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광부 글감공모전 수상자
작년 일이다. 글쓰기에 미쳐있던 그때, 고고학자라도 된 양 옛 것을 찾아 집을 뒤지고 다녔다. 장롱 속 앨범들 속에서 익숙지 않은 편지 뭉치를 발견했다.
'백수광부 글감 공모전'을 열었다. 오래되었지만 눈길이 가는 '신선한 물건'이 있었다. 접힌 종이의 해진 정도로 보니 최소 30년은 되어 보였다. 펼쳐본 후 감정평가에 들어갔다.
'흠. 이 사료는 글감으로서 가치가 있어 보이는 군.'
from 유진.
Love is?
유진에게 받은 연애편지인가?
내가 아는 남자 중에 '유진'이 있었던가? 학교 다닐 때는 SES 유진 밖에 아는 유진은 없었는데, 상당히 궁금했다. 하트 화살에 'Love is'를 그릴 다정하고 오글거리는 남자와 스쳐 지나간 적이라도 있었던 걸까? 상상하니 광대는 실룩실룩, 온몸이 베베 꼬이기 시작했다. 경건한 마음으로 편지 첫 줄을 읽는데,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헛웃음이자 비웃음이었다.
"헛! 우웩~"
to. 이름 모를 소년
100% 장담하긴 힘들지만, 유진은 고등학생 소녀인 것 같다. 시대가 90년대 초반으로 제법 보수적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유진이 소년은 아니라는 소심한 전제를 깐다. 또한, 난 '유진'이 아니다. 내가 쓰고 부치지 못한 편지는 아니란 얘기다. 단, 내 것은 아니지만, 경매에 붙일 생각은 있다. '이름 모를 소년'으로 의심 가는 갓 오십 줄 아저씨는 '기억상실'을 주장하기에 주인 없는 편지다. 내 손에 들어온 이상, 내 마음대로 할 예정이다.
"내가 70년대 태어난 '유진'이거나 '○유진', '○○유진'이면서, 내 필체가 확실하다 싶으면 연락 주세요. 글은 바로 내릴게요. 30년도 넘은 귀한 물건인데 싸게 드릴게요. 우리 나이쯤 되면 추억 뜯어먹고 살잖아요. 이 편지 공개되면 좀 거시기할 수도 있어요."
연락 없는 걸 보니 공개해야겠다.
무슨 물건이길래 또 이리 호들갑을 떠나 싶겠지요?
개봉박두!
휴대폰으로 글을 보는 노안 독자님을 위해 타자로 다시 쳤다. 맞춤법은 틀린 그대로 옮겨 적었다. (OCR인식도 힘들고, 맞춤법 검사기에 자꾸 걸려 힘들었어요. 유진 씨!)
to. 이름 모를 소년.
제가 21일 약속을 하여놓고 늦게 나간 탓에
괸히 헛걸음 하시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날따라 외이리 차가 막히는지 지금껏 당해보지 못한
당황과 미안함이 제 가슴을 치고 가는것 같습니다.
쳐다 보고도 저를 알지못하는 듯 그냥지나 치는데 사실 제가
you 에게 미안한 마음 금할수 없읍니다.
지난번 늦은 시간도 이렇듯 편지를 쓰었지만 'you'가
나오지 않아 구겨버린 편지가 많이 되는 것이 이제는 학원
빠지지 않고 열심히 다니었이면 좋겠어요.
지난번 세계로 가는 기차 속에서 기다리는 중 'you'의
친구들이 앉아 있던데 그때 계셨을 지도 모르겠네요.
다음 만나기 전에 제가 저를 알수있는 힌트를 드릴꼐요.
저는 단발머리에 보라색 잠바를 입고 다닙니다.
이정도면은 저를 충분히 알수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럼 다음에 다시 보낼께요.
-진정한 표시의 친구가 되고 싶은 한소녀가-
p.s 이 편지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마셔요. 언제나 지켜보겠어요!
순수했던 시절 편지에 감히 칼을 갖다 대서 죄송한데, 재미를 위한 희생이니 양해 바랍니다. 유진 씨!
to. 이름 모를 소년.
: 소년이라 하는 걸 보니, 유진 씨도 소년도 중고등 정도일 때 일인가 봐요. '이름 모를 소년.'이란 표현은 시에서 베낀 건가요? 노래 가사에서 베낀 건가요? 딱 90년대 초반 냄새가 나네요.
