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를 향한 나의 시선

그녀에게는 비밀로 해요.

by 백수광부

오늘 테마는 편지글이다. 대학시절 나의 동지들에게 각각 한 통씩 써본다. 매끄러운 진행을 위해 가명을 쓴다. 기대하는 연예인과 싱크로율이 낮아도 책임은 못 진다. 상은 자유!

시경(선배), 수지(친구), 이랑(나).



To. 시경 선배.

잘 지내요?

얼마 전에 수지를 만났는데, 선배 소식을 전해주더라고요.

즘 회사에서 힘든 일 많다면서요?

수지랑은 연락하면서 나한테는 안 하고 섭섭하네요.

대학 때 내가 선배 갈궈주면 좋아했잖아요.

'뭐 저런 여자가 다 있나.'생각하면서도 키득거린 거 다 알아요.

웃음치료 해주러 가야 하는데, 가까이 살면서도 바쁘니 쉽지 않네요.


우리가 언제 처음 만났죠?

우리 셋은 팀 프로젝트 하면서 종종 함께 다녔죠. 밤을 패가면서 컴퓨터 앞에서 씨름할 때, 수지와 나는 짬짬이 자기도 했지만, 선배는 아니었죠. 까만 밤하늘 별을 바라보며 왼손에 믹스커피, 오른손에는 담배를 챙기며 깊은숨을 들이마시고 내쉬곤 했죠. 결국은 해내는 모습이 존경스러웠어요. 무엇보다 어떤 상황에도 짜증 내지 않는 그 태도가 더 훌륭했지요. 우악스러운 제가 선배를 갈궈도, 외모 지상주의 수지가 선배를 놀려도 늘 수줍게 웃기만 했죠. 내성적이고 차분한 선배가 우리와 같이 다니는 걸 보면서, 다른 선배들이 노예나 포로로 끌려다니는 거 아니냐며 쑥덕거리기도 했죠.


2년 전, 수지 아버지께서 갑작스레 돌아가셨을 때, 장례식장에서 선배를 봤죠. 정말 오랜만이었죠. 떠들고 웃을 분위기는 아니었기에 짧게 안부를 묻고 일어나야 했죠. 수지는 아버지 잃은 슬픔에 눈물을 훔치면서도 썩은 농담을 했죠. 선배가 자리를 비웠을 때, 자기 딸이 선배처럼 뚱뚱하다고, 걱정이라고, 떡을 그만 주워 먹으라고 딸에게 핀잔을 주었죠.

"너 계속 먹으면 저 아저씨처럼 된다."

분위기 무거워질까 봐 한 말이란 걸 알았죠.


선배는 나랑 헤어질 때, 선배집으로 놀러 오라고 했죠. 수지도 함께 술 마시기로 했다면서 말이죠. 셋이 모여 옛 이야기 하면 재밌을 텐데. 물론 선배 와이프가 신경 쓰이지만 말이에요. 저번에 와이프 분이 전화했었어요.

"대학 때, 시경씨가 혹시 (이랑 씨) 좋아했어~영?"

"네버! 그냥 선후배 사이였어~~ 영."

와이프가 선배 많이 좋아하나 봐요.

조만간 집으로 놀러 갈게요. 셋이면 선배 와이프도 우리 사이 의심 안 할 거예요.


수지 말이 선배가 아직 콜라를 못 끊은 것 같다던데, 제발 끊어요.

담배도 좀 끊고. 건강 생각해야죠!

그럼 만날 때까지 잘 지내요.


From. 후배, 이랑



To. 베프, 수지.

너를 만나고 왔는데도, 또 그립다.

대학 1학년 때였고, 나른해지기 좋은 3월이었지. 이산수학 시간이었던 걸로 기억해. 하나도 궁금하지 않은 증명을 교수님이 칠판에 무아지경으로 휘갈기실 때, 지루해지기 시작해 주변을 두리번거렸지. 내 눈을 반짝이게 한 것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폭탄머리 너였어. 고딩시절 단발령에 화풀이라도 하듯, 밝은 갈색 나이아가라 파마를 한, 꼬들라면 그 자체인 네가 상모를 돌리고 있었던 거야. 나는 제법 의아했어.

