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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통의 위치가 말해주는 것들

건축가의 공간읽기

by 윤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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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드라마를 보다 보면 종종 낯선 장면이 나온다. 감기 기운이 있는 인물이 욕실로 가 세면대 아래 수납장을 열고 약을 꺼내 물과 함께 삼킨다. 미국 사람들에게 약은 욕실의 물건이다. 세면도구 옆, 위생용품과 함께 정리된다. 반면 한국의 집을 떠올려 보면 풍경이 다르다. 약은 대개 식탁 옆 서랍이나 주방 수납장에 놓여 있다. 밥 먹고 약 먹으라는 말처럼, 약은 식사와 같은 생활 리듬 속에 들어와 있다.


나는 이 차이가 단순한 생활 습관이 아니라 공간 인식의 차이에서 온다고 생각한다. 서양에서 약을 욕실에 두는 이유 중 하나는 욕실이 ‘건식’ 공간이라는 점, 그리고 수돗물을 그대로 마실 수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욕실은 씻는 곳이자 몸을 관리하는 곳이고, 그 연장선에서 약을 먹는 행위도 자연스럽다. 욕실에서 물을 마시고, 이를 닦고, 약을 먹는 것이 하나의 연속된 건강 관리 행위인 셈이다.



반대로 한국에서 욕실은 여전히 ‘화장실’에 가깝다. 용변과 세정의 기능이 강하게 각인된 공간이다. 그곳은 위생을 관리하는 장소이지, 음식이나 약을 입에 넣는 행위가 일어나는 공간은 아니다. 그래서 약은 자연스럽게 주방이나 식탁 근처로 이동한다. 약을 먹는다는 행위는 씻는 행위보다 ‘먹는 행위’에 더 가깝게 인식되기 때문이다.


이 차이는 공공공간에서도 드러난다. 공중화장실에서 양치를 하는 사람을 보면, 왠지 한국 사람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에서는 이를 닦는 행위가 식사 직후의 일상적 습관이고, 화장실 세면대는 그 연장선에 있다. 서양에서는 양치 역시 비교적 사적인 욕실의 행위로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결국 약의 위치는 위생의 기준이나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각 사회가 공간을 어떻게 정의해왔는지, 어떤 행위를 어디에 배치해왔는지의 결과다. 같은 약 한 알이라도, 어떤 문화에서는 욕실의 서랍에, 어떤 문화에서는 식탁 옆에 놓인다. 집 안의 사소한 풍경 하나에도, 우리가 살아온 방식과 공간에 대한 생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KakaoTalk_20220706_162950933_10.jpg?type=w1 식탁 안쪽의
KakaoTalk_20220706_162950933_21.jpg?type=w1 약테이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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