아래 내용 보니 제법 집착하는 것 같은데, 이 정도면 이름도 알고 계실 것 같네요. 알면서 일부러 제법 감성적으로 접근한 부분, 일단 먹힌 것 같아요. 제가 남자라면 어린 왕자라도 된 듯 기분이 붕~ 떠올랐을 것 같네요.
제가 21일 약속을 하여놓고 늦게 나간 탓에 괸히 헛걸음 하시었으리라 생각합니다.
: 흠. 이번이 첫 들이댐은 아니군요. 약속은 혼자만의 약속인가요? 쌍방합의한 약속인가요? 그나저나 '괸히' 맞춤법 틀렸어요. 분위기가 중딩은 아닌 것 같고 고딩인데, '괜히'를 '괸히'로 쓰다니 점수 많이 깎였을 것 같네요. 이름 모를 그 소년은 제법 깐깐하거든요.
그날따라 외이리 차가 막히는지 지금껏 당해보지 못한 당황과 미안함이 제 가슴을 치고 가는 것 같습니다.
: '외이리'라고 쓰셨네요. 또 마이너스 30점. 차가 많이 막혀서 늦으셨나 봐요. 당시에 휴대폰이 없을 시절이니 얼마나 애가 타셨을 까요? 그렇지만 그런 일로 가슴을 치실 정도로 그 소년이 좋으셨나 봐요. 이해가 좀 안 되네요. 제가 그 소년의 소년 시절 사진을 본 적 있거든요.
전반적으로 표현이 너무 올드하네요. '가슴을 치다' 이런 표현은 한 많은 할머니들이 하실 법한 표현인데, 아무리 90년대 초반이라도 고등학생이 이런 표현을 썼다는 게, 의아하긴 해요. 설마 아줌마는 아니시죠? 혹시나 해서요.
어떤 이유로든 그는 늦는 거 싫어해요. J거든요. 어디 가야 하는데 늑장 부리면 카운트 다운 해요.
출발 20분 전! 10분 전! 5분 전!
안 나오면... (배고프면 극대노)
당시 MBTI란 걸 알았다면 좀 더 조심했겠죠? 아쉽네요.
쳐다보고도 저를 알지못하는 듯 그냥지나 치는데 사실 제가 you 에게 미안한 마음 금할수 없읍니다.
: 늦어서 이미 찍힌 것 같고요. 그래도 이쁘면 아는 체 했을 텐데, 아마 유진 씨가 아니었나 봐요. 그(당신의 you)가 그냥 지나친 건 100% 외모 탓일 거예요. 죄송해요. 너무 직설적으로 말해서요. 그렇다고 해서 '금할 수 없을 정도'로 미안한가요? 같은 여자로서 이런 저자세는 좋지 않아요. 그 정도로 '당신의 you'가 고퀄리티는 아니잖아요. 인정?
당신이 갑자기 쓴 영어 'you'라는 표현에 전 온몸이 오그라들어 뭉크의 '절규'가 되었어요. 그냥 비슷한 시대를 산 사람으로 그러네요. 'I', 'my', 'me', 'you'를 남발하던... 뜨아!
지난번 늦은 시간도 이렇듯 편지를 쓰었지만 'you'가 나오지 않아 구겨버린 편지가 많이 되는 것이 이제는 학원 빠지지 않고 열심히 다니었이면 좋겠어요.
: 도대체 몇 번이나 편지를 썼다 지웠다 하신 건가요? 진짜 이해가 안 되는데 '당신의 you'의 어디에 반하신 거죠? 학원에서 공부 안 하고 편지를 쓰신 거는 아니죠? 그가 학원을 자주 빠졌나 봐요. 그의 어머니도 아실까 씁쓸해지네요.
근데 무슨 학원을 다니신 거예요? 그는 영수 보습학원만 다닌 걸로 아는데, 죄송하지만 유진 씨는 빨간펜이나 눈높이 한글 학습지가 선행되었어야 한다고 봐요. 제가 너무 직설적이라 죄송해요. 연애에서 진실한 마음도 중요하지만 맞춤법, 띄어쓰기가 너무 틀리면 그렇죠. 그는 아주 까탈스럽거든요. 보쌈에 새우젓 없거나 카레에 감자 빠지면 차려놓은 밥 안 먹고, 마트로 새우젓, 감자 사러 갔다 오는 성격이거든요.
