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할론 2. Role play - 2) Obey

따르기

by 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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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시간이 끝나고 교실에 들어가자, 왠지 모르게 분위기가 떠들썩했다. 민수가 칠판 앞에 서서 뭔가를 적고 있었고, 재훈과 예림이 그 옆에서 웃고 있었다. 칠판에는 굵은 분필로 ‘연극 배역 최종 확정!’이라는 글씨가 크게 적혀 있었고, 그 아래에 이름 네 개가 줄지어 있었다.


토끼 – 성준
자라 – 재훈
용왕 – 민수
내레이션 – 예림

성준은 문을 닫고 칠판 쪽으로 다가갔다. 순간 이름이 눈에 들어오자 발걸음이 멈췄다.
“이거 뭐야?”
민수가 뒤돌아보며 말했다. “어제 회의했어. 다수결로 정했어.”
“다수결?”
“응, 토끼는 니가 하는 게 제일 낫다고 다들 얘기해서.”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았잖아.”
“야, 어제 안 왔잖아.”
“그건 내가 아파서 그랬지.”
“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시간 없으니까 정해야 했지.”

성준은 한참을 바라보다가 작게 웃었다. “그래서 이렇게 적어놓은 거야? 나도 모르게?”
“야, 뭐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여. 그냥 역할 정한 거잖아.”
“그냥?”
민수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냥. 주인공인데 뭐가 문제야. 다들 니가 해야 자연스럽다고 했어.”
“자연스럽다고?”
성준은 그 말을 되뇌었다. 어딘가 속이 울렁거렸다.
“그래, 니가 원래 말 잘하고, 표현력도 있잖아.”


재훈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게 이유야?”
“그럼 뭐, 니가 어울리니까 그러는 거지.”

성준은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조용히 물었다.
“그럼 만약 내가 하기 싫다고 하면?”
민수가 잠시 멈칫하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야, 그런 말 왜 해. 수행평가잖아. 해야지.”
“그래서 다들 정한 거야?”
“응.”
“나 빼고?”
“어쩔 수 없었다니까.”





그 말이 이상하게 귀에 걸렸다. ‘어쩔 수 없다.’
언제부턴가 사람들이 자기 편한 결정을 정당화할 때 쓰는 말처럼 들렸다.

“그래서 이건 그냥 네가 정한 거네.”
“야, 다 같이 정했다고 했잖아.”
“내가 없는데 그게 다 같이야?”
“니가 없으니까 우리가 한 거잖아.”

성준이 잠시 침묵했다. 재훈이 눈치를 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야, 그냥 하자. 주인공이 토끼면 멋있잖아. 무대에서도 가운데 서고.”
“무대 가운데.” 성준이 중얼거렸다. “그게 좋아서 정한 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 재훈이 말을 잇지 못했다.

민수가 팔짱을 꼈다.


“야, 진짜 왜 이렇게 예민해? 주인공이라 좋다고 해줘도 삐져?”
“이게 삐진 걸로 보여?”
“그럼 뭐야.”
“이건 그냥… 내가 선택하지 않은 일이라고.”

교실 안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성준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
민수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야, 너 혼자 너무 복잡하게 생각해. 우리는 그냥 빨리 정해야 해서 정한 거야.
아무도 악의 없었어.”
“악의가 없으면 괜찮은 거야?”
“뭐?”
“그냥 편한 방향으로 정해놓고, ‘다 같이 한 거다’라고 말하는 게 제일 싫어.”

민수가 얼굴을 찌푸렸다.
“됐어. 그렇게까지 말할 거면 네가 알아서 해. 토끼든 뭐든, 다 바꿔.”
“그래, 그럴게.”

성준은 칠판 앞으로 다가가 손바닥으로 자신의 이름을 문질렀다.
하얀 분필 가루가 번지며 글씨가 뿌옇게 퍼졌다.
손끝에 미세한 분진이 닿았다.
그 순간, 뒤쪽에서 예림의 조용한 목소리가 들렸다.
“성준아, 너무 그러지 마. 그냥 다 같이 하자. 진짜로 네가 주인공이면 잘할 거야.”
그 말이 이상하게 멀게 들렸다.
성준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지만, 말 대신 가방을 들었다.

