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는 우연 아니고 필연
신선함이 필요한 사람
고3 때 깨달았다. 배움에 목말랐던 엄마의 로망이 '교사 딸'이어도 나는 못 하겠다고 말이다.
담임 선생님은 한국지리를 가르치셨다. 진도 빼느라 한 번, 기말고사 대비로 또 한 번, 기말고사 오답 풀이로 또 또 한 번, 수능 대비로 또 또 또 한 번. 그렇게 1반부터 10반까지 지도하셨다. 수능에 가까워질수록 선생님의 탈모는 더 심해져 정수리는 햇볕에 반짝였다. 탈모와 직업 사이에 상관관계는 충분해 보였다.
몇십 년 동안 크게 변하지 않을 지식을 가르칠 자신이 없었다. 물론 열정 있는 선생님들은 다양한 교수법을 시도하며 찰지게 수업하셨다. 삼천포로 보내기도, 제물포에 재우기도 했다. 하지만, 진 씨 성을 가진 담임 선생님은 아주 진지한 분이셨다. 뼛속에서 우려낸 사골 진국 목소리 톤으로 진정성 담아 진심으로 열심히 가르치셨다. '청송 사과, 의성 마늘, 성주 참외.'는 만고불변의 진리 같았다. 순창 고추장이 순천 고추장이 되길 바랐던 나는 '새삥학과'로 진학했다. 그곳에선 매일이 재미있을 것만 같았다.
기계와 동침할 수 없는 사람
소설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를 읽고 눈물을 흘렸던 문학 소녀 F는 교육학을, '바람피우면 잡혀간다.'라고 책을 덮었던 비문학 소녀 T는 공학의 길을 택했다. 새하얀 얼굴의 가녀린 F는 초등학생 기에 눌려 교사를 그만두었고, 누런색 얼굴의 화끈한 T는 기계와 동침하다 그를 버렸다.
새삥학과 그는 금토끼와는 달랐다. 토닥인다고 얼굴을 펴거나(금속), 다독인다고 차분해지지도(토목), 때린다고 말을 듣지도(기계) 않았다.
까만 밤이었다.
오늘도 나는 그와 동침을 예상했다. 잔디밭에서 술 마시던 애들은 집에 갔는데, 오늘도 그는 나를 놔줄 생각이 없었다. 다크서클이 잔뜩 내려온 내가 그에겐 여전히 매력 있었나?
매일 밤 그와 데이트했다.
그의 첫인상에 끌린 건 사실이었다. 스마트하고 나이스했다.
사귀면서 알게 되었다. 제법 예민하다는 걸. 콜론(:)과 세미콜론(;)만 헷갈려도 못 넘어가는 남자.
Error! 라며 나를 욕보였다.
에라이~
이 쪼잔한 놈아!
그는 종종 내 말을 듣질 않았고, 나도 점점 지쳐갔다. True인지 False인지 정하지 못하면 그는 화를 냈다. 그의 행동에 Break를 걸어야 했는데, 차마 못 했다. 그는 같은 자리에서 뺑뺑이를 돌게 했다.
무한루프 속에 날 가둘 때면 나는 입술이 새파래졌다. 짙은 청색 블랙홀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쉽게 허락할 그가 아니었다.
그는 언제나 냉정했기에 결국 나는 질리고 말았다. 더 이상 그의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전원 OFF'
새까맣게 타버린 그를 보니 숨이 쉬어졌다.
'까탈스러운 너는 내 취향이 아니야.'
그와의 동침을 거부하고 컴퓨터실을 뛰쳐나왔다.
마침, 그때 학교에서 더욱 새삥 한 여자가 되어 오라고 해외 단기 연수를 보내줬다. 미국에 가서 알게 됐다.
'세계는 넓고 남자는 많다.'
졸업과 동시에 새 남자를 찾아 떠났다.