지난번 세계로 가는 기차 속에서 기다리는 중 'you'의 친구들이 앉아 있던데 그때 계셨을지도 모르겠네요.
: '세계로 가는 기차 속에서'는 밥집입니까? 카페입니까? 이름으로 봐서는 술집 느낌인데, 설마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고딩들이 술집 간 건 아니겠죠? 아니면 진짜 세계로 가는 기차 속입니까? 점점 유진 씨 글에서 이상한 기류를 감지해서요. 자아분열?
you의 친구들을 스캔했으면 you도 있는지 봤을 거 같은데? 봤음 봤다 안 봤음 안 봤다 솔직히 말해요. 이런 무심한 듯한 표현 쓴다고 속마음이 가려지는 게 아니에요. you의 친구들 보기에도 가슴이 콩닥콩닥 하셨을까요? 너무 떨려서? 비슷한 경험이 있긴 해서 이해는 해요.
다음 만나기 전에 제가 저를 알 수 있는 힌트를 드릴꼐요. 저는 단발머리에 보라색 잠바를 입고 다닙니다. 이정도면은 저를 충분히 알수있으리라 생각합니다.
: 하하하. 잠시 웃고 갈게요. 아~ 이 옛날 감성. 지금처럼 휴대폰이 없었으니 자신임을 밝히는 표식을 하고 기다렸을 텐데, 많이 떨리셨죠? 단발머리에 보라색 잠바 입고 어디에 서 계셨을 당신을 상상하니 부끄부끄. 그래서 '이름 모를 소년'과 결국은 만났나요? 어찌 됐나요? 너무 궁금하네요. 그 소년은 기억이 1도 안 나는 것 같아요. 소주를 자주 마시더니, 쯧쯧.
그럼 다음에 다시 보낼께요.
: 고만 보내요. 자꾸 보내셔도 안 이쁘면 끝이라니까요. 아니면 저처럼 성격이 독특해서 보는 재미라도 있던가?
진정한 표시의 친구가 되고 싶은 한소녀가
: 친구요? 편지 겉면에 'Love is' 라면서요? 왜 이랬다 저랬다 해요? 친구라도 될 걸 그랬어? 그 전략인가요? 이해가 안 되어서 그런데 '진정한 표시의 친구'는 뭘 의미하는 걸까요? 우정 반지라도 해야 하나? 그 소년 이마에 '유진은 내꼬얌.' 이렇게 매직으로 그리고 다녀야 하나요?
p.s) 이 편지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마셔요. 언제나 지켜보겠어요!
: 제가 봐 버렸네요. 어쩌나? 행운의 편지처럼 여러 개 뿌리진 않으셨지요? 그리고 이름도 모르는 소년을 '언제나' 지켜보면 스토커 아닙니까?
유진 씨! 할 말이 있어요.
"당신은 그때 좀 더 용기를 냈어야 했어요. 그럼 제가 더 행복했을 수도......ㅎㅎㅎ."
그날의 에피소드는 글감이 되어 한 편의 자작시로 탄생했다.
곁에 있는 것들을 위한 노래 @백수광부 - BOOKK 서점
2024년에 일상 속 글감과 내면의 깨달음을 담아 첫 시집을 출간했다. 이번 회차 글을 쓰고 있던 와중에, 놀랍게도 갑자기 그 시집 한 권이 팔렸다는 문자가 왔다.
도대체 누가 알고,
이 타이밍에 사 간 거야?
자가출판은 책이 팔리면 작가에게 바로 알람이 온다. 나는 누가 사갔는지 아주 궁금해진다. 지금은 홍보도 안 하는 책을 누가 사 간 걸까? 브런치에 계실 것만 같은 그분께 고마움을 전한다.
오늘의 결론은 고마운 유진 씨가 글감을 주셨고, 그 글감으로 시를 썼고, 시집을 냈고, 시집이 팔렸고 인세로 3,325원을 벌었다. 그걸 또 글로 이렇게 쓴다.
[글감찾기-글쓰기-수입(까까&맥주)-글쓰기 호감도 상승-글 쓸 궁리]의 선순환 구조가 끝없이 이어지길 바란다.
아래 시 관심 있는 교과서 출판사나 선생님 안 계실까요? 동음이의어 공부할 때 딱인데, 연락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