딴짓한 시인이 부럽다
나는 시를 읽을 줄 모른다.
절대 음치인 나는 노래를 부를 줄 모른다.
그렇지만 내게 시집을 준 이, 그 고마움에 나는 국어책 읽듯이 그의 노래를 부른다.
시인 김규동은 공업고등학교 출신이다.
건설기계 만드는 회사에서 말단(?)으로 정년퇴직할 때까지 쭉 <딴짓>하며 살았다.
그가 <딴짓>한다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소홀히 하였다는 뜻은 아니다.
먹고사는 일에 소홀하진 않았으나 그 일은 그의 직업이 아니다.
그의 직업은 <딴짓>이었다. 그 딴짓을 하고 싶었고, 딴짓으로 삶을 견뎠을 것이다.
한 회사에서 42년을 큰 풍파 없이 지낸 힘은 딴짓을 했기 때문이 아닐까?
밥값하던
기술과
쌓은 역량 놔두고
딴짓하며
후반전
해답 찾는 재미로
시작해
가위바위보
덜컹거림 적당한
(시 '딴짓' 전문, 김규동)
시집 딴짓은 4부로 짜였다.
제1부 밥값,
우리가 사는 세상, 일상에서 우리 이중성을 꼬집었다. 시인은 세게 꼬집을 줄 모른다. 아니 꼬집는 척만 한다.
제2부 맷돌,
어린 시절 고향에서 지내온 이야기와 고생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나지막이 노래했다.
또 아내와 함께 자녀를 키웠던 시절을 회상하였다.
제3부 딴짓,
시인은 고교 3학년 때 실습 나간 회사에서 60세 정년퇴직할 때까지 자기 이야기를 덤덤하게 들려준다.
제4부 평창,
어린 시절 추억을 그렸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때는 평창읍에서 살았다.
태어나 유아기를 보낸 곳은 평창읍에서 가까운 영월군 북면 공기리다.
옥시기
송곳 타서
나달 떠 맷돌질
가매에
저어 끼리다
틀에 담고 꾹 눌러
보생이
탈탈 뿌리면
꺼주해도 한끼 뚝
(시 '올창묵 02' /제4부 평창, 전문)
나는 영월군 북면 마차리가 고향이다.
마차리는 광업소가 있어서 토박이보다 외지인이 훨씬 많았다.
마차리는 일제강점기 때 광업소 때문에 만든 마을이지만 공기리는 고지도에도 이름이 나온다.
공손할 공(恭), 터 기(基)를 쓴다.
공기리는 따뜻한 사람들이 서로를 공경하며 손바닥만 한 논에 의지해 사는 곳이다.
내가 시인 김규동을 처음 만난 것은 고 2 때 해운대감리교회에서다.
졸업 후 몇 년을 소식 없이 지냈다.
스물여덟 쯤 내가 옮겨간 회사에서 다시 시인 김규동을 만났다.
같은 회사에 다녔지만 시인은 딴짓을 하면서 계속 다녔고 나는 퇴직하였다.
그 뒤로 시인과 가끔 만났다. 소식도 주고받았다.
친구 같은 나이지만 언제나 나를 형님이라 부르니 내가 부끄럽다.
몇 년 전에 그의 시집 <꼴갑>을 읽고 마음으로 웃었다.
재미난 시를 쓴다고 생각하였다. 김규동 시들은 나를 미소 짓게 한다.
그의 시는 그의 성격과도 같다.
화내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를 만나면 언제나 밝은 미소로 반긴다.
'니맛도내맛'도 없는 올창묵처럼 시인 김규동은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