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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글까지 쓸 용기 있어?

글쓰기에 임하는 마음가짐

by 백수광부

굳이 버리고 싶었다. 이사할 때마다 따라다닌 그의 책이었다. 한 번 들춰보지도 않고 미뤄 짐작했다. 도시 생활에 지친 사람이 산골로 들어가 자연식으로 건강해졌다는 이야기라 생각했다.

스산한 느낌의 누런 나뭇잎 표지와 책 제목은 내겐 비호감이었다. 삼겹살에 술을 곁들인 날이면 유독 눈엣가시였다. 나를 옥죄어 왔다. 책장이 답답해 보이던 어느 날, 그 책을 과감하게 버렸다.

한 달 후, 내 나라에 지진이 났다. 하늘과 땅이 흔들렸기에 내 뱃살도 미세하게 떨렸다. 오금도 저렸다. 다소 견디기 힘들었다.


한강,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가 '한강'인지, 책 제목이 '한강'인지, 내가 코 박아야 할 곳이 '한강'인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이러고도 소설 쓴다고 나댔으니 한심과 한숨이 한강 물이 되어 마음에 차올랐다.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고 박수받을 때, 나는 무식용감상을 받고 내 입을 틀어막았다. 사람들이 그녀에게 손뼉 칠 때, 나도 내게 손뼉 쳐줬다.

'힘내! 무식해서 그래. 괜찮아.'

한강 작가의 책을 구하지 못해 난리 북새통인 단톡방 대화를 보며 8차선 대로에 홀로 서 있는 기분이었다.

노벨문학상 받은 한강 작가.

'무식해서 용감했으니 유식해져 돌아와야지.'

마늘과 쑥으로 버티는 삶을 살며 새로운 인간이 되어야 했다.
인간 개조를 목표로 독서 모임을 신청했다. 1년 치 읽을 도서 목록에서 난 운명과 재회한다. 책꽂이에 꽂혀 있어야 했던 누런색이 아닌 황금색 그 책.


채식주의자

독서 모임에 가기 전에 작가의 다른 소설부터 읽기 시작했다. '흰', '작별하지 않는다.', '소년이 온다.' 순서였다. 누군가 권해 준 '순한맛'에서 '매운맛' 순서였다. 슬픔과 우울이 엄습했지만, 울림이 있었기에 ‘역시.’라는 말을 남발하며 완독했다. 묵직한 슬픔을 다루는 작가의 삶은 얼마나 고단할지, 작가의 소명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깨닫게 되었다.

'채식주의자'는 읽기를 망설였다. 기괴하고 파격적이며 읽고도 찝찝하다는 소문에 겁을 먹고 있었다.

잡식주의자인 내가 견딜 수 있을까?’
고기에 대한 강렬한 욕망을 참아낼 수 있을까?’


두려움을 안고 책을 펼쳤고 미친 듯이 빨려 들어갔다. 그러다 덮었다. 무서웠다. 이틀이 지났다. 다시 펼칠 수밖에 없었다. 완독 후 한동안 멍했다. 희뿌연 무언가가 머릿속을 맴맴 돌았다. 마음은 뒤엉켜버렸다. 끝내 생각 정돈에 실패했다. 찜찜한 마음으로 독서 모임에 나갔다.

초반 대화에서는 주인공 영혜와 형부의 비윤리적 행위 자체에 충격받았다는 얘기가 주를 이뤘다. 어떤 이유로도 이해할 수 없다는 의견이 많았다. 이후 등장인물 개개인의 과거 상처와 현재 상황, 심리를 파악하기 위한 대화가 오갔다. 그럼에도 영혜 언니 인혜가 제일 상처를 받은 사람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어 보였다.

몸도 마음도 말라가는 만신창이 동생이 걱정되어 찾아간 곳에서 마주한 장면은 너무 가혹했다. 그 정신적 충격과 분노를 어찌 감당할 수 있었겠는가? 그럼에도 동생 영혜를 외면하지 못해 보살펴야 했던 인혜의 '입 밖으로 내지 못한 절규'가 어느 정도였을지 가늠하기도 힘들 정도였다.


영혜는 왜 그랬을까요?”
진행자의 발언에 그날따라 침울해 계시던 한 분이 말을 시작했다.

