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 암반수를 댓글러에게

몰입의 힘은 독자로부터

by 백수광부

다음과 같은 문자를 받는다면 어떻게 답할 것인가?

차 트렁크 문이 열려 있어요.

내 글에 달린 댓글을 보며 키득거리던 나는 어떻게 답했을까?


지난겨울일이다. 택배알람보다 댓글알람이 100배 반가운 백수광부님은 무한애정을 두두두 쏘아대는 폭격기 같은 호들갑 독자의 댓글을 읽고 실실 웃고 있었다. 최고의 힐링타임이다. 존재감과 정체성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그때, 주차장에 세워둔 차 트렁크 문이 열려있다는 문자를 받은 것이다. '그건 그거고.' 별생각 없이 답문자를 보냈다.

네^^

한참 후 생각하니, 살짝 나사 빠진 대답 같았다.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문자를 보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고도 바로 내려가지는 않았다. 머릿속에 그림을 그렸다. 소설 쓰기에 빠져있던 중이라 모든 게 '사건(event)'으로 느껴졌다.



2024년 11월.
창 밖에는 한 시간째,
트렁크가 열린 차가 서 있다.
그것도 SUV.
힐끔거리는 눈은 있어도
섣불리 나서는 이는 없었다.

도저히 외면할 수 없어 1층으로 내려갔다.
가까이 가서 내부를 확인했다.
훔쳐갈 건 없어 보였다.
금도 은도 구리선도 보이지 않았다.
흔한 오백 원짜리 동전조차 없었다.
트렁크 쪽에는 정리되지 않은 짐들만 나뒹굴 뿐.

그저 추워 보였다.
몹시 부끄러워 보였다.
뒤처리가 안 된 엉덩이를 내보인양
차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았다.

도저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차주인에게 문자를 보냈다.
답변이 왔다.
"네^^"
놀라는 기색도, 고맙단 말도 없다.
그저 실실 웃기만 할 뿐.

이게 웃을 일인가?
눈웃음에서 찬기가 돈다.
인간이 어쩜 이리도
차가울 수 있는지.
소름이 끼쳤다.


망상에서 벗어나 얼른 내려가 보았다.

'Oh! 내 친구 S'

과거의 S는 골병들어 안락사했고, 지금의 S는 꽁꽁 얼어붙은 동상이 되었다.

당시 '글에 미쳐 있었던 때'라 차에서 내리자마자 집으로 부리나케 뛰어가 노트북을 켰었다. 트렁크 문 닫는 것도 잊은 채 말이다.


나의 글선생은 빨간펜이 아니다. 독자다. 독자는 글쏘시개다. 불쏘시개 역할을 한다.

단 한 명이라도 찐 독자가 있으면 활활 타오른다. 그들에게 실망을 안기지 않기 위해, 글쓰기를 갈고닦아야 했다. 브런치에서도 찐 독자가 있었기에 지금껏 글을 쓰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의 위력을 알기에 스스로 자가발전기를 돌린다. 퇴고를 수없이 하고 작법서, 세미나, 글모임 등도 찾게 된다.


1년 전에 소설을 쓸 때 일이다. 죽어있던 젊은이 감성을 되살리고자 추억여행이라도 해야 했다. 단서라도 있을까 앨범부터 외장하드까지 싹 다 뒤졌다. 온갖 잡다한 업무 파일들 속에서 정말 귀한 자료를 발견했다. MS-word파일이었다. 파일명은 부끄러워 밝힐 순 없다. 파일 속성에 들어가 보니 콘텐츠 작성날짜가 2004년 2월이었다.

호기심 가득한 마음으로 파일을 열었다. 버벅거리던 파일이 페이지 번호 600을 넘어서고야 멈췄다.

"와~ 진짜 미친 여자네."

내가 진정 '광부'임을 확인했다. 이 정도면 '크레이지'가 정체성이자 장르다.