말보다 글을 좋아하는 사람
크리에이티브 기획자로 일했었다. 이제껏 본 적 없고, 들은 적 없는 신선한 것을 만들어 내야 했다. 뇌는 수시로 업데이트와 업그레이드, 체인지업을 해야 했다. 5초 남은 신호등을 뛰어 건너면서 '스트라이크'를 외쳤고, 황규영의 '나는 문제없어'를 부르며 열정 바쳐 일했기에 과정을 즐겼고, 열매도 달콤했다. 다만, 과정에서 싫어한 게 있었다면, 내 의견을 설득하는 과정이었다. 어쩌면 제일 중요한 그 일은 내겐 지긋지긋하게 고민한 걸 다시 복습하는 시간이었다. 회의 시간이 싫었다. '재탕, 삼탕 하기 싫다'라는 느낌에 내 말은 씹히고 돌돌 말려 내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실장님, 페이퍼로 확인하시죠?'라고 외치고 싶었다.
말보다 글이 편했고, 말보다 글을 좋아했다.
여유와 싸우면 지는 사람
결혼 전날도 힘들게 일하고, 신혼여행 중에도 이메일을 체크해야 했던 어린 팀장이었다. 야근에 못 견뎌 더 나은 복지를 꿈꾸며 잠시 쉼을 선택했다. 세 달을 쉴 계획이었다. 세 달은커녕, 이틀도 못 견디고 똥 마려운 개가 되는 나를 발견했다. 일 없으면 금방 우울해질 사람임을 깨달았다. 다시 야근의 세계로 돌아갔다. 세월이 흘러 지금은 프리하지 않은 프리랜서 강사로 살고 있다. 일 놓으면 쓸 돈이 없고, 살림 놓으면 입힐 교복이 없고, 멘탈 놓으면 얼굴 탄력이 없으니 적당히 타협하면서 모두를 움켜쥐고 있다.
커피 한잔을 한 자리에서 끝까지 마시지 못한다. '여유'랑 친구 하고 싶고 '우아'를 곁에 두고 싶지만, 그녀들은 늘 내게서 도망친다. 비효율적으로 분주한 것도 같고 산만한 것도 같다. 책상 위도 가방 속도 엉망이다. 수첩과 메모장이 몇 개인지 모른다. 결국 낙서장이 된다. 탁상 달력도 지저분하다. 내게 보내는 카톡 창은 암호 같은 키워드들로 가득하다. 아이디에이션은 근로 시간 외에 해야 했던 습관이 남아 있어 그렇다. 길에서 아이디어를 줍고, 자료다 싶으면 수시로 캡처하던 버릇 때문이다. 어차피 다시 보지도 않으면서.
그런 내게 '글쓰기'가 걸려들었다.
"잘 만났다. 너."
아무 곳에서나 쓸 수 있고, 수정과 저장이 수시로 가능한 이 시대의 글쓰기는 나에게 딱 맞는 놀이다.
꽂히면 몰입은 잘하는 사람
고집 있는 캐릭터는 아니다. 하지만, 누구도 내 일에 터치하지 않는다.
"네 뜻대로 하세요. 어차피 그리될 거."
2년 가까이 1인 책상을 여기저기 끌고 다니며 '쓰는 행위'를 하고 있으니, 딸아이가 물어왔다.
"이번엔 글쓰기야?"
'저번엔 뭐였지?'
방바닥에 화선지와 먹, 붓이 나뒹굴던 때가 기억났다. 방바닥에 전동 드라이버와 경첩, 싱크대 문짝이 나뒹굴던 때도 기억났다. 방바닥에 보냉가방과 핫팩, 장갑이 나뒹굴던 때도 기억났다. 다 소중한 추억이다.
글쓰기는 추억 아니고 모험이다.
호기심이 닿는 그곳을 향한 끝나지 않을 모험.
신선한 것을 좋아하고, 기계보다 사람이 좋은, 말보다 글이 좋은, 여유 없음에 사는 맛을 느끼는 문이과통합시대의 진정한 융합형 인재이자 멀티포텐셜라이트, 백수광부 작가님!
"글쓰기는 내게 우연 아니고 필연이다."
허접한 작가가 스스로를 인재라고 칭하는 것에 반발심이 생기는 분이 있을 것이다. 부캐(백수광부)를 앞세워 별소리 다하는 저런 인간도 있구나 이해해 주세요^^
(다양성이 존중받는 사회)
참! 선견지명도 있지요. 박정민 뜰 줄 알았어요! 그의 책에 명문장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