주 가끔 서로의 삶을 힐끗 쳐다볼 때가 있다. 엄마가 미안함과 측은함의 대상이 아닌 자기 인생을 멋지게 살아가는 사람으로 서 있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