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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live Jul 21. 2022

지나친 자식 바라기를 멈춰라

해바라기만 해바라기일까? 모든 꽃은 해바라기이다.

해바라기는 왜 해바라기일까?

사람들은 '해바라기'하면 제일 먼저 무엇이 떠오를까?

떠오르는 기억이야 제각각 다르겠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해를 향해 우뚝 서 있는 노란 해바라기 꽃이 가장 먼저 떠오르지 않을까?


그리고 어떤 이는 "꼭 그렇게 다 가져가야만 속이 후련했냐?"란 명대사를 남긴 김래원 주연의 한국 영화 '해바라기'가 기억이 날 수도 있다.


또 다른 이는 '내 마음의 보석상자'를 비롯해 다양한 히트곡을 불러 천상의 화음을 들려준 듀엣 해바라기가 가장 먼저 떠오를지도 모른다.


혹시 해바라기씨의 모습을 본떠 만든 L제과의 쵸코볼 과자 해바라기가 기억이 나는 사람도 있을까?


그 외에도 다양한 모습으로 각자의 기억 속에 있던 해바라기를 떠올리게 될 테지만 해바라기라는 단어를 듣고 머릿속에서 가장 먼저 연상되는 것은 각자의 경험에 비추어 가장 강력한 기억으로 저장되어 있는 모습일 것이다.


내 기억 속의 해바라기는 서늘한 눈매와 시원시원한 웃음이 매력적인 소피아 로렌이 출연했던 이탈리아 영화 '해바라기'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영화의 한 장면인 드넓은 해바라기 밭이 떠오른다.

영화를 보지 않았어도 헨리 맨시니의 애절한 메인 테마곡은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지평선과 맞닿아 있는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끝없이 펼쳐진 해바라기 밭은 나에게 꽤나 이국적이고 강렬한 장면으로 기억된다.

영화 속 해바라기 밭의 촬영지인 우크라이나에 비해 좁은 땅덩어리를 갖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그렇게 없이 펼쳐진 해바라기 꽃밭을 본 적이 없어서 더욱 그랬을지도 모른다.


요즘 러시아와의 전쟁으로 우크라이나는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마치 영화 속 내용과 평행이론인 것처럼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될 전쟁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고귀한 목숨을 잃었고, 어쩌면 해바라기가 아름답던 그곳이 전쟁의 상흔으로 초토화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영화 속 대사처럼 전사한 군인 한 명당 하나의 해바라기 꽃이 되어 더 많은 해바라기가 피었을지도 모르겠다.



해바라기는 꽃들 중에서도 키가 큰 편에 속하고 꽃의 크기는 최대 60cm에 달할 정도로 크다.

그런데 해바라기는 왜 해바라기라는 이름으로 부를까?

태양처럼 정열적인 노란색을 띠고, 꽃이 해의 방향을 따라가며 바라보기 때문일 것이다.


유독 해바라기가 해를 바라본다고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꽃의 크기가 크기 때문에 더 극적으로 해를 따라 방향을 달리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런 면에서 나는 해바라기라는 꽃의 이름은 다분히 모순이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비단 해바라기뿐만 아니라 자세히 보면 모든 꽃들은 해바라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꽃뿐만 아니라 모든 식물은 해를 바라보고 있다.


식물은 마음대로 장소를 이동하며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빛의 에너지를 얻어 성장해야 한다.

그래서 광합성을 하기 위해 항상 해를 향해 있다.

조금이라도 빛을 더 받으려고 해가 가는 방향으로 시시각각 몸을 틀어서 해를 따른다.


그 모습이 해바라기처럼 극적으로 눈에 띄지 않을 뿐 꽃들을 보면 아침에는 동쪽을 향해 있고 한낮에는 꼿꼿하게 있다가 오후가 되면 서쪽을 바라본다.



물론 음지에서 잘 자라는 식물도 있겠지만 대체로 커다란 나무 밑에서는 해를 볼 수가 없어서 식물이 제대로 자랄 수가 없다.

