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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마도 아티스트 Sep 05. 2023

피아노 치는 게 시시포스 같다고?   

오랜만에 치면 '도로아미타불'이 되는 현실에 관하여 

요즘 진득하게 앉아서 피아노를 친 날이 별로 없다. 업무가 늘어 바빠졌고 시간이 나는 날에는 기력 보충한다고 누워서 밀린 TV를 보거나 낮잠을 잤다. 가끔 피아노 앞에 앉았지만, 본격적인 연습을 한 날은 거의 없다. 그러다가 오늘 쇼팽 발라드 1번을 정말 오랜만에 쳐보았다. 앞부분을 좀 치다가 진짜 참담해져서 피아노 뚜껑을 닫았다. 


예전에도 만족할 수준은 절대 아니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정말 절망적으로 손이 안 돌아가고 계속 틀렸다. 도대체 뭐냐고! 피아노는 도대체 왜 이러냐고! 조금만 쉬어도 손이 굳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다시 한번 두 눈으로, 두 귀로 확인하니, 뭔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라드 1번만 그런 게 아니다. 전에 어느 정도 쳤던 곡인데, 시간이 흘러 다시 쳐 보면 마치 처음 치는 곡처럼 도저히 들어줄 수가 없다. 그러면 다시 연습을 시작해서 낑낑거리며 어느 정도 회복한다. 그러다가 또 바빠지면 연습을 자주 못하고 지낸다. 그러다가 아, 이럼 안되지, 하고 다시 피아노 앞에 앉는다. 어김없이 손가락은 굳어있고 악보도 제대로 못 볼 정도로 출발점으로 도로 가 있다. 


이거야 원, 시시포스 같잖아! 시시포스는 커다란 바위를 산꼭대기로 밀어 올려야 하는 사람이다. 그가 커다란 바위를 힘들여 산꼭대기에 올려놓으면 다시 굴러 떨어져서 처음부터 다시 밀어 올려야 한다. 내가 한 곡을 열심히 쳐서 어느 정도 '완성'해 놓았다가도, 그 알량한 실력은 산비탈을 굴러 떨어지는 바위처럼 금방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간다. 다시 밀어 올려놓으면 또 떨어진다. 끊임없이 '도로아미타불'이다. 

그래, 나는 시시포스야! 흑흑. 그러다가 내가 너무 장대한 비유를 사용해 과장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연습을 꾸준히 안 했을 뿐인데.  가만, 시시포스의 신화가 정확히 어떤 얘기였지?

시시포스는 그리스 신화 속에서 신의 노여움을 사서 영원히 바위를 산꼭대기에 밀어 올려놓는 일을 반복해야 하는 형벌을 받은 코린토스의 왕이다. 시시포스의 신화를 찾아보다 보니 카뮈의 실존주의 철학 에세이 '시지프의 신화' 얘기가 나온다. 카뮈는 끊임없이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오늘날 노동자의 삶이 시시포스가 처한 상황처럼 부조리하다고 봤다. 그럼 부조리 속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카뮈는 부조리를 외면하지 않고 정면으로 응시하며 버텨나가는 것을 의미 있는 '반항'이라고 보았다. 이게 바로 끊임없이 바위를 밀어 올리는 시지프가 하고 있는 일이다. 그는 이 에세이의 마지막 문장을 이렇게 썼다. 


"산꼭대기를 향한 투쟁만으로도 인간의 마음을 채우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시지프가 행복하다고 상상하여야 한다." 

(*참고: 엄소연,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한 시지프, 인문 360 https://inmun360.culture.go.kr/content/358.do?mode=view&cid=101978)


사실 그동안 가끔 피아노 앞에 앉을 때도 어려운 곡은 피하고 딸이 요즘 배우고 있는 뉴에이지 곡을 주로 쳤었다. 그런데 내가 정말 멋지게 치고 싶은 건 결국 쇼팽 발라드 1번이나 스케르초 2번 같은 곡이었다! 하지만 연습을 한동안 많이 못했으니 손가락이 굳는 건 당연하고, 이런 곡들은 잘 안 됐을 테고, 그러면 다시 연습을 해야 하는데 그건 엄두가 안 나고, 그래서 회피해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시시포스, 어쩌고 할 게 아니라 최소한 지금보다는 더 많이, 더 자주 연습하는 게 답이다. 한 번 '완곡'을 했던 곡들도 오래 안 치다가 다시 쳐보려 하면 어려운 게 당연하다. 하지만 실력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고 꾸준히 연습했다면 지금의 나처럼 오랜만에 친다고 완전 '도로아미타불'이 될 리가 없다. 기본기가 탄탄한 사람이라면 조금 생소하더라도 연습 좀 하면 금방 예전의 감각을 되찾는 게 정상이다. 난 기본기가 부족한 거다. 

얼마 전 한 피아니스트를 만났을 때 내가 취미로 피아노를 친다는 얘기를 했다. 그랬더니 바쁜 와중에 어떻게 연습 시간을 내느냐고, 대단하다고 했다. 매일 한두 시간은 쳐야 할 텐데. 그는 이렇게 얘기했다. 그의 말을 들으며 약간 찔끔했다. 2020년 동호회원들끼리 하는 연주회 준비하던 몇 달간만 그렇게 연습했고, 이후엔 아주 휴지기가 긴 '간헐적' 연습만 하고 있었으니까. 매알 한두 시간은 힘들더라도 매일 20분씩 시간을 냈다는 '다시 피아노'의 저자 알란 러스브리지처럼 꾸준히 해야지, 이렇게 생각했는데, 생각만 하고 말았다.
 
하루 연습하지 않으면 내가 알고, 이틀 연습하지 않으면 상대가 알고, 사흘 연습하지 않으면 청중이 안다는 말, 누가 했더라? 찾아보니 레너드 번스타인이 한 말이었다. 평생 음악을 주업 삼은 프로 음악가, 거장도 이러는데, 아마추어가 몇 달 동안 연습 제대로 안 하고 뭘 기대해.  

피아노를 치는 건 내가 좋아서 하는 것이지, 누가 시켜서 억지로 하는 일이 아니다. 피아노를 치는 건 끊임없이 반복되는 일상과는 다르다. 나에게 피아노를 치는 일은 오히려 끊임없이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는 것에 가깝다. 연습 안 해서 피아노 실력이 퇴보하는 당연한 현실을 자꾸 무슨 형벌인 양 시시포스에 비유하는 건 그만두자. 맥락이 다른 얘긴데 뭔가 근사한 비유 혹은 핑계로 사용해 온 것 같다. 다만 카뮈의 '시지프의 신화' 마지막 문장은 마음에 들어서 내 식으로 바꿔 보았다.  


"좋아하는 곡을 잘 치려는 투쟁만으로도 아마추어의 마음을 채우기에 충분하다. 연습하는 내가 행복하다고 상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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