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발가벗고 다녀도 안전한 집 - part 2
흩어진 기능을 모으는 것도 계획이다
갤러리는 초기 계획에서는 내부 창고였다.
살림집에는 여러 가지 수납이 많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침실에서는 옷을 수납할 드레스룸이 필요하고, 주방에서는 살림살이와 식자재를 보관할 팬트리 곳이 수납공간이다. 우주의 의뢰인 부부는 수집품도 꽤 있었다. 여행지마다 사 온 그릇이나 컵, 그림 등등이 모이면 한 자리를 차지했다. 비싼 것은 아니였지만 추억이 깃든 것들이라 소홀이 다룰 수 없었다.
수납과 수집은 빈 벽이 필요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림은 비어있는 벽에 걸어야 하고 수납장도 창문이 없는 막힌 벽에 앞에 세운다. 빈 벽이 많은 사람은 부자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림이 없어서 못 거는 것이 아니라 비어있는 벽이 없어서 그림을 못 거는 것이 태반일 것이다.
수납과 빈 벽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지만, 각각에게 따로 할당할 공간은 없었다. 그래서 모든 수납을 한 번에 넣을 공간을 Private zone과 public zone 사이의 교집합에 ‘내부수납 조닝’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안방 쪽에는 드레스룸, 주방 쪽에는 팬트리용을 만들어 분리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수납의 양이 유동적이고 이왕이면 수집품을 걸 수도 있게 생각하다 보니 통합된 공간이 훨씬 쓸모가 생겼다. 그리고 양쪽에서 모두 접근이 가능하도록 동선을 연결하니 안방에서 주방 뒤쪽으로 갈 수 있는 통과 동선이 생긴 것이다.
단점을 장점으로 탈바꿈
폭이 2.4m 길이 4m의 방으로 쓰기 모호한 공간은 ‘갤러리’로 이름 붙였다. 그곳은 흔히 말하는 ‘먹방’이다. 쉽게 말하자면 공간구조 상 외벽 창이 생길 수가 없었다. 대신 천창을 만들어 빛이 통하게 하고 다락과 연결되는 벽에는 실내 창을 만들었다. 천창은 일반 창보다 두세 배나 비싸다. 게다가 시공을 잘못하면 누수의 위험도 있다. 이런 리스크를 감수하면 까지 천창을 만들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천장으로 창을 내니 공간이 확 살아났다. 먹방에서는 보이지 않던 공간의 아우라가 생겼다.
단점이 장점으로 바꿔 갤러리라는 이름으로 재탄생된 것이다.
갤러리에는 온갖 물건이 상당히 체계적으로 자리 잡아있다. 안방 쪽으로부터 세탁기, 건조기가 중간에는 그릇수집품을 모아놓은 찬장이 주방 쪽에는 냉장고 냉동고가 있다. 깊이가 70-80㎝는 필요한 덩치 큰 수납들이 키를 맞춰 자리 잡았다. 반대쪽은 얕은 수납장과 그림, 사진 등으로 감상과 작은 수집품 위주이다. 남에게 보여주려고 만든 곳이 아니라 정말 자유롭게 부부에게 꼭 필요한 것들은 모아두고 걸어 두고 지나가면서 챙기는 곳인데 누구에게나 자랑해도 괜찮은 공간이 되었다. 집안에 발가벗고 다녀도 눈에 안 보이는 순환 동선의 역할을 물론이고.
(이미지: 갤러리 이미지들)
문은 벽의 일종
사춘기가 되면 자녀들이 자기 방으로 들어가 문을 쾅 닫아 버린다.
문을 닫았을 뿐인데, 마음의 벽이 생기는 느낌이다. 문은 벽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우주에서도 private zone과 public zone을 구분할 때는 벽 속에 숨기는 문으로 닫았을 때 완전한 분리를 암시했다. 반면 한 공간 안에서 의미적인 분리가 필요한 곳은 장지문으로 구분했다. 부부의 공간 중 서재와 안방 사이의 장지문은 서재가 안방과 연결될 때는 작은 거실이라는 의미로 서재 쪽으로 간살이 보이게 한 것이다.
우주의 순환 동선은 이렇게 슬라이딩도어와 결합하여 입체적으로 공간으로 만들어졌다.
유일하게 여닫이문이 생긴 안방 화장실도 공간이 허락했으면 슬라이딩으로 했을 것이다. 슬라이딩도어는 문을 밀어서 벽 안에 수납을 해야 하기 때문에 문의 길이만큼 벽의 공간이 더 필요하다. 여닫이문은 공간이 좁아도 설치할 수 있고, 방음도 잘된다. 우주 건축주는 화장실에 문이 필요 없으니 아예 떼어 달라고 했지만 아무리 생각 봐도 나의 상식으로는 안방 화장실에는 문이 있어야 했기에 의뢰인을 설득해서 일단 문을 달아 뒀다. ‘저희는 문을 떼고 살 거예요’라고 했지만 완성되고 1년이 지난 뒤인 현재까지는 화장실에 문이 달려있다. 제주도 이효리네 집에는 화장실에 문이 없던데, 이효리-이상순 닮은 보헤미안 건축주는 취향도 참 비슷했다.
마지막으로 2층 테라스도 내적 자유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테라스는 2층 다락에서만 접근할 수 있는 지붕 안에 숨겨진 공간이라 동네 주민의 눈에 띄지 않게 외부 공간을 즐길 수 있다.
여기서 일광욕이나 야외 요가를 하면서 주변의 시선에 상관없이 안정과 자유를 주고 싶었다. 내가 난 서른을 넘기고 늦은 나이에 공부를 하겠다고 네덜란드를 갔을 때 받은 문화충격의 하나는 백인들의 유난한 햇볕 사랑이었다. 백인들은 햇빛만 나면 일광욕을 한다. 테라스에서 비키니를 입고 일광욕하는 건 일상이고 완전히 벗고 하는 것도 낯설지 않다. 평생을 한국에서 살고 처음으로 외국에 장기간 거주했던 나는, 햇볕 비치는 날 공공장소에서 빤쓰 까지 벗고 드러누워 있는 백인의 신체를 보고 깜짝 놀랐다. 허연 몸뚱이라 광합성이 필요한 백인에겐 그게 필수라는 것을 알긴 했지만, 그래도 웬만하면 집에서 하지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아마 그들의 집에는 햇볕이 잘 비치는 남향 테라스가 없었을 것이다. 집에서 빨가벗고 다니고 싶다는 우주 집주인의 소망을 생각하니 자유로운 영혼의 네델란드인이 생각나 딱 벌거벗고 비타민 D를 합성하기 좋은 테라스를 만들었다. 설계자로서 시뮬레이션은 필수니, 빨가벗고 테라스에서 요가를 하거나 일광욕하는 모습을 그려봤다. 내 취향은 아니지만 내 마음이 다 해방되는 느낌이었다. 설계도면과 함께 보여주는 삼차원 렌더링 이미지에도, 다락에는 요가를 하는 사람이 있고, 테라스에는 개운하게 기지개 켜는 사람을 테라스에 넣었다. 공간의 용도와 분위기를 구체적으로 그려보는 것도 건축가의 의무다.
(이미지 : 지붕 속 테라스 항공사진, 다락에서 본 테라스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