'대학 와서도 대놓고 조는 애가 있구나.'

쉬는 시간이 되자 그제야 너는 고개를 들었지. 반전이었어.

외모는 배우 고아라? 아니면 수지(개그맨 수지 아니고, 첫사랑 수지)쯤? 청순 그 자체였지.

그런 외모로 저렇게 잘 수는 없다는 판단 하에 무언가 있겠다 싶어 네게 다가갔지.

성큼성큼 말이야. 네게 긴히 할 말이 있었거든!


"안녕! 난 이랑이라고 해."


참으려 했지만, 어쩔 수 없이 네게 들이댄 거지. 놓치면 안 될 사람 같았어. 다행히 너도 내가 마음에 들었는지 우리는 대학 단짝 친구가 되었지. 대학시절 내내 붙어 다니며 밥을 함께 먹고 많은 것을 공유했지. 싸운 적 한 번 없이 말이야. 그 우정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니 새삼 놀랍네.


번개팅에 나간 지 10분 만에, 폭탄 좀 해결해 달라며 SOS를 치던 너!

그럼 나는 달려가 네가 첫사랑 수지와는 결이 다른 여자 사람이란 걸 증명해 주곤 했지.

마른 몸과는 달리 음식 남기는 법 없이 고봉밥을 해치우던 너!

네가 밥 다 먹을 때까지 나는 혼자 이 얘기 저 얘기 떠들어야 했지.

소개팅은 주야장천 하면서 연애 한번 제대로 못하던 밋밋한 너!

연애의 타이밍을 놓쳐버리곤 옆구리가 시리다며 드라마만 줄곧 봤지.

언젠가 드라마 남 주인공이 나타날 거라고 믿던 순진한 너!

성모, 계상, 현빈 등은 너와 친해질 수 없다 말해도 환상 속에 그대를 그렸지.


풋풋했던 20대 추억을 켜켜이 쌓은 우리가 어느덧 결혼도 하고, 애도 낳고 사는구나. 신기하다.

바빠도 우리는 일 년에 2번은 꼭 만났잖아. 각자의 생일이 있는 봄과 가을에 말이야. 그때는 온종일 함께 보냈지. 그때마다 우린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하는 얘기들을 하며 서로를 위로하고 응원했지. 애교가 없는 네가 요즘 내게 자꾸 플러팅 하는 게 이상하다 싶었는데, 남편에게 쌓인 미움이 많은 모양이지? 유독 시어머니가 너무 하다. 남편이 불쌍한데 밉다. 그런 효자가 없다며 속사포를 쏟아낼 때, 내가 너의 결혼을 말렸어야 했나 후회도 되었어.


우리 나이 26살 때 일인 것 같아. 뜸을 들이며 너는 내게 말했지.

"나 사귀는 사람 생겼어."

드라마 속 잘생긴 배우급을 찾다가 남자 한 번 제대로 못 사귀어 본 너에게 드디어 남자가 생겼다니, 나는 아주 호들갑을 떨었지.

"뭐야 모야 머야! 어떤 사람이야? 너무 궁금한데?"

내 머릿속에는 현빈급을 생각하고 있었어.


"너도 아는 사람이야."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어. 내 주위에는 아무리 생각해도 '빈이'는 없었으니까.(미스터 빈 제외.)

"엥? 누구? 혹시 원훈 선배?"

"아니."

"그럼 동엽 선배?"

"아니."

"너 혹시... 아니지?"

"누구?"

"연기과 박정민."

"아니야. 정민인 얼마 전에 화노인지 화사한테 넘어갔잖아."

"그렇구나. 걔가 대놓고 꼬시는데 안 넘어갈 남자가 어디 있겠냐?"

"그러게. 썸남 정민이는 팔랑팔랑 나비처럼 굿바이 했지."

"그럼 남은 사람은 없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떠오르지 않았지.


"설마 너?"

불길해하며 던진 나의 말에 너는 수줍게 웃었지. 그 미소는 날 절망케 했어.


