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마음 한켠에는 자유롭게 나는 새처럼 살고 싶지만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뿌리를 내리고 나무처럼 열매 맺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뿌리를 잘못 내리면 원하지 않는 억압을 받기도 하는데요, 어쩌면 유제품 알레르기가 있어서 우유를 먹으면 안 되는데 우유를 억지로 먹어야 했던 영아 시절부터 일수도 있겠습니다.
인혜가 햇볕이 잘 드는 남향 아파트 칠층으로 이사 가면서 온 가족이 모인 날 채식주의자던 영혜는 친아버지에게 붙들려 억지로 탕수육이 입에 쑤셔 넣어지고 뺨을 맞기도 하고 결국 자해를 하기에 이릅니다. 이 사건은 영혜의 어린 시절이 녹록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억지로 밥을 먹듯이 억지로 떠밀려 살아왔고 내 삶이 아닌 삶을 떠안듯이 살았으며 모든 불행을 내 탓으로 감당하고 살아온 영혜와 인혜입니다. 마치 태풍 속에서 춥고 어두운 날씨를 혼자 감당해야 하는 나무처럼요. 항상 조용했던 영혜는 자해를 시작으로 참아왔던 억압에 대한 분노가 터져버린 것으로 생각됩니다.
p172. 그러니까... 이제 알겠어요. 그게 내 뱃속 얼굴이라는걸. 뱃속에서부터 올라온 얼굴이라는걸.
p228. 사람들이, 자꾸만 먹으라고 해. 먹기 싫은데, 억지로 먹여. 지난번에 먹구선 토했다구...... 어젠 먹자마자 잠자는 주사를 놨어. 언니, 나 그 주사 싫어, 정말 싫어...... 내보내줘. 나, 여기 있기 싫어.
p237. 그녀는 살아본 적이 없었다. 기억할 수 있는 오래전의 어린시절부터. 다만 견뎌왔을 뿐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선량한 인간임을 믿었으며, 그 믿음대로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았다. 성실했고 나름대로 성공했으며, 언제까지나 그럴 것이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후락한 가건물과 웃자란 폴들 앞에서 그녀는 단 한번도 살아본 적 없는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그 사건 이후로 영혜의 뱃속에서부터 올라온 분노는 계속 분출되었고 사회적으로 금지된 관계를 하고 몸부림을 치면서 정신병원을 드나듭니다. 반면에 언니 인혜는 아들 지우를 생각하며 마지막까지 정신을 놓지 않습니다.
p264. 꽃과 잎사귀, 푸른 줄기들로 뒤덮인 그들의 몸은 마치 더 이상 사람이 아닌 듯 낯설었다. 그들의 몸짓은 흡사 사람에서 벗어나오려는 몸부림처럼 보였다. 그는 무슨 마음으로 그런 테이프를 만들고 싶어했을까. 그 기묘하고 황량한 영상에 자신의 전부를 걸고, 전부를 잃었을까.
p224. 나는 이제 동물이 아니야 언니. 중대한 비밀을 털어놓는 듯, 아무도 없는 병실을 살피며 영혜는 말했다. 밥 같은 거 안 먹어도 돼. 살 수 있어. 햇빛만 있으면.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정말 나무라도 되었다고 생각하는 거야? 식물이 어떻게 말을 하니. 어떻게 생각을 해. 영혜는 눈을 빛냈다. 불가사의한 미소가 영혜의 얼굴을 환하게 밝혔다. 언니 말이 맞아...... 이제 곧, 말도 생각도 모두 사라질 거야. 금방이야. 영혜는 큭큭, 웃음을 터뜨리고는 숨을 몰아쉬었다. 정말 금방이야. 조금만 기다려, 언니.
마침내 영혜는 정신병원에서 물구나무서기를 하며 식사를 거부하고 나무가 되기로 합니다. 그 마음은 차라리 땅으로 꺼져 새순을 피우게 새로 태어나고 싶은 사람의 모습을 탈피하고 싶은 몸부림입니다.
폭풍 같은 고통 속에서 언니 인혜는 바둑돌을 '복기'하듯이 이 모든 불행을 막을 수 없었을까 후회합니다.
p199. 막을 수 없었을까. 두고두고 그녀는 의문했다. 그날 아버지의 손을 막을 수 없었을까. 영혜의 칼을 막을 수 없었을까. 남편이 피 흘리는 영혜를 업고 병원까지 달려간 것을 막을 수 없었을까. 정신병원에서 돌아온 영해를 제부가 냉정히 버린 것을 말릴 수 없었을까. 그리고 남편이 영혜에게 저지른 일을, 이제는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을, 값싼 추문이 되어버린 그 일을 돌이킬 수 없었을까. 그렇게 모든 것이 -
친애하는 고 김수미 선생님이 첫 번째 남자친구와 결혼하기 위해서 집에 인사를 갔는데 세 가지 이유로 거절을 당했다고 합니다.
첫째는 조실부모요,
둘째는 대학을 못 나왔으며,
셋째는 연예인이라서요.
김수미는 대답합니다.
대학은 다시 들어가면 되고
연예인은 그만두면 되지만
부모님을 일찍 떠나보낸 것은 제 뜻이 아니거든요.
당신도 다음날 세상을 떠나면
따님도 조실부모해서 시집 못 갈 수 있어요.
나는 지금까지 비굴하지 않게 살았어.
억압과 고통 속에 선택의 순간이 있습니다. 모든 선택 하나하나를 떠밀리 듯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 김수미 선생님처럼 선택을 상황에 맞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나답게 하는 것. 그것이 나를 보호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네요.
평소 시간 없다고 미뤘던 한강 보드장에서 <채식주의자> 책을 읽고, 가보고 싶었던 찜질방에서 고구마 감자를 숯불에 구워 먹으며 책 정리를 했습니다. 고구마와 감자가 진정한 채식이었네요. 숯불에 지져진 고구마가 어찌나 달던지... 아프기 전에 나를 보호해야 한다, 예방주사와 같던 책 <채식주의자>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