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의 의미
미분은 그림을 정교하게 그리게 해주는 기법이라면 미분을 통해서 완성된 전체의 그림이 있을 것이다. 미분이 나무라면 그 미분으로 완성된 전체의 그림이 있는 것이다. 이것을 적분이라고 한다. 전체를 본다는 것은 부분 이상으로 중요하다. 만약 우리가 그림을 볼 때 그림이 그려진 모습의 부분에만 집중한다면 그림이 갖는 본질적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림 전체를 보고 그림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이해할 때 그림의 각 부분들이 갖는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수한 존재들이 뒤섞인 세계의 전체는 과연 어떤 모습이며 어떤 의미를 가질까? 라이프니츠는 실제로 이 질문에 대답하고자 했다. 그는 뉴턴과 같은 시기의 사람으로 라이프니츠가 이 질문을 했을 당시에는 세상에 미적분이 알려져 있지 않았다. 뉴턴은 끊임없이 변하는 세상을 정밀하게 이해하는 데에서 시작했다. 그러나 라이프니츠는 위대한 질서 아래에 움직이는 세계를 그리고자 하는 신학적 과제에서 출발했다. 뉴턴도 신학적 사명을 안고 작업을 시작한 것은 동일하나 라이프니츠의 경우가 신학에 관해서는 더 조예가 깊고 야심 찼다.
그는 신이 세상에 부여한 질서, 세상의 의미를 알고 싶어 했다. 그래서 세상을 구성해 줄 작은 구성요소를 준비했다. 악과 고통조차도 세상의 선을 더 위대하게 만들기 위한 신의 의도라는 그의 변신론처럼 세상의 모든 요소들은 신이 부여한 질서를 더 정교하게 만들어 줄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세상을 이루는 가장 작은 구성요소들을 모나드(monad)라고 불렀다.
그러나 여기서 모나드는 단순히 물질적인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관심을 가졌던 것은 세상이 물질적으로 어떻게 구성되었느냐가 아닌 세상의 복잡한 움직임들이 더 위대한 질서로 통합되느냐였기 때문이다. 때문에 모나드는 물질적 요소보다는 세상의 질서나 영혼에 더 가까운 형이상학적 개념이었다. 라이프니츠는 각각의 모나드는 일종의 의지나 욕망을 갖고 있고, 이것이 세상이 움직이는 이유라고 보았다.
이제 이 모나드를 이용해서 라이프니츠가 보여야 할 것은 명확했다. 바로 이 요소이 가진 각각의 고유한 인식과 의지가, 그리고 이들에서 비롯된 움직임이 거대한 틀 안에서 조화로운 질서를 이루어낸다는 것을 보이는 것이었다. 데카르트가 그랬던 것처럼 라이프니츠 또한 그의 생각이 논쟁의 여지없이 자명한 것으로 밝혀지길 원했다. 그래서 데카르트와 마찬가지로 증명을 통해 반론의 싹을 자르고 모두를 설득할 수 있는 수학의 힘을 빌리고자 했다.
세상을 이루는 가장 작은 요소인 모나드는 앞서 미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미소하게 나눈 요소인 미분소라고 볼 수 있다. 이런 미분소들의 구체적인 관계와 규칙에 집중한 뉴턴과 달리 라이프니츠는 이 미분소들이 모여 이루는 전체를 생각하는 것에서 시작했다. 그리고 실제로 이 미분소들을 합쳐 이 미분소들이 모인 결과를 계산하는 기술을 고안해 냈다. 이처럼 부분들이 쌓여서 전체를 얻어내는 기술을 부분들의 누적이라는 의미에서 적분이라고 한다.
적분은 결과, 나아가서 의미에 관한 것이다. 뉴턴이 계산한 행성의 운동에서 다시 생각해보단면, 미분은 과정이며 매 순간의 속도다. 적분은 그 결과, 행성이 그리는 궤도다. 과정만 본다면 행성의 움직임은 태양에게 매 순간 끌어당겨진 결과다. 행성은 수동적인 존재인 것이다. 하지만 적분, 그 궤도를 두고 보면 행성은 태양에 영향을 받을지언정 빨려 들어가지는 않는다. 매 순간 행성의 움직임은 태양으로부터 벗어난다. 궤도는 행성이 태양에서 벗어나려는 능동적 움직임의 결과다. 수동적이었던 미분 속 행성과는 달리 적분 속에서의 행성은 목적이 있으며, 그렇기에 능동적인 존재로 이해될 수 있다.
그렇다면 세계의 목적을 알아내고자 한 라이프니츠의 시도는 성공적이었는가? 그의 신학적 작업만 본다면 그렇다고만 하기엔 어려울 것이다. 악이 선을 더 온전히 완성하기 위한 신의 장치라는 그의 의견은 너무나 낙관적이고 무책임하게 들린다. 그의 책은 고전이 되었지만 그것이 그의 의견이 세상에 받아들여졌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적어도 그가 수학까지 동원하여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설득하고자 했던 목표에 비하면 말이다.
하지만 세상의 개별 요소들을 더 큰 의미 속에서 이해하고자 했던 그의 열망은 어쩌면 그가 고안한 적분에 의해 실현되었을지도 모른다. 그 결과를 우리 주변에서 당장 찾기는 쉽지 않지만 말이다. 물리학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뉴턴의 법칙처럼 미분을 이용한 법칙은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지만 적분을 이용한 법칙은 사실상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적분이 미분보다 훨씬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알려진 미분을 이용한 법칙을 다시 훨씬 어려운 적분의 형태로 써 내려가는 데에 는 그 이유가 있다. 바로 적분을 이용할 때 과정을 넘어 그 의미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미분에서 나타나는 작은 변화와 규칙들이 전체라는 틀 안에서 어떻게 통합되는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적분을 이용할 때 비로소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세계를 거대한 질서 아래서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 라이프니츠의 시도는 이 점에서 성공적이었다. 적분은 우리가 단순히 어떤 현상을 이해하는 것을 넘어 그 현성에 의미와 목적을 부여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라이프니츠의 적분으로 세상을 볼 때 세상은 마치 의미를 갖고 행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적분을 이용하면 세상을 어딘가 종교적이고 신학적으로 본다는 느낌을 받는다. 악조차 선이라는 목적에서 존재한다는 그의 주장처럼 말이다. 적분을 고안한 그의 배경을 생각하면 이것은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적분의 이러한 성질은 아마 이후에 논의할 에너지나 최소작용의 원리에서 더 논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