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런 총량의 법칙

사서일기_20251020_입사 375일차

by 천유

이용자를 상대하는 업종에는 '빌런 총량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기존 빌런이 사라지면 새로운 빌런이 등장해 어쨌든 빌런의 수는 유지된다는 뜻이다.


여름 방학과 긴 추석 연휴가 지나자 매일 도서관을 찾는 이용자가 대거 물갈이됐다.

뜨거운 여름, "내가 누군줄 알아?" 권법을 시전하며 도서관을 시끄럽게 했던 '정치 할머니'가 발길을 끊으셨고,


늘 고개를 푹 숙이고 다녀서 사람들과 마주치기 싫거나 수줍음이 많은가 했던 사람이 조용한 밤 시끄럽다며 이용자에게 냅다 욕설을 내뱉어 경악을 금치 못하게 했던, 자기 믹스 커피 마시게 종이컵을 달라고 했던, 자기 폰으로는 증권사 앱에 접속이 안 된다며 사서에게 네 폰으로 해보게 폰을 빌려달라고 십 분 넘게 데스크 앞에서 노려보며 당황스럽게 했던 문제적 인물이 사라졌으며(아놔, 사라진 줄 알았는데 재등장했다.),


휴대전화 충전함에 커다랗게 배터리 충전하면 터지고 하나에 하나만 충전하라는 안내문을 대문짝만하게 붙여 놓고, 칸마다 정말 세심하게 안내문을 붙여놓아도 보란듯이 배터리를 충전하고, 충전함을 서너 개 차지하는 것도 모자라 마감 시간까지 안 찾아가 분실물 처리를 하게 만들고, 몇 달 뒤에 찾아와 자기 배터리나 휴대전화를 내놓으라고 하는, 도서관 이용자들끼리의 사소한 시비나 온갖 일에 다 끼어들어 참견을 일삼던 중년 남성이 보이지 않았고,


복도에서 혼자 중얼중얼 독백을 하다가 욕설을 내뱉다 자료실에 들어오면 멀쩡하다가 다시 복도에 나가면 중얼중얼, 그러다 어떤 날엔 자료실에서건 복도건 가리지 않고 혼자서 누군가와 대화하듯 중얼대다 때론 소리를 질러 이용자들의 걱정을 사던 여성이 사라졌으며,


술 냄새를 풍기며 어린이실과 일반자료실을 한 바퀴 걸어다니고 무가지를 집어가던 할아버지도 나타나지 않았고,


굵은 금목걸이에 아디다스 트레이닝복과 운동화를 착용하고 노트북석에 앉아 인강을 보며 아침부터 밤까지 묵묵히 공부를 하던 청년이 시험이 끝났는지 보이지 않았고(꼭 붙기를 기원한다! 이분은 빌런 아님),


어느 날 부터 홀연이 등장하여 노트북석에서 각종 자료를 보며 진지하게 뭔가를 작성하다가 가끔 복도로 나가 음료를 마시며 머리를 식히시던 여성분이 보이지 않았다(이분도 빌런 아님).


새로운 이용자가 대거 등장한 것은 도서관 이용율 제고 차원에서 고무적인 일이다. 눈에 띄는 점이 있다면 젊은 층도 많이 늘어났지만(대학 중간고사의 영향이 크다.), 중장노년 층이 굉장히 많아졌다는 것이다. 그들은 하루종일 있는 경우가 많고 질문도 많다. 도서관 이용층도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그러나 여름부터 등장한 신발 변태와 약쟁이, 도서관이 떠나갈 듯이 킁킁 코를 푸는 할머니는 변함없이 날마다 출근 체크 중이다. 도서관 직원들이 예의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열심히 다니는 것을 보면, 정말 눈치를 못 챈 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 곳이 없어서 그런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변태와 약쟁이라니, 선제적으로 출입을 막았으면 좋겠다만, 그게 안 된다는 게 화가 난다!


내가 생각하는 빌런은 이렇다. 3회 이상 이용자나 직원을 불편 또는 불쾌하게 하는 자, 소리지르거나 욕을 하는 자, 부당 또는 무리한 부탁을 하는 자, 공공자산을 사적인 용도로 점유, 사용하거나 훼손하는 자 등...


지금까지도 트라우마로 남은 것은 뭐니뭐니해도 소리치는 남성들이다.

아, 생각만으로도 '서터레스'가 차 오른다.

솔직히 이것 때문에 두 번째 도서관 계약 종료로 쉬면서 다시 도서관에서 근무를 해야 할까 무척 망설이기도 했고 아직도 남성 이용자가 꺼려진다.


고함 먼저 치고 보는 남성 이용자는 처음으로 근무했던 도서관에 유독 많았고, 두 번째도 만만치 않았는데, 다행이랄까 이곳에서는 아직 소리치는 이용자는 없었다. (입이 보살이라고, 이런 말 했다가 어느 날 짜잔~ 하고 나타날 수도 있다! 안 돼!!!)


각종 SNS를 통해 주민센터 빌런과 쿠팡 빌런도 만만치 않다는 것을 보며 도서관 빌런은 그나마 나은건가? 싶기도 했다. (노노!! 아니야, 아니야!!)

남의 고충을 위안으로 삼으면 안 된다고!


어쩌면 나도 어딘가에서는 빌런이 될 수도 있고, 그들도 의도적으로 빌런 짓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그게 더 나빠! 자기가 뭔 짓을 하는지도 모른다는 게!). 이렇게 생각하면 '뭐 그럴 수도 있지, 오늘은 운수가 나쁜 날이네'라고 좋게 좋게 넘어갈 수도 있지만, 나의 정신 건강에 대미지가 차곡차곡 쌓이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문득 생각해보니 첫 번째, 두 번째 도서관은 감정노동자에 대한 안내문이 어디에도 붙어있지 않은 반면, 지금 도서관에는 데스크 앞에 감정노동자 보호 문구를 부착해 놓았다. 이것도 알게 모르게 도움이 되는 것 같다.


도서관까지 와서 얼굴 붉히지 마시고, 부디 즐겁고 편안하게 이용해주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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