우리 집 정원에는 다양한 꽃들이 있는데 기세 좋은 식물들 사이에서 손바닥만 한 빛이라도 더 받으려고 안간힘을 써서 위로 솟아오르려는 식물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보면 밑에 있는 동안 햇빛을 제대로 받지 못해서 가늘가늘하고 연약하다.

그만큼 식물에게 있어 햇빛은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기 때문에 해바라기만 해바라기가 아니라 모든 식물은 해바라기인 것이다.



  

해를 바라보는 해바라기처럼 식물들이 해를 바라본다면 많은 엄마들은 오매불망 자식 바라기이다.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 엄마들은 쥐면 꺼질세라 불면 날아갈세라 애면글면하면서 자식 바라기 한다.


자녀가 어렸을 때는 생존에 관한 모든 것을 전적으로 부모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부모는 자식 바라기 해야 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자녀가 경제적, 심리적인 독립을 할 나이가 되고, 어엿이 직장을 다니면서 경제활동을 하는 나이가 되어도 자식을 품 안에서 기르는 캥거루 같은 부모들이 많다.


인간의 성장은 독립으로 나가는 과정이다

독립을 시켜도 될 나이이건만 함께 살다 보니 부모들은 시시콜콜 자녀의 일에 간섭을 하고 자녀들은 일정 부분 부모의 신세를 지며 부모의 그늘에 있다 보니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을 하지 못한다.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

열 달 동안 엄마와 나를 연결해 준 탯줄을 자르면서부터 이미 독립적인 존재이고, 인간의 성장은 결국 독립으로 나아가는 과정인데 현실적으로 그렇지 못하다 보니 많은 부작용이 따른다.


최근에 경제적인 이유로 부모가 어린 딸과 함께 극단적인 선택을 해서 많은 사람들을 안타깝게 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 역시 부작용의 예라고 할 수 있겠다.


유독 우리나라에서 이런 일들이 많이 발생한다. 동반자살이라고 미화해서 표현을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자녀가 의사 능력이 없거나 아니면 자녀의 의사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저지르는 존속살인이다.


내 자식을 독립된 인격체로 존중을 하지 않고 내가 낳았기 때문에 나의 부속물쯤으로 생각해서 저지르는 크나큰 범죄인 것이다.


요즘은 주거비용 등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부모로부터 독립을 하지 못하는 자발적 캥거루도 많고, 독립을 했다가 다시 되돌아온 캥거루까지 점점 증가하는 추세라고 하니 이는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사회 문제로까지 확대되고 있다.


물론 완전한 독립이란 경제적 독립이 선행되어야겠지만 주거비 부담에 물가마저 폭등세이다 보니 먹고사는 것조차 쉽지 않아 갈수록 점점 독립이 어려워지는 시대이다.



자녀가 일정한 나이가 되면 독립을 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데 자식 바라기 하는 부모는 독립을 꿈꾸는 자녀에게 서운한 감정이 들고 때로는 걸림돌이 된다.


사람은 성장하고 발달하는 과정에서 사춘기 무렵이면 부모로부터 심리적인 독립을 꿈꾼다.

그런데 경제적인 독립이 이루어지지 않아 미뤘던 독립을 대학을 들어가면서 혹은 취직을 하게 되면서 경제적인 자립이 가능해지면 본격적으로 분가를 통한 독립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자식 바라기 하는 부모는 자녀로 하여금 '나를 키워 준 부모를 유기하고 방치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죄책감이 들게 한다.


기억이 안 나세요?

부모는 "우쭈쭈~ 내가 다 해 줄게"에서 시작되는 자식 바라기와 그에 따른 양육의 보상심리를 멈춰야 한다.

당신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부모는 자녀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며 자녀를 양육한다.

아주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겠지만 분명히 우리의 부모님들도 우리를 그렇게 양육했다.


지나친 자식 바라기는 어렸을 때 "뭐든지 내가 다 해 줄게"로 시작해서 결국은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하며 양육에 대한 보상심리를 바라게 된다.