그 어마어마한 콘텐츠의 저작권자는 나다. 연애소설이었다. 제법 웃기고 재미있어서 600페이지가 넘는 문서를 하룻밤에 다 읽었다. 지나가던 식구들이 볼세라 창을 내렸다 올렸다 덮었다 하면서 말이다. 모두 잠든 후에, 이불속에서도 봤다.


긴 글은 써본 적 없다고 생각했는데, 2004년에 한 번 썼던 모양이다. 그걸 발견한 것이다. 숨겨둔 금덩어리라도 발견한 양, 파일을 손보기 시작했다. 내용을 건드릴 이유는 없었다. 엄두도 나지 않았다. 마구잡이 줄바꿈만 제법 정리했다. 그랬더니 350페이지 정도가 되었다. 왜 하는지도 모른 채 무아지경으로 편집을 하고 있던 중, 몽롱한 정신세계를 뚫고 지나가는 기억을 낚아챘다.


2004년에 '네이트 판'에 그 소설을 연재한 사실이 떠올랐다. 정확히 20년 후, 2024년에 '브런치'에 첫 소설을 연재하는 현실에 소름이 끼쳤다.


나만 아는 이야기의 파편들이 내게 일어났던 일인지 2004년 소설에서 만들곤 덮어쓴 가공의 일인지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예를 들면, 내가 박정민 배우 같은 남자와 사귀어 같은 느낌이 진실인지, 나의 창작에 뒤엉켜 조작된 거짓인지 모르겠다. 제대로 업데이트 돼버린 것도 같다.


줄줄이 비엔나처럼 소환되는 내 기억에 그인지 그녀인지 모를 한 명이 떠올랐다.

2004년 반지하 단칸방에서 내 손가락을 춤추게 했던 사람.

단 한 명의 독자님.

"다음 화가 기다려집니다."

그 말 한마디에 밤잠 설쳐가며 글을 썼다.

독자님께 깨끗하고 영롱한 암반수를 대령하기 위해 광부는 지하 몇 미터까지 삽질을 했을까?

독자님은 여주인공이 첫사랑과 잘 되길 바랐던 모양이었다. 뻔한 클리셰를 벗어던지고자 무리수를 둔 작가가 싫었던 걸까? 뒤늦게 등장한 남자와 여자가 커플이 되자, 독자님은 더 이상 댓글을 달지 않았다.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셨다. 나의 독자님이 떠난 썰렁한 네이트 판에서 나도 판을 접고 일상으로 돌아갔다. 지금 생각하니 소중하고 반짝이는 추억이다.


독자란 이리 무섭다. 한두 달 내에 A4 600장 소설을 쓰게 하다니 말이다. 그분에게 잘 보이려고 얼마나 다듬고 다듬었을까? 지금도 눈이 시큰거리는 느낌이다.

독자의 수가 내 영향력의 크기라 생각하는 마음이 아니다. 내 글이 잠시라도 누군가의 호흡 속에 함께 뒤섞여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황홀하다. 이곳, 브런치에서 활동하는 작가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구독자가 적든 많든, 단 한 사람이라도 내 글과 진심으로 소통한다면, 한 겨울 추위에도 훈훈하게 버틸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많은 걸 바라요?
그저, 그 진심의 'ㅋㅋㅋㅋㅋ'를 날려주면
저는 꿀잠을 잡니다.


댓글과 대댓글이 선순환하는 '자가발전형 글쓰기'를 하고 싶다. 2004년 네이트 판에서 내 소설에 댓글을 달아주신 그분처럼, 나도 글에 푹 빠진 댓글을 주고받으며 글쓰기에 몰입하고 싶다. 쓴맛과 단맛이 공존하며 거품으로 살짝 부풀리고 시나몬으로 코끝 자극하는 카푸치노가 되련다. 물은 지하 깊은 곳에서 끌어올린 암반수로 쓸 정도 고집을 부리며 말이다.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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