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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망 Dec 02. 2023

엄마, 적당히 해!

광기 어린 엄마의 도전

"엄마 내가 풀 거 남겨놔"
"응 알았어."
대답하는데 머쓱하더라.
아이 쓰라고 깐 어플이잖아.


다섯 살 크리스마스 선물이었어. 싸지만 쓸만한 태블릿. 너무 일찍 노출하나 싶지만 학습은 즐겁게 하는 거니까 크게 망설이진 않았던 거 같아. 어차피 교육용 기기들이 서로 자기 써달라 아우성이잖아. 그런 기기에 매여 있는 것보단 내가 원하는 걸 자유롭게 골라 이용하는 게 더 좋았어.
크리스마스보다 보름쯤 일찍 사서 선별한 교육콘텐츠로 가득 채웠어. 유별난 엄마? 맞아. 주제별로 폴더도 나눴어. 기본적으로 언제든 찾을 수 있는 네이버사전과 인터넷 브라우저는 꺼내두고 영어, 수학, 그리기, 음악, 독서 등으로 나눠 편하게 이용하게 했지. 격주나 월별로 배경화면도 바꿔줬더니 흥미를 가지고 재미있게 사용하더라고.


유튜브나 동영상은 굳이 보여주진 않았어. 유익한 영상은 TV로 보여주면서 언제 어디서나 손쉽게 볼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했으면 싶더라. (다행히 어릴 때부터 집에서건, 외출해서건 밥 먹을 때 동영상을 보여준 적이 없어. 그냥 같이 먹는 거지.) 크면서 이웃형이나 태권도 친구들과 이야기하면서 유튜브에 관심을 갖더니 그 뒤론 교육콘텐츠에 대한 흥미가 줄더라고. 교육콘텐츠보다 유튜브가 톡톡 튀는 재미가 있으니 당연하지.



아이를 살피며 필요하거나 유익한 어플들을 관리하는데 이번에는 연산앱을 설치했어. 얘는 수학을 재미있어하고 스스로 잘한다며 자신감이 넘치거든. 그래도 속도연습은 필요할 것 같고 그냥 반복하기엔 지겨울 것 같더라고. 7일 무료체험을 했더니 재미있어서 더 하고 싶다 부탁하길래 결제했지.(부탁 요거 별표. 돈 아깝게 엄마가 먼저 하라고 내밀진 않으려고). 원리나 방법해설도 재미있게 알려주길래 좋아 보였는데 며칠 만에 얘가 완전히 잊어버린 거야. 그새 영 흥미가 떨어진 눈치네. 1학년이긴 한데 1학년 단계가 수세기부터 나오니까 너무 쉬워서 재미가 없나 싶더라고. 단계 선택은 자유롭지만 어느 정도 차례대로 진행해야 되는 게 있으니까 '앞부분은 엄마가 조금 도와주지 뭐.' 싶어서 대신 풀게 됐지.



그런데 이 엄마 보통 아니잖아? 평소엔 느긋하게 최대한 일을 미루면서 게임 하나 깔면 밤낮 안 가리고 수시로 달려들어서 됐다 싶을 때까지 하는 집요한 사람인 거. 쉽게 시작하진 않아도 시작하면 끝을 보는 광기?
연산앱에 매일 출석하고 그날의 학습을 하다 보니 랭킹 시스템이 있더라고. 학습보상으로 받는 다이아로 랭킹을 올릴 수 있는 걸 알게 되니 욕심이 나는 거야. 1등부터 3등  외에는 비교적 순위싸움이 치열하지 않더라고. 게다가 나는 초등수학은 마무리한 어른이잖아.(아이들판에 끼어드는 게 치졸하긴 하지) 어디에서 보상을 더 많이 받는지 알게 되면서 순위가 쭉쭉 올랐지. 30위권 안에 이름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금세 10위권 안에 들고, 잠시의 기싸움을 넘겼더니 3위권이 되고.
애는 옆에서 엄마가 하는 걸 보더니 자기가 순위권 안에 들었다고 너무 뿌듯해하고 신나 하는 거야. 점점 더 출석을 챙기고 스스로 문제들을 풀고 학습영상을 보며 더 많은 다이아를 모으려고 애쓰는 거지. 하루에 풀 수 있는 문제가 어느 정도 정해져 있는데 엄마가 자기보다 문제를 많이 푸니 자기가 풀 문제가 줄어든다며 적당히 풀라고 혼도 내. 많이 봐줄 테니 절반만 풀라고. 그래. 까짓 거 네가 다 풀어도 되는데 승부욕 발동한 엄마가 자꾸 더 풀고 있네.

2등까지 큰 무리 없이 올라왔는데 1등 이 친구 만만치 않네. 지지 않으려고 점수를 자꾸 벌려놓는 거야. 몇 백점 정도야 조금 애쓰면 앞지를 수 있으니 괜찮지만. 의미 없는 점수경쟁 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코 앞까지 점수를 붙이지 않고 유지했어. 서로 괜히 피곤하잖아. 그런데 랭킹 종료 10일을 두고 아바타를 꾸미겠다고 다이아를 모으다 1등을 앞질러버렸네? 새벽에 1등 점수가 자꾸 올라가길래 얘도 새벽에 한다고? 깜짝 놀랐더니 그게 내 점수였네. 어익후. 실수했네. 깜짝 놀란 1등이 점수차를 벌리는데 천 점을 훌쩍 넘기더라. 그래도 그러려니 적당히 점수차를 유지하면서 미리 준비했지. 한 챕터를 마치면 대량의 다이아를 주는데 각 챕터를 한 문제씩 남겨놓고 다 푸는 거야. 무슨 애들 게임에 이렇게 심리전까지 하냐고? 에잇. 아무리 그래도 이기고 싶다고. 성취감 느끼는 건 좋잖아?



그렇게 한 달의 마지막 밤 10시부터 문제를 풀기 시작해서 순식간에 몇 백개의 다이아를 모았어. 그런데 내가 몰랐던 거야. 마지막 날의 치열한 순위경쟁을. 12시가 되도록 다들 안 자고 문제를 풀고 있다는 걸. 내가 모으는 만큼 다른 사람들도 열심히 모아서 올리고 있다는 걸. 정신없이 두 시간을 꼬박 풀고서 마쳤네. 질주의 계산을. GG.

치열한 그날의 흔적



그래서 지금은 뭐 하냐고? 또 열심히 풀고 있어. 광기 있는 엄마잖아. 될 때까지 해야지. 엄마는 엄마의 연산을 하고, 아이는 아이가 고른 단계로 새롭게 계정을 만들어서 풀고. 서로 도와주며 경쟁하는 선의의 관계랄까나. 서로서로 혼도 내고 다독이면서 그렇게 하는 거지. 오늘도 달려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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