자녀를 양육하는 데 있어 보상심리를 바라서도 안 되겠지만 그렇다 해도 부모의 보상심리를 자녀가 충분하게 채워주면  별 문제가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 자녀와 부모의 기대 수준이 다르거나 부모가 원하는 만큼의 보상이 돌아오지 않으면  실망과 원망이 생길 수밖에 없다.

결국은 그토록 사랑했던 자식이었는데 자식은 부모를 버거워하다가 도피의 수단으로 결혼을 선택하는 경우도 왕왕 있다.

하지만 부모로부터 도피의 수단으로 선택한 결혼이었기 때문에 또 다른 불행이 시작되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그런 결혼을 택한 자식에 대해 부모는 어떤 태도를 보일까?

많은 경우 자식에게 받지 못한 보상을 며느리에게 대신 받으려고 한다.

'도대체 며느리는 무슨 죄?'

그저 한 남자를 사랑해서 결혼한 죄밖에 없는데 시부모는 아들 대신 며느리에게 대리 효도를 강요한다.

그러다 보니 그 피해는 부메랑이 되어 고스란히 자식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

이처럼 지나친 자식 바라기는 피차간에 불행한 삶을 살게 만드는 것이다.




경제적인 이유로 어쩔 수 없이 부모님과 함께 살아야 한다면 심리적인 독립, 정신적인 독립만이라도 해야 한다.

부모는 최종적인 목표가 자녀의 독립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자녀가 독립을 할 수 있도록 돕고, 독립하는 자녀의 삶을 응원하고 지지해 주자.


그리고 자녀의 독립 이후에는 그동안 자녀 양육으로 미뤄 왔던 내 꿈들을 펼칠 수 있도록 제2의 인생을 살아갈 준비를 차곡차곡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요즘에는 맘만 먹으면 저렴한 비용으로 평생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관도 많을뿐더러 배움에는 일정한 때가 있는 것도 아니요 끝이 있는 것도 아니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 새로운 것에 호기심을 갖고 배움을 게을리하지 아야 치매예방에도 좋다.


또, 자녀는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캥거루족이 되어 부모의 경제적인 도움을 받는다면 늘 그랬듯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먹고 치우는 기본적인 일조차 늙은 부모에게 의지하지 말고, 부모의 일손을 거들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사분담을 하는 것으로 심리적인 독립이라도 해야 한다.


나이 먹은 캥거루를 부양해야 하는 부모도 이제는 더 이상 젊지 않다.

자녀가 독립할 연령이 되면 부모는 노화가 진행되는 연령이다.

노화로 인한 다양한 신체적인 질병들이 나타날 뿐만 아니라 신체적인 노화와 질병은 우울이나 좌절감 등 심리적인 질병을 초래하기도 한다.


함께 사는 부모님이 아침에 눈뜨고 일어나면 어제까지는 없었던 병이 생기고, 여기저기 아픈 곳이 늘어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일방적인 부모의 희생을 바라기보다는 기왕에 함께 살아야 한다면 부모와 자녀가 서로서로 배려하고 보완하는 삶을 산다면 좋을 것 같다.



내가 해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 내 뒤에는 반드시 그늘이 생긴다

나무가 우람하고 클수록 그늘은 깊고, 나무 밑에서 자라는 식물들은 건강하게 자라는 것이 어렵다.

마찬가지로 내가 해를 바라보며 서 있는 동안에 내 뒤에는 당연히 그늘이 생길 수밖에 없다.

내 그늘 뒤에 누군가 있을 수도 있고 나로 인해 건강하게 자라기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을 한 번쯤은 생각해 보길 바란다.


부모가 너무 자식 바라기를 하면 부모로 인해 자녀들에게는 원치 않는 그늘을 드리우게 된다.

식물들이야 움직일 수 없으니 강한 것만, 변화에 적응하는 것만 살아남을 수밖에 없지만 사람은 식물과는 다르지 않은가?


내 뒤에 있는 자녀에게 자생할 수 있는 충분한 해가 비치는지 한 번쯤은 돌아보고, 내 자녀를 위해 해에게서 한 발짝 물러나서 양보할 줄도 알아야 진정한 어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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