“저는 사실 이해가 안 돼요. 부모한테 맞았다고, 우울증에 걸렸다고 저런 행동을 한다고요? 저희 아버지는 지금 중환자실에 계세요. 정신없고 괴롭지만, 자꾸 빠지는 게 죄송해서 나왔어요. 저 정도 고통은 스스로 통제하고 다스려야 하는 게 아닐까요?”
현실의 막막함 속에서 타인의 삶을 바라볼 여유는 없는 상태 같았다. 골이 상당히 난 상태였다.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영혜의 병에 대한 그녀의 시선은 옳았을까?

몇 달 전이었다면 나도 그냥 입 다물고 있었을 것이다. 그 말도 맞는 말인 것 같으니 말이다. 하지만, 우울증이 우울감과는 차원이 다른 위험한 병임을 글로 배웠기에 마냥 그녀의 말에 동의할 수만은 없었다. 나도 글을 계기로 우울증 환자에 대한 이해의 폭이 달라졌기에 그냥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몇 마디 덧붙여 말할 수 있었다.

영혜의 행동은 무기력에서 깨어난 일종의 카타르시스였을 수 있음을 놓치면 안 된다고 말이다.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다면 누가 감히 그녀를 욕할 수 있을까? 윤리, 도덕을 내려놓고 한 인간으로 그녀를 애처롭게 바라보게 되었다.



어떤 글까지 쓸 용기가 있을까?

깊은 상처는 언제나 과거 완료형에만 머물지 않는다. 건드리는 순간 현재 진행형으로 돌변한다. 아물지 않은 부분에서 피가 다시 난다. 함부로 건드리지 않아야 한다.


고통을 토해내며 글을 쓰는 사람이 있다. 불행을 파는 게 아니다. 용기를 주기 위해 이를 악물고 용기를 내는 자들이다. 수시로 터지는 눈물샘을 틀어막고 신음하며 써 내려가는 글이다. 한풀 꺾인 과거의 고통은 그래도 제법 절제할 수 있다. 그 언어는 제법 정갈하다.


미처 날뛰는 현재의 고통을 기록하는 이도 있다. 불행을 전시하는 게 아니다. 때론 글이 정처 없이 헤맨다. 숨이 고르지 않으니, 글이 고르지 않다. 기댈 곳이 글밖에 없는 사람이다. 숨 쉴 곳이 이곳밖에 없는 사람이다. 고통도 숨 쉴 수 있는 곳이라 생각하기에 여기에 내려놓는 한숨이다.


‘나는 불행하다. 내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보여줄까?’동정받길 원하는 게 아니라, ‘나를 살게 하라. 마음껏 죽지도 못하는 나는 내일 눈 뜰 힘이 필요하다.’라는 외침이다. 그 외침은 돌고 돌아 어딘가에 닿는다. 처절한 문장은 누군가에겐 살아있는 정보가 되고 비빌 언덕이 된다. 눈치 볼 필요 없는 눈물이 되고 연대가 된다. 붙잡고 일어날 든든한 나무가 된다.

내가 지금 펜을 잡은 건 다행이다. 미친 듯이 흔들리던 롤러코스터에서 내린 후, 글을 쓰고 있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겁도 많고 힘도 없는 나는 부단히 고민한다. 글에 에지를 세우기 위해, 칼에 날을 세우진 말자. 적어도 내 글은 누군가를 베기 위한 글이 아니길 바란다. '차가운 칼'이 아닌 ‘칼의 노래’로 향해야 함을 다짐한다.


감정에 치우친 글로 읽히지 않길 바란다. 부족한 내가 수십 번을 곱씹고, 쓰고 지우고 반복하며 갈아낸 글이다. 미처 보지 못한 세상을 함께 배우며 이해해 보자고 쓰는 글이다. 나의 글이 지구를 구하는 정도의 대의가 아니라면, 그의 글이 살고자 하는 몸부림이어도 된다. 그걸 인정하면 된다.

차가운 바닥에서 가슴을 치며 애처롭게 우는 칼을 달래 본다. 누군지 모를 어떤 이에게 감히 위로랍시고 써 본다.


칼이 뜨거운 물건인지 차가운 물건인지를 나는 늘 분간하기 어려웠다. 나는 칼을 코에 대고 쇠비린내를 몸속 깊이 빨아 넣었다.
이 세상을 다 버릴 수 있을 때까지,
이 방책 없는 세상에서 살아 있으라고
칼은 말하는 것 같았다.

- 칼의 노래, 김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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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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