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차장에서 어느 부부의 대화
오후 4시가 지날 때 나는 아파트 주차장을 지난다. 택시 기사가 먼지떨이로 차에 묻은 먼지를 턴다. 새벽에 몇 방울 하늘에서 물이 떨어진 모양이다. 장을 보고 지나는 여인이 기사한테 말을 건다.
"종현아빠, 오늘 일찍 들어왔네"
여인은 반가움을 듬뿍 담아서 말을 한다. 기사는 여인의 남편인 것 같다.
"뭐 일찍 들어와. 다른 날과 같지"
남편 대답은 찌뿌둥하다. 여인은 멋쩍은지 다른 말을 한다. 몇 마디가 더 오가는 그들의 이야기를 뒤로 하고 나는 내 길을 간다. 순간 내 머릿속에서 한 마디가 떠올랐다.
"어, 오늘 조금 일찍 왔어. 당신이 보고파서"
이렇게 남편이 답하였다면 아내의 얼굴이 어떠했을까 상상한다. 왜 남편은 바보스럽게 답을 했을까?
살갑게 답하였다면 아내는 가슴에 뭉게구름이 피었을 것이다.
결혼해서 60년 넘게 산 부부가 있다.
남편은 누구에게나 '고맙다/고맙습니다'를 달고 산다. 아침에 눈을 뜨면 하늘에 감사 기도를 드린다. 냉수를 한 잔 들고서 또 감사 기도를 한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는 이에게 인사를 하고 그가 조그마한 친절을 베풀면 꼭 '고맙습니다'라고 인사를 한다. 버스에 오를 땐 기사에게 '수고하십니다'하고 인사를 하고 내릴 땐 '고맙습니다'라고 인사를 한다. 남편은 자식들이 어떤 식사를 제공하여도 '고맙다'라고 한다. 한 번도 투정을 부린 적이 없다. 자식이 손에 무엇을 들고 방문하면 왜 가지고 왔냐는 겸양 대신에 '고맙다'라고 살갑게 말한다.
남편은 매사가 긍정이고, 삶을 밝고 즐겁게 살려고 한다. 비록 경제 능력은 떨어지지만 자신의 처지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한다. 거기에 따른 소득에 만족해하며 고맙게 생각한다. 이런 태도는 저세상으로 갈 때까지 변함이 없었다.
아내는 '고맙다/고맙습니다'란 말은 타인에게만 하는 말이다. 남편이나 자식들에게 이런 말을 쉽게 하지 않는다. 남편이나 자식들이 하는 건 당연하다고 여긴다. 늘 불만이다. 아내가 좋아하는 빵을 남편이 사 가지고 귀가한다. '고맙다'란 인사 대신에 왜 사 왔냐고 투박을 준다. 안 먹는 것도 아니다. 급여를 가져다주는 날에 남편은 늘 좌절을 느낀다. 급여가 든 봉투를 아내에게 내밀면 아내는 그 봉투를 팽개친다. 이것밖에 못 버느냐면서 타박이다. 월급쟁이인데 어떻게 더 가지고 올 수 있냐고 남편은 화를 내고 자리를 뜬다. 어쩌다 그러는 게 아니다. 일 년이면 열두 번이다. 남편은 일 년에 열두 번이나 좌절을 하면서도 일터로 나간다.
아내는 자식들이 무엇을 사드려도 '고맙다'는 말 대신에 투정을 부린다. 못 마땅한 게 뭔지 모르는 자식들은 갑갑해하고, 무엇을 해 드리지 않으면 안 한다고 투정을 부리니 자식들은 황망하다. 남편이 몇 년 전에 저세상으로 가셨다. 병석에서 오랜 세월을 보내지 않고 병원 입원 닷새만에 돌아가셨다. 입원하기 전까지 아내는 남편에게 바가지를 긁었다.
이제 홀로 된 아내는 혼자서 쓸쓸히 생활을 한다. 가끔 찾아오는 자식들과 매번 같은 음식점에 간다. 자식들은 다른 음식점에 가려고 하지 않는다. 다른 음식점에 가면 맛이 있다/없다, 짜다/싱겁다, 불친절하다, 등등 투정을 한다. 자식들은 그게 싫다. 어쩌면 아내는 자신에게 주어진 복을 차버린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나는 이 남편과 아내에게서 무엇을 느꼈을까? 나는 남편이 가진 삶의 태도를 존경하고 공감한다. 주어진 처지, 형편은 불평을 한다고 바뀌는 건 없다. 주어진 형편을 개선하려는 노력은 당연히 해야 하지만 그것도 할 수 있는 경우도 있지만 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능력이 안 되는 일은 할 수 없을 것이다. 정해진 급여, 어떻게 더 많은 소득을 가질 수가 있을까? two-job을 해야 가능하지만 그것도 하는 일에서 시간 여유가 있어야 가능하다. 하루 12시간을 일하는 사람에게 two-job은 죽으란 말과 같다.
지혜롭게 사는 삶, 현명하게 사는 삶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하는 저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