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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망 Jan 30. 2024

상처가 되는 말

무심해서 미안해

아이는 오늘도 일기 쓰기를 잘했다. 일주일에 한 번 일기 쓰기. 겨울방학도 끝나고 이제 1학년 일기 쓰기는 마친다고 선생님이 말씀하셨지만 미래의 작가님께서 글 쓰는 감을 잃지 않았으면 해서 엄마는 그래도 한번 써보라 했다. 보고 싶다던 태양의 서커스 보고 온 소감을 한번 남겨보라는 적극적인 영업. 서커스를 보러 가기 전부터 이미 일기를 어떻게 쓰면 좋을까 장난처럼 이야기했었다.


-'루치아를 보러 가기로 했다' 하고 왜 가고 싶었는지 이유를 쓰는 거지.
-'TV에서 태양의 서커스를 보고 가보고 싶었다' 이렇게?
-그치. 그러고는 갔을 때 본 거랑 무슨 생각을 했는지 적으면 되겠다.
-그래.


선생님께 검사받거나 발표할 게 아니라 굳이 할 필요 없고 내키지 않지만 아이는 일기를 쓰기로 했다. 물어보지 않은 내용을 입으로 종알종알 이야기하며 쓴다.


-한 가지 내용으로 쓰랬으니까 저녁 먹은 거랑 화장실 다녀온 건 안 써도 되겠다.
아. 엄마. 엄마가 왜 일기 쓰라고 했는지 알겠어.
-왜?
-여기 적혀있어. 선생님이 2학년이 되어도 나만의 일기 쓰기는 꾸준히 쓰도록 부탁드린다고 했잖아.

아이는 엄마의 의도를 조금도 나쁘게 보지 않는다. 오롯이 믿음이다. 조금의 모자람도 없는 온전한 믿음으로 엄마를 본다.




아이가 어릴 때부터 자기 전에 하던 일이 있다. 글자 하나 모르던 꼬꼬마에게 그림책 읽어주듯 하던 QT(quiet time)다. 말 뜻대로 조용한 시간인데 성경을 읽고 생각해 보는 시간을 말한다. 어릴 때 보던 QT책은 유아들이 보는 그림책 정도였지만 이제는 조금 더 글밥이 늘고 스스로 질문에 답도 적어야 하는 수준이다. 대개 아침에 하루를 시작하며 하지만 늘 아침잠이 많아서 아침이 바쁜 우리 집은 자기 전에 한다. 그나마도 매일 꾸준히 하지 못하고 밀리기 일쑤지만.

지문은 가정과 학교, 교회에서 바라는 기도제목을 한 가지씩 쓰라는 것이었다. 아이가 기도하는 건 늘 무서운 꿈을 꾸지 않는 것뿐이라 생각나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사람을 한 명씩 생각하고 그 사람을 위한 기도를 생각해 보자고 했다.


-음.. 엄마. 아, 아니. 아빠한테 할 거야.
-그래? 뭐라고 할 건데?
-으음.. 빨리 마치고 와서 나랑 많이 놀아달라고.
-그거 아빠를 위한 기도 맞아? 너한테 좋은 기도 아니야? 아빠한테 좋은, 아빠한테 필요한 거 없을까?
-히잉. 모르겠어.
-아빠 출장 간다는데 힘들지 않게 해 달라든지, 아빠 수술한 곳 아프지 않게 해 달라든지? 너는 아빠한테 관심이 없어?

순간 아이의 눈빛이 바뀌었다. 눈가가 붉어지며 일렁이는데 고이는 물방울을 떨구지 않고 참고 있었다. 속상한 게 분명한데도 표현하지 않고 모두 마쳤다. 지나가려다 장난처럼 품에 넘어진 아이를 안고 물었다.

-기도하는 게 어려웠어?
-응. 근데 나 아까 상처받았어.
-왜?
-내가 아.. 압빠한테. 후.. 관심이 없냐고.. 해서어..어허엉

아이는 끝내 품에 안겨 울음을 쏟아냈다. 거친 숨을 내뱉듯 억울한 마음을 토해내듯 엉엉 모든 뜨거운 물을 흘려냈다.

-미안해. 미안. 엄마가 잘못했어. 우리 ㅇㅇ이가 아빠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관심이 없냐고 말해서 속상했네. 미안해. 엄마가 잘못 말했어. 나쁘게 말해서 미안해.

다독임과 사과에 서러운 울음은 점점 더 커져서 쉽사리 잦아들지 않았다. 온 가슴으로 들썩이는 아이의 몸을 꼭 끌어안았다. 아이도 힘껏 엄마를 쓸어안았다.

모를 수 있지. 아직 다른 사람의 입장을 생각하기 어려울 수 있지. 알려주지도 않고서 모른다고 네 마음까지 단정하다니 얼마나 억울했니. 너는 엄마를 무조건 믿는데. 그런 엄마가 네 마음 하나 몰라주니 얼마나 서운했니. 엄마라고 모두 잘 알고 잘 하는 건 아니지만 무심하게 이야기해서 미안해.

한참 동안 서러움을 쏟아내고 난 아이는 미안하다는 엄마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괜.. 찮아" 했다. 사소해 보이는 말은 예리했고 찔린 상처는 여전히 아프지만 그럼에도 엄마를 토닥이며 괜찮다는 너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니. 너는 한결같이 따뜻하게 가르쳐주는데 엄마가 잘 배우지 못해서 미안해.


"하나님 나라는 이런 어린아이들의 것이다."(누가복음 18:16 중, 쉬운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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