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금주씨의 백일금주
사진 -닥터 루젠 리슬링 : 오징어볶음에 어울리는 와인
질 좋은 오징어 두 마리와 텃밭에서 딴 부추를 얻었다. “작아도 맛있는 오징어, 여기에 계란 하나 넣어 부침가루로 부추전을 하면 최고”라는 말까지 들으니 벌써 입안에 침이 고였다. 마침 집에 부침가루가 떨어져 돌아오는 길에 마트에 들렀다. 오징어 한 마리는 전으로, 나머지 한 마리는 오삼불고기로 쓰려고 고기도 사고, 요리할 때 빠질 수 없는 무알콜 맥주도 챙겼다. 감이 진열된 걸 보니 가을이 성큼 다가왔음을 실감했다. 우유와 과자까지 바구니에 담다 보니, 계획보다 장바구니가 무거워졌다.
집에 와 저녁을 준비하려는데, 정작 사야 했던 부침가루가 보이지 않는다. 분명 바구니에 넣었는데? 영수증을 뒤져 보니 비밀이 풀렸다. 계산할 때 바구니가 두 개라 한쪽만 결제한 것이다. 계산원은 나머지를 뒷사람 물건이라 착각했고, 나는 정신없이 첫 바구니 물건만 챙겨온 것. 결과적으로 부침가루, 우유, 과자는 모두 두고 왔다.
계획했던 부추전은 물거품이 되었지만, 메뉴를 오삼불고기로 바꾸니 오히려 더 간단하고 푸짐했다. 과자야 없어도 되고, 우유는 아직 며칠은 버틸 양이 남았다. 살면서 꼭 더해야만 할 것들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걸, 마트에서 바구니를 빼놓고 와서야 다시 깨닫는다.
결국 남은 것은 오징어, 앞다리살, 그리고 무알콜 맥주. 그걸로 충분히 맛있고, 오히려 가벼운 저녁을 즐길 수 있었다. 덜어낸 만큼 공정도 줄고, 욕심도 줄고,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더이상 넣고 뺄것도 없는 '적정저녁'이다.
집을 짓는 과정도 실로 그러하다. 많은 건축주들은 집을 짓는 것이 꿈을 현실에서 구현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해보면 안다. 꿈꾸던 집을 하나하나 마음 속에서 부숴버리는 가슴 아픈 과정이 꽤 담기게 된다는 것을. 집을 짓는 일은 정확히 말하면 수많은 꿈들 중에 정말 내가 원하는 걸 골라내고 나머지 꿈들과는 잘 이별하는 과정이다.
경제적인 집이란 내가 바라는 모든 것이 담긴 집이 아니라 내가 바라던 수많은 것들 중에 버리고 버리다가 끝까지 남은, 정말 이것만은 양보할 수 없다고 소리칠 수 있는 바로 그걸 잘 찾아내고 담아낸 집이다. 그렇게 남긴 그것들이 내가 정말 꿈꾸던 것이었다는 걸 집을 짓다 보면 또는 짓고 나면 뒤늦게 알게 된다. 아 나는 이런 걸 원하는 사람이었구나.
경제적인 집이란 아름다운 선택들이 잘 버무려진 집이다. 아름다운 선택이란 수많은 포기와 고통스러운 양보들이 만들어내는 최종 결과물이다. 경제적인 집이란 싸게 잘 지은 집이 아니라 잘 포기한 집이다. 좋은 건축가는 그 과정을 도와주고 기다려주고 다독이는 사람이다. 그러다가도 가끔 버려진 꿈들의 조각더미를 찾아가 그 중에 살려내볼 게 없나 주섬주섬 살펴보는 사람이다. 당신의 꿈을 모두 이뤄드리겠다는 건축가보다 당신의 꿈들을 아프지 않게 잘 버려드리겠다는 건축가가 더 훌륭한 건축가다.
이 책은 한 건축가와 건축주 가족이 집을 지을 때 마주하게 되는 수많은 고민들을 담았다. 이 책의 장점은 이렇게 솔직하게 말해도 되나 싶을만큼 모든 것을 노골적으로 공개한 책이라는 것. 그래서 좋은 집과 좋은 건축가를 선택하는 기준을 단번에 알게 된다. 단점도 있다. 몇억원을 지불해야 알게 되는 지식을 몇만원짜리 책에 이렇게 다 담아버리는 게 집을 먼저 지어 본 사람으로서 솔직히 좀 마뜩잖다는 것. 아, 그리고 읽다보면 갑자기 집 짓고 싶어진다. 좀 위험한 책이다.
-이진우기자 <우주를 짓다>의 추천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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