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소화되지 못하는 것이 있다.
다음날 아침저녁을 같이 먹자고 지숙에게 연락이 왔다
그녀의 저녁 식탁은 변함없이 압력솥의 밥이 하얀 김을 내고 있었다
뚝배기에서 보글보글 소리를 내며 끓고 있는 된장찌개, 홍고추 청양고추 두부가 동동 떠있었다
프라이팬에서는 이름 모를 생선이 맛있는 냄새를 풍기며 구워지고 있었고 구운 김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구운 김 옆에는 파장이, 파장 옆에는 감자조림, 오이무침, 파김치등이 식탁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뚝배기에 흐를 듯이 끓고 있던 계란찜을 마지막으로 식탁이 완성되었다
사실 지숙이 해주는 음식은 대단한 음식은 아니다
하지만 늘 그 식탁에 앉으면 배가 고파 견딜 수가 없게 된다.
지숙의 음식은 따뜻하다 아니 뜨겁다 후후 불며 입속으로 들어가 뱃속으로 들어갈 때
그 온도가 느껴질 정도로 뜨겁다
드라마 속에 나오는 엄마들이 늘 하는 말
"뜨거울 때 먹어야 맛있어"라는 말의 뜻을 좀 알 것 같다
수많은 엄마들이 음식이 식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이유를 말이다.
그 온도를 맞추기 위해 엄마들은 늘 서두르며 음식을 하겠지 오늘 지숙처럼....
엄마가 지금도 살아있다면 저렇게 나를 위해 온도를 맞추며 열심히 밥을 차렸을까?
엄마에 대한 나의 기억은 대부분 아파하거나 기운이 없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몸이 괜찮을 때면 엄마는 나에게 이런저런 음식을 해 주었다
볶음밥, 연근 조림, 김, 생선구이, 멸치조림등 아이들이 좋아할 만하고,
건강에도 좋을 것 같은 음식들을 해주었던 기억이 난다.
그중에 가장 좋아했던 음식은 엄마가 해주는 감자전이었다
가녀린 팔로 강판에 직접 감자를 갈아해 주었던 감자전을 나는 무척 좋아했다
엄마는 내가 9살 때 즘 마지막 감자전을 남겨 놓은 채 내 곁을 떠났다
나는 그 뒤로 감자전을 먹지 않는다
자꾸만 강판에 감자를 힘겹게 갈던 엄마의 앙상한 팔이 생각이 나서이다
힘든 엄마에게 철없이 감자전을 해달라고 했던 어린 시절의 내가 생각이 나서 목구멍이 메어 온다.
내가 꼭꼭 숨겨두는 덮어놓고 덮어 놓고 절대 꺼내 보고 싶지 않은 감정이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다.
그립고 보고 싶지만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던 어린 시절의 내가 미워지는 한없이 무기력한 감정이다.
엄마가 세상을 떠난 후 아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지금의 새엄마와 재혼을 했다
9살의 나는 엄마를 떠나보낸 슬픔을 쏟아 놓기도 전에 새로운 가족에 적응해야 했다
어렸을 때 기억은 대부분 내 기억에 없지만 엄마가 떠난 날의 감자전과
새엄마가 집에 들어오던 날의 모습의 선명하게 남아 있다 그 이후의 기억은 흐릿하기만 하다
그래도 새엄마는 좋은 분이었다
성실한 사람이었고, 나를 살뜰히 챙겨 주는 분이었다.
그런 새엄마에게 고마움을 느끼지만 우리 사이에는 어쩔 수 없는 거리감이 있다
새엄마의 이런저런 보살핌에도 나는 늘 차가웠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어린 시절부터 내 마음속에 꼭꼭 숨겨둔 물음표...
그것이 새엄마와 나의 거리를 좁히지 못하게 만들었다
“생각이 많은 얼굴이네”
식사를 마친 후 차를 내오던 지숙이 내게 말을 걸었다
"앗! 또 그랬나요? 그냥 멍하고 있는 거예요~ 하하"
"지영 씨는 가끔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도 꼭꼭 눌러 삼키듯이 멍해질 때가 있더라
그러다가 채해 삼키기만 하면, 오히려 이야기하면 아무것도 아닌 일도 많이 있어
물론 나도 그러지 못할 때가 많이 있지만"
지숙은 웃으며 나에게 말했다
지숙의 이야기를 듣고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제가 하고 싶은 말들은 너무 어두워요
그 말을 내뱉는 순간 주변의 모든 상황이 어둡게 내려앉을 것 같아서
말을 하지 못하겠어요"
지숙은 나의 말을 듣더니 따듯한 손으로 내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알아... 누구에게 그런 말들이 있어
하지만 너무 오래 묵혀 두었다면 이야기해도 돼
참기만 하면 그 말들이 소화되지 않아서 체해
체하면 자기만 힘들어.
그리고 의외로 말해도 아무렇지 않은 것들도 있어"
나는 지숙에 말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에게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아빠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들이 있었다
특히나 예전부터 궁금했던 새엄마에 대한 일들
하지만 차마 아빠에게 물어볼 수가 없었던 말들
삼키지 않고 물어볼 수 있는 날이 있을까?
입 밖으로 꺼내며 주워 담을 수 없는 그 질문들을 나는 해도 될까?
어린 시절 사진처럼 남아 있던 그림들은 어른이 되어
그림의 의미를 알아가게 되면서 지금은 나만큼 자라난 어두운 그림자가 되었다
아무도 드러내지 않고 입 밖으로 꺼내지도 않지만 나에게는 문득문득 생각나는 어두움이다.
내 등을 쓰다듬던 지숙이 물었다
"보리차 마실래?"
지숙이 나에게 물었다
"네 좋아요"
"날씨가 쌀쌀해질 때는 보리차가 최고야 몸에도 좋고 구수한 향이 기분 좋아!
마시면 소화도 잘 되는 것 같고"
지숙이 따라준 따끈한 보리차를 마시면서 지숙에게 말했다
"항상 고마워요 맛있는 밥 차려줘서.."
"내가 고맙지 같이 먹어줘서... 앞으로도 같이 자주 먹자..
지영 씨 얼굴이 포동해 지는 거 보고 싶다"
지숙의 말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래 어둠이 있으면 어떤가
어둠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
내가 조금 더 힘이 생기면 어떤 말도 들을 준비가 된다면
나에게도 궁금했던 일들을 물어볼 용기가 조금은 생기지 않을까
그때 물어보자 아빠에게 그날의 일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