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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live Jan 03. 2022

홍시보다 붉은 얼굴

혼자 술 다 먹은 언니

'갱년기가 나에게로 왔다.'

그 시작은 안면 홍조였다. 워낙 강렬한 모습으로 다가왔기에 나는 갱년기가 나에게 찾아온 날을 정확하게 기억한다.


그날은 며칠 있으면 55세에서 56세로 넘어가는 2017년 12월 23일 토요일 오후였다. 


학교에서 인문학 커뮤니티 모임이 있던 날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얼굴이 화끈화끈하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계절적으로 한겨울인 12월의 추위가 매서울 때라 추운데 있다가 따뜻한 실내로 들어가서 그러려니 하고 처음에는 대수롭잖게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가라앉기는커녕 상태가 점점 심각해졌다. 술을 마신 것처럼 얼굴이 화끈화끈하다 못해 뜨겁고 붉게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급기야 모임을 주재하시던 교수님은 

“올리브, 얼굴이 왜 그렇게 빨개요? 무슨 일 있어요? 어디 아픈 거 아니에요?” 

하고 물었다.


“글쎄요, 추운데 있다가 실내에 들어와서 그럴 거예요. 좀 있으면 괜찮아지겠죠. “ 

그렇게 말은 했지만 내 얼굴은 쉽사리 가라앉질 않았고 시간이 지나도 진정이 되지 않았다. 


모임을 마치고 차가운 밤공기를 쐬고 걸으니 조금 진정이 되는 듯했지만 뒤풀이 장소로 옮겨서 실내로 들어가니 다시 홍조가 시작되었다. 


내 얼굴은 잘 익은 홍시보다 붉었다.



표현을 홍시보다 붉다고 했으나 정확한 내 얼굴의 색깔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관용적 표현일 뿐 홍시는 주황색에 가깝고 내 얼굴은 그보다는 진한 분홍색에 가깝기 때문이다.


홍조 띤 내 얼굴을 정확하게 견줄만한 색깔이나 표현이 무엇일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제대로 표현할 방법이 없다. 


굳이 꼽으라면 해마다 올해의 색깔을 발표하는 미국의 팬톤사에서 만든 기준색 표집 기호 RGB 255 51 153인 푸시아 핑크나 푸시아 로즈쯤이 아닐까 싶다.

사실 팬톤사가 매년 올해의 색을 발표하지만 발음하기도 어렵고 기억하기도 어렵다. 푸시아 로즈나 푸시아 핑크를 알 사람이 몇이나 될까. 색을 찾아보니 그렇다니 그런가 보다 할 뿐이다. 


나의 홍조와 비슷한 푸시아 핑크색


본격적인 갱년기 증상과 나의 첫 만남은 그렇게 강렬했기에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2017년과 2018년에 걸친 겨울에는 뒤늦게 대학원 입학을 준비하고 면접을 보러 다니던 시기였는데 나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로 면접을 봤다.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에는 복도 밖 차가운 곳에서 얼굴을 꽁꽁 얼린 상태로 기다렸다가 내 차례가 되면 들어가서 면접을 봤지만 내 얼굴의 홍조는 감출 수 없었다. 

오히려 면접이 주는 긴장감과 부담감 때문에 더욱더 붉디붉었다.


지금처럼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것이 일상이었다면 달아오른 내 얼굴을 조금이나마 감출 수가 있으련만 그 당시는 그렇지가 못했으니 면접관들은 필시 고개를 갸웃거렸을 것이다. 



'여기 있는 술 혼자 다 먹은 언니'

대학원을 다니면서 나의 별명은 '밥 잘 사 주는 예쁜 언니'도 아니고, '술 잘 사 주는 언니'도 아니었다.

‘여기 있는 술 혼자 다 먹은 것 같은 언니’였다. 


항상 홍시처럼 붉은 얼굴을 하고 있어서 붙은 별명이지만 나로서는 그 별명이 마뜩잖았다. 


