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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망 Dec 06. 2022

내 영혼의 떡볶이

떡볶이가 쏘아 올린 마음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분식을, 특히나 떡볶이를 좋아하지 않을까? 학창 시절 학교 앞 떡볶이는 빠뜨릴 수 없는 코스다. 시간이 흘러 '이모'의 떡볶이가 다양한 브랜드의 떡볶이로 변화되고 컵볶이와 밀키트로 진화하기까지 수많은 사랑을 받았듯 내게도 떡볶이는 오랜 세월을 동고동락한 인생의 반려식품쯤 된다.




작은 동네 어귀 이웃집 친구 엄마가 하던 떡볶이집의 떡볶이가 처음 접한 떡볶이였다. 그 시절 용돈 받을 일이 잘 없던 꼬꼬마는 그저 친구 얼굴 볼 핑계로 떡볶이 구경을 다녔다. 맘씨 좋은 아주머니는 한 번씩 맛보라며 포크 쿡 찔러 빨간 떡볶이 하나를 내미는데 달달하고 매콤한 그 맛이 어린 입맛에도 얼마나 잘 맞던지 맵다며 혀 쏙 내밀고 헤~ 날숨 쉬면서도 입가에 묻은 양념까지 쪽 빨아먹곤 했다. 어쩌다 한 번씩 동전이 생기면 쪼로로 달려가 100원 하나 내밀고 길쭉한 떡볶이 떡 두 개를 받아 오래오래 아껴먹었다.(너무 싼가? 그때는 그랬다. 아이스크림 하나에 50원 하던 시절이다. 6.25 이후까지는 올라가지 않으니 적당히만 놀라도록...) 조금 베어 먹고 양념 묻혀 쪽 빨아먹고 또 양념 푸욱 찍어 또 한입. 빨간 손잡이 조그만 바가지로 국물 한가득 떠서 호호 불어 마시고 또 가득 뜨고. 눈치 없게도 떡볶이 한 접시 먹는 동안 국물만 네댓 번 떠먹었건만 아주머니는 그저 웃으셨다. 친구네의 이사로 떡볶이집 문을 닫는 날 마음 한구석이 텅 빈 듯 허전했다.




이제야 밝히자면 난 그리 입맛이 예민한 편이 아니다. 있으면 먹고, 없으면 안 먹고, 있어도 귀찮으면 안 먹고. 내게 음식은 생존의 문제쯤 취급될 정도로 미식을 따지는 일이 잘 없다. 엄마가 요리를 못하시는 건 아니다. 아니, 너무 잘하신다. 누구나 엄마의 음식을 맛보면 다 맛있다고 할 정도로 음식을 잘하셨다. 어릴 때부터 가족들이 외식을 한 적이 거의 없었다. 조리사 자격증도 여럿이라 한식부터 제과, 제빵까지 하시는 요리 종류도 다양하고 종종 사람들을 대접하면 거나하게 잘 차려 사람 수에 요리 양까지 딱 맞춰 한 끼 먹고 치울 수 있게 준비하실 정도였다. 오빠 결혼식과 내 결혼식 하객음식을 엄마와 이모가 함께 다 차리셨다고 하면 감이 오실까? 태어나보니 우리 엄마 딸이라 그냥 다 그렇게 먹고 지내는 줄 알았다. 엄마 음식을 먹어본 주위 사람들이 매일 맛있는 음식을 먹어서 좋겠다고 부러워하곤 했다. 그럼에도 미식가가 아닌 나는 밖에 나가면 맛있는 음식이건 맛없는 음식이건 가리지 않고 잘 먹었다. 복스럽게 먹는다며 할머니들 칭찬도 종종 들었다. 남들이 맛없다고 버리려는 음식도 아깝게 왜 버리냐며 달달 긁어먹어서 집에서 그렇게 맛있는 음식들을 먹는 애가 왜 이런 것까지 다 먹냐는 의혹의 눈초리를 받아야 했다.




그런 엄마가 떡볶이 좋아하는 딸을 위해 종종 만들어주셨는데, 엄마의 떡볶이만은 뭔가 달랐다. 엄마는 떡볶이를 먹고 자란 세대가 아니라 친숙한 음식이 아니었던 탓일 테지만, 달고 짜고 맵고 강렬한 자극 대신 양념이라곤 최소한의 고추장, 간장에 채소 가득인 너무 건강한 맛이랄까? 어릴 때야 엄마가 해주신 음식만 먹으니 그러려니 했는데 자랄수록 엄마의 떡볶이는 아쉬웠다. 맛을 잘 따지지 않건만 엄마의 떡볶이는 그랬다.




졸업 후 한동안 자취방을 얻어 살았는데 소울메이트 떡볶이를 일주일에 5일간 해 먹었다. 떡 1킬로, 어묵 한 봉지, 고추장 한 통을 사다가 줄기차게 끓여먹는데 친구들이 놀러 와도 메뉴는 떡볶이였지만 그 누구도 맛있다고 하진 않았다. 나는 맛을 탐미하지 않을뿐더러 요리에 공을 들이거나 연구하지도 않는다. 그저 생김이 비슷하고 씹어 먹을 수 있으면 맛이야 어떻든 욕구가 충족됐던지라 최소한의 노력으로 만들었던 탓이다. 떡, 어묵 먹고 싶은 만큼, 물은 떡이 잠길 만큼만, 고추장 두어 스푼 휘휘 저어 바글바글 끓여먹으면 끝인 것이다. 이런 떡볶이를 대접한데 대해 당시 친구들은 뒤통수를 가격하고 싶었을 테지만 그렇다한들 내 조리법이 바뀌지는 않았을 것 같다. 맛에는 둔감하고 손가는 게 귀찮은 먹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후 해외에서 한동안 지냈는데 모은 돈 별로 없이 손 벌리지 않고 무작정 떠나온 길이라 가난했고 돈 한 푼이 아까운 애처로운 상황이었다. 집 떠나니 그리운 건 한식인데 한식당은 내 형편에 어려웠고 해외에서 한식 재료는 구하기 힘들고 비싸 먹기 힘들었다. 가끔씩 집에 연락했는데 엄마에게 한식이 먹고 싶댔더니 엄마가 택배를 한 상자 보내주셨다. 반찬거리는 상할까 보내지 못하고 실온으로 보낼 수 있는 것들 중 골라 보내주신 것이 떡볶이 떡이었다. 좋아하는 것 해 먹으며 잘 버티라는 뜻이었다. 길쭉길쭉 평범한 떡볶이 떡 대신 별 모양, 하트 모양 예쁜 모양 가득한 떡볶이 떡들을 보니 엄마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한 번 웃어. 밝은 마음 잘 챙기고."




여전히 종종 떡볶이를 먹는다. 그래서 아직도 집에 가면 엄마는 나를 위해 담백하고 건강한 (사실은 심심한) 엄마 버전의 떡볶이를 만들어 주실 때가 있다. 여전히 입맛에 잘 안 맞고 좋아하진 않지만 엄마의 떡볶이는 오래 기억에 남을 맛이다. 스스로는 잘 먹지도 좋아하지도 않지만 딸의 취향을 존중하고 아끼는,

엄마의 사랑의 맛이기 때문이다.



We never know the love of a parent till we become parents ourselves.
우리는 부모가 되기 전까지 절대 부모님의 사랑을 알지 못한다.

-Henry Ward Beec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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