“그럼 니들끼리 해.”
“야, 진짜 나간다고?” 재훈이 소리쳤다.
“그래.”


그는 문 쪽으로 걸어갔다.
민수가 말했다. “야, 성준아, 지금 뭐 하는 거야.”
“하기 싫어.”
“왜 갑자기.”
“갑자기가 아니라, 계속 이랬잖아.”

그는 문을 열었다.
문 손잡이가 손바닥에 차갑게 닿았다.
그때 복도 쪽에 있는 청소도구함 옆의 거울이 눈에 들어왔다.
교실 안의 풍경이 그 안에 고스란히 비쳤다.
자리에 앉은 재훈, 손을 멈춘 예림, 그리고 칠판 앞에 선 민수.
그들 사이에 서 있는 자신도 보였다.
표정이 굳은 채로, 가방을 맨 모습.
그 얼굴은, 무대 위에서 연기를 하는 배우의 얼굴처럼 보였다.

성준은 그 거울을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이게 웃긴 거지.”
그 말은 혼잣말 같았지만, 안에 있던 모두가 들을 만큼의 크기였다.




그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교실 안에 울렸다.
그 이후로 아무 말도 없었다.

그날 이후로 성준은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하루, 이틀, 일주일.
그의 책상은 그대로였다.
칠판에 번졌던 분필 자국도 그대로였다.
누가 지우려 하면 다시 하얗게 자국이 드러났다.
친구들은 그걸 볼 때마다 어쩐지 손이 멈췄다.
그리고 아무도 먼저 그 자리를 채우지 않았다.










주어진 역할에 어떻게 따르는가?


(1) Observe - 규칙 관찰

주어진 역할을 따르려면 무엇보다 먼저 규칙을 인식해야 한다. 규칙은 개인이 집단에서 행동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경계와 지침을 제공한다.


규칙을 주의 깊게 본다는 것은 단순한 지침 확인을 넘어, 그 안에 담긴 기대와 제한을 읽어내는 과정이다. 학교에서 학생은 생활 규칙을 통해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배우고, 직장에서 직원은 업무 규정을 통해 조직이 기대하는 행동 방식을 이해한다. 이처럼 규칙 관찰은 사회적 기대를 내면화하고 역할 수행의 방향을 정해 준다. 그러나 동시에 규칙은 자율적 해석을 제한하고, 개인의 선택지를 줄이는 작용도 한다.

규칙을 관찰하는 일은 역할 수행의 출발점이다. 이로써 개인은 집단이 요구하는 틀을 인식하고, 곧 그 틀에 맞추어 몸을 조정하는 단계로 나아가게 된다.


(2) Bend - 굽힘

규칙을 알았다면 이제는 그것에 맞춰 몸을 움직여야 한다. 관찰이 이해의 차원이라면, 굽힘은 실제 순응의 차원이다.


몸을 굽힌다는 것은 자신의 행동을 규칙과 지침에 맞게 조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수업 시작 종이 울리면 자리에 앉는 학생, 보고 절차에 따라 행동하는 직장인 등이 그 예다. 이 과정에서 개인은 자신의 방식보다 집단의 요구를 우선시하며, 공동체 질서를 유지한다. 하지만 이런 굽힘은 자율성과 독창성을 축소시키고, 불만을 축적하는 부작용을 낳는다.

굽힘은 역할 수행을 실질적으로 가능케 하지만 개인의 내적 긴장을 남긴다. 그 결과 사람들은 규칙 그 자체가 아니라, 구체적인 지시 수행으로 시선을 옮기게 된다.


(3) Execute - 지시 수행

역할의 수행은 결국 행동으로 드러난다. 규칙을 이해하고 몸을 굽히는 과정을 거친 뒤, 개인은 구체적 지시를 실행한다.


지시의 수행은 역할을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 주는 순간이다. 교사가 과제를 내주면 학생이 제출하고, 상사가 업무를 지시하면 직원이 따르는 것이 그 예다. 이는 집단이 기대하는 바를 실제 결과로 전환하는 행위이자, 공동체의 기능을 유지하는 핵심 방식이다. 하지만 단순한 지시 수행은 개인의 목소리를 축소시키고, 창의성이나 비판적 사고를 억제할 수 있다. 이 단계에서는 역할 수행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집중될 뿐, ‘왜 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은 배제되기 쉽다.