사는 곳이 양평이라는 지역적 특성상 마지막 전철이 다른 노선보다 두어 시간은 빨리 끊긴다. 개강파티, 종강파티 때면 맥주 한 잔을 앞에 두고 안주빨을 올리며 마지막 전철의 카운트다운을 하던 터라 억울하기 그지없었다. 


그 후로 5년이 지나 호르몬 대체제를 복용하고 있는 지금도 얼굴의 홍조는 완벽하게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다. 


홍시보다 붉은 상태에서 화장을 하면 볼연지를 바른 것 같은 발그레한 모습으로 조금 옅어졌을 뿐이다.


얼굴의 홍조로부터 시작된 갱년기 증상은 시도 때도 없이 진땀이 나는 증상으로 발전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얼굴이 화끈거리면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에 진땀이 났다. 등은 항상 식은땀 범벅이었다. 


잠결에도 열이 오르고 진땀이 날 것 같은 기분 나쁜 감각을 알 수 있었다. 그런 감각을 느끼고 난 뒤에는 여지없이 열이 오르고 진땀이 나서 옷이 젖었다. 


그럴 때면 이불을 발로 걷어찼다가 땀이 식으면 오한이 들어서 다시 주섬주섬 이불을 덮기를 밤새 열 번 정도는 반복했고 한 겨울에도 창문을 열고 침대 맡에 선풍기를 두는 것은 필수였다. 



밤새도록 열이 오를 때마다 창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기를 반복하니 제대로 된 잠을 잘 수가 없어 항상 잠이 부족하고 피곤에 찌들었다. 


갱년기에 좋다는 민간요법과 보조제, TV에서 광고하는 갱년기 약들을 이것저것 다 먹어봤지만 전혀 개선이 되지 않았다. 

TV에 나오는 갱년기 약 광고가 허위 과장 광고라고 투덜대며 애먼 광고를 탓했다.


열이 머리로 올라와서 머리가 항상 뜨끈뜨끈 열감이 있고 땀으로 축축하다 보니 모낭이 모근을 단단하게 잡아주지 못해 탈모도 진행이 되는 것 같았다. 


가뜩이나 나이를 먹을수록 머리카락도 얇아지고 윤기 없이 푸석푸석해지는데 두피에 항상 열까지 있다 보니 나의 모발은 시간이 지날수록 엉망진창이 되어 갔다. 



남자나 여자나 얼굴의 완성은 자고로 머리빨인데 갈수록 외모에 자신도 없어졌다. 

얼굴의 완성이 머리빨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 남자 연예인들은 군 입대를 하면서 머리를 짧게 자른 모습을 인증샷으로 SNS에 올리는 경우가 더러 있다. 


"속았네, 속았어. 알고 보니 저 연예인도 머리빨이었어"

그 모습을 보면서 ‘아, 저 사람도 머리빨이었구나. 그동안 머리빨에 속았네 속았어!’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종종 있다. 


물론 헤어스타일 따위는 전혀 상관없는 우월한 비주얼도 있지만 그만큼 외모에 있어서 헤어스타일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기 때문에 나의 자존감도 바닥을 치고 있었다.



갱년기로 인해 나는 점점 위축되고 자신감이 없어졌다. 얼굴은 항상 홍시보다 붉었고, 등짝에는 진땀이 흐르고, 머리카락은 윤기를 잃고 부스스해졌으니 대중 앞에 나서야 하는 나로서는 자신감이 점점 떨어지고 있었다. 


남들은 갱년기가 뭔지도 모르고 넘어가거나 가볍게 넘어가는 사람들도 주변에는 많은데 유독 남들보다 혹독하게 다양한 증상의 갱년기를 치르고 있으니 나는 내가 싫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엾고 안타깝기도 한 복합적인 감정이 든다.   


'나의 갱년기는 현재 진행형'

아직도 끝나지 않은 나의 갱년기는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언제나 끝나려나. 과연 끝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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