"야! 너! 왜!"

네가 그럴 줄은 몰랐어.

그가 네 스타일은 아니었잖아.

그래도 사귀기로 했다니까 아무 말도 하진 않았어. 오래갈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그렇게 사귀는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밋밋한 연애를 하는 너를 멀리서 지켜봤어. 언제 깨지나 하고 말이야.


한 1~2년 지난 어느 날, 너는 다시 내게 진지하게 물었지.

"나 결혼할까? 말까?"

드디어 네가 강을 건너려나 싶었지. 신중하라고 말했지만, 너는 나의 진정성을 의심했지. 그가 편하고 잘해준다며 결혼하려 했지. 더는 말릴 명분이 없었어. 당시 나는 철없는 20대였기에 어른들이 하는 '얼굴 뜯어먹고 사냐?'는 말에 동의하며 너를 보내줬지.

"잘 가!"

결혼식날 웃는 너를 보며 그래도 잘 살면 나는 아무래도 괜찮다고 생각했어. 식장에 있던 시경 선배도 너의 결혼을 응원해 줬고, 시경 선배가 사람 보는 눈이 있으니 나도 안심했어.


친구! 여전히 결혼생활 행복하니?

간장게장에 양념게장까지 맛있게 먹고 난 후, 너는 후식으로 시댁과 남편 뒷담화를 시작했어. 갑자기 훅~ 하고 네가 던진 말에 나는 화들짝 놀랐어.


"대학시절, 선배가 너 좋아하지 않았어?"

"뭔 개뚱딴지 폭탄 돌리는 소리야?"

"네가 데려가지 그랬어!"

"니 남편을 왜 나한테 떠넘기려고 해!"

"에휴."

"그래도 사람은 착하잖아.'


제발 둘이 잘 살아!

너희 집에 초대 한 번 해!

부부싸움 구경 좀 하게! 내가 불쏘시개 되어줄게^^


우리 우정 영원하자!


From. 친구, 이랑




시경 선배, 들어봐요!

이 글을 읽을 일은 없겠지만, 읽게 되어도 속상해하지 말고, 이랑이가 진짜 폭탄을 맞고 싶구나 생각해 주세요.ㅋㅋㅋㅋㅋㅋ

수지와 얼마나 친한지 알죠?

상황이 힘든 건 알지만, 수지의 베프 입장에서 제가 많이 속상해요.

선배가 워낙 효자란 건 알지만, 수지도 안 됐잖아요. 인정하죠?

수지한테 '판도라의 상자' 지금 열면 네가 다친다고 얘기해 뒀으니 빨리 수습해요. 수지가 선배에게 감춰둔 빚이 있을 거라 생각해요. 저도 같은 생각인데, 맞죠?

혼자 끙끙 앓지 말고 수지에게 얘기해요. 그녀에겐 돈이 있는 것 같아요. 걔 요즘 잘 나가잖아요. 하는 프로그램만 몇 개인데요. 빚 키우지 말고 자존심 빨리 버려요. 그리고 선배 어머님께 제 말 좀 전해 줘요.


"아들이 서울역에서 제일 잘 생겼다고만 생각 마시고 며느리는 서울에서 제일 이쁘다 생각하셔야 아들 얼굴이 편대요."라고요.


둘이 훈훈해지면 집으로 초대해 줘요.

술은 내가 사갈 테니까.


아! 그리고, 수지가 굳이 괜찮다는데, 치즈케이크를 사주고 갔어요. 대리만족 하는 거 같아요. 선배 딸이 단 걸 더 먹다가는 선배처럼 된다는 말을 남긴 채. ㅋㅋㅋ

여하튼, 고마워요.

우리 식구가 대신 잘 먹었어요.

* 혹시 로맨스나 불륜막장인 줄 알고 여기까지 따라오신 분이 계시다면 죄송해요^^ 시간 되시면 2번 읽으면 더 재미있습니다.


*설 연휴 휴재, 바쁘면 2월까지 휴재일 수도 있어요^^ 미리 설 인사 합니다. 복 많이 받으세요.*^^*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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