지시를 수행하는 단계는 집단이 기대하는 결과를 만들어 내지만, 개인의 주체성을 최소화한다. 결국 이 흐름은 판단권마저 외부에 내어주게 된다.


(4) Yield - 따름

따르기의 마지막 단계는 스스로 판단하지 않고, 그 권한을 외부에 넘기는 것이다.


판단을 내어준다는 것은 행위 수행을 넘어, 옳고 그름의 결정권 자체를 포기하는 행위다. 학생이 교사의 판단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직원이 상사의 결정을 이의 없이 수용하는 모습이 대표적이다. 이는 공동체의 효율성과 안정성을 높여 주지만, 동시에 개인의 주체성을 약화시키고 성찰의 가능성을 줄인다. 이 단계에서는 역할 수행이 순응의 극단으로 치닫는다.

판단을 내어주고 따른다는 경험은 순응의 완성을 보여 준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지점은 단순한 따름을 넘어, 각본대로 살아가게 된다.











¶ 역할은 도구다 - 거울


거울은 스스로 빛을 내지 않는다. 빛을 받아 되돌릴 뿐이며, 그때도 임의로 왜곡하지 않고 들어온 각도와 표면 상태를 따라 반사한다. 표면이 깨끗하면 상이 선명하고, 먼지나 김이 서리면 형상이 흐려진다. 평면 거울은 크기와 비율을 그대로 되돌려 주고, 곡면 거울은 굴절에 따라 상을 늘이거나 줄인다. 그래서 거울을 제대로 쓰려면 먼저 표면을 닦아 반사 효율을 높이고, 각도를 맞춰 보고 싶은 대상을 프레임 안에 넣어야 한다. 결국 거울은 “자체 발광이 아닌 반사”, “표면 관리”, “각도·거리의 조절”이라는 단순하지만 엄격한 규칙으로 작동하는 도구다.

역할도 거울과 닮아 있다. 한 사람의 말투와 태도, 결정 방식은 마음속 충동을 그대로 방출하기보다 상황이 비추는 요구를 반사할 때 제대로 기능한다. 수업에서 학생 대표로 말할 때와 팀 회의에서 조율자로 설 때, 집에서 형·누나로 있을 때의 말투가 달라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장면이 바뀌면 우리는 먼저 “표면을 닦는다.” 즉, 감정의 먼지를 가볍게 털고 맥락을 확인해 선명도를 올린다. 이어서 “각도를 맞춘다.” 관계의 거리, 톤의 높낮이, 정보의 양을 조절해 상대가 보려는 그림을 프레임 안에 담는다. 거울이 마음대로 풍경을 바꾸지 않듯, 역할도 위계와 규칙, 합의된 절차를 임의로 비틀지 않는 절제를 전제로 한다. 그렇다고 완전히 수동적인 것도 아니다. 평면·볼록·오목 거울을 선택하듯, 우리는 같은 사실도 어떤 표면으로 반사할지를 고른다. 사적 농담을 덜어 내고 요지 위주로 말하기, 반대로 경직된 분위기를 풀기 위해 미소와 여백을 얹기—이 선택이 역할의 숙련을 가른다.

역할을 거울처럼 본다면, 그것은 창조적 자아를 과장해 내세우는 장치가 아니라 상황의 윤곽을 또렷하게 드러내는 방식이 된다. 문이 막힐 때 “내가 부족해서”라고만 여기지 않고, 먼저 표면이 흐려졌는지(감정 정리), 각도가 틀렸는지(거리·톤·순서), 거울의 종류가 맞는지(권한·포지션)를 점검하게 된다. 이렇게 관점을 바꾸면 두 가지 이점이 생긴다. 첫째, 불필요한 힘주기 대신 정교한 조정으로 관계를 맑힌다. 둘째, 여러 크기와 곡률의 거울을 키링처럼 갖추듯 역할 레퍼토리를 설계해 장면마다 알맞게 꺼내 쓸 수 있다. 결국 역할의 목적은 나를 과시하는 데 있지 않다. 상대가 보아야 할 것을 가장 선명하게 보이도록, 표면을 고르고 각도를 맞춰 세계와 타인을 정확히 비추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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