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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망 Dec 04. 2023

소리까지, 추억까지 맛있다

오감으로 먹는 천하일미

방학을 맞아 대학 동아리 선후배들과의 회의 겸 모꼬지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지나는 길이 집 근처라 난 먼저 내려 들어가면 됐다. 하지만 조금씩 어둑해져 가는 시간, 선후배, 동기들의 집까지는 거리가 있어 요기라도 해서 보낼까 싶었다. 그렇게 예정에도 없이 열댓 명 남짓의 청춘을 이끌고 집으로 들이닥쳤다. 도착 몇 분 전 엄마에게 전화로 사정을 설명하는 최소한의 성의를 보였지만 막무가내 철부지짓이다. 내가 엄마였다면 불호령이 떨어질 법한 일. '라면이나 끓여 먹고 보내!' 하겠는데 엄마는 늦은 시간 큰 상을 꺼내 손님대접을 해주셨다.




요리에 솜씨도, 관심도 있는 엄마는 늘 새로운 음식들도 찾아 만들어보곤 했다. TV에 나오는 요리들도 스쳐 넘기지 않고 그때그때 꼼꼼히 레시피를 적었다. 요리책에 새로운 수제 레시피들을 더해 갔다. 그리고 손에 익을 때까지 몇 번씩 만들어보곤 하셨다. 그즈음 새로운 음식을 영상으로 접했는데 바싹 튀긴 누룽지 위에 소스를 부어 먹는 누룽지탕이었다. 지금에야 중국집에 가면 먹을 수 있다거나 밀키트도 나와있지만 20년 전 누룽지탕은 들어본 적도, 접할 기회도 없는 낯선 음식이었다. 먹어본 적 없는 이 낯선 음식이 엄마의 요리본능을 자극했다.




누룽지탕은 청나라 초기 건륭제 때 즈음 시작되었다고 한다. 중국요리는 세계요리 중 다양하기로 으뜸인데 그중 건륭제가 가장 맛있는 음식이라 손꼽았다는 속설이 전해진다. 황제가 신분을 숨기고 마을을 두루 살피며 다니다 끼니때가 지났다. 준비해 간 음식이 없어 인근 농가에 먹을 것을 부탁했는데 밥은 없지만 일행을 안타깝게 여긴 아낙이 누룽지와 야채국물을 뜨겁게 데워 냈다. 구수한 누룽지 냄새와 누룽지의 타닥거리는 소리가 허기진 건륭제의 식욕을 자극해 천하제일의 요리라고 했다나.




찹쌀밥을 눌러 누룽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보통 밥을 짓는 맵쌀로는 바삭하고 맛있게 부푼 누룽지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커다란 팬에 둥그렇고 얇게 밥을 펴서 누룽지를 몇 판이고 구웠다. 새우, 오징어 등 해산물과 청경채, 당근, 양파 갖가지 채소도 손질해 볶았다. 굴소스로 간을 맞춘 후 전분물을 부어 너무 묽지도 되지도 않은 농도의 소스를 만들고 참기름도 휘 한 바퀴 둘러준다. 그리고 기름솥을 부글부글 끓여 작은 크기로 자른 누룽지를 넣어준다. 뜨거운 기름에 딱딱하고 납작한 누룽지가 들어가면 뽀얗고 커다란 꽃처럼 피어나며 파삭하게 튀겨진다. 그러면 준비 끝이다.




누룽지탕은 시간조절이 관건이다. 갓 튀긴 누룽지와 따끈한 소스의 조합이어야만 그 본연의 매력이 절정에 달한다. 너른 접시에 튀긴 누룽지를 도담하게 펴서 담고 상에 낸다. 그리고 그 위로 쏟아지는 소스. 치이이익. 파사사사사사. 자글자글. 기름에 다글다글 볶이는 듯한 소리에 우와 소리가 절로 나온다. 침도 고인다. 게임 끝이다. 얼른 수저를 들고 먹어야 한다. 튀긴 누룽지와 소스는 아직 뜨겁지만 파삭파삭한 맛으로 귀를 즐겁게 하고 부드러운 소스와 잘 어우러져 입을 행복하게 한다. 너무 뜨겁다면 미식의 교향곡을 들으며 조금 기다려도 괜찮다. 촉촉하게 소스가 스며든 누룽지는 부드럽게 입을 가득 채우고 슬며시 미소를 짓게 만든다. 목 넘김도 부드럽게 쑤욱 넘어간다.




뜬금없는 딸의 전화에 어머니는 가득 구워 쟁여뒀던 찹쌀 누룽지로 급하게 누룽지탕을 만들어주셨다. 이제 갓 대학생된 친구들이 어디 가서 이런 음식을 먹어봤으랴. 우와아. 신기하다. 맛있겠다. 어머니 너무 맛있어요. 그날의 대접은 최고였다. 정성스러운 밑반찬도 가득이었지만 두고두고 선후배, 동기들은 너무 맛있었다며 누룽지탕을 이야기했다. 레시피를 좀 알려달라 부탁해 엄마가 적어준 메모도 받아간 친구도 있었다. 차가운 공기에 움츠러들게 만드는 날씨, 엄마의 누룽지탕이 그립다. 오감으로 먹는 즐거운 누룽지탕. 아이에게 만들어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엄마에게 전화해서 물어봐야겠다. 그 맛을 낼 수 있을진 모르지만.

사진출처: 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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