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울다 일어선 문장

그 책은 '그럼에도 살아갈 용기'를 전한다.

by 백수광부

파주 북토크를 다녀온 그날 밤, 방바닥에 철퍼덕 누웠다. 천장을 멍하니 쳐다보며 한 시간 전 일을 떠올렸다. 무척 따듯한 공간에서 한 편의 영화를 보았다. 주인공도 감독도 흔들림 없었지만 관객들은 입을 틀어막고 울었다. 상영이 끝났지만 나갈 생각 없는 관객들에게 두 감독(두쫀쿠 주는 송 감독)은 소리쳤다.

"이제 제발 가시라고요."

질척거리던 관객들을 몰아내는 웃음 섞인 절규에 겨우 쫓겨났다.


은은한 조명아래 모여든 사람들과 아늑한 책방에서 도대체 무얼 본 거지?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팔다리에 힘이 다 빠진 거지? 책과 작가, 독자, 책 속 인물들이 한데 엉겨 뒹굴었다. 아픔과 슬픔, 불안과 우울, 절망과 안도 등 온갖 감정이 내 안을 헤집고 다니며 힘을 쏘옥 빼놓더니 잠이 들고서야 겨우 차분해졌다.

'사랑하는 이의 상실'이라는 서사에 귀 기울이러 간 것은 아니었다. '마음이 아픈 사람과의 연대'에 끼기 위함도 아니었다. 내가 그곳에 간 건, 송지영 작가의 살아 반짝이는 문장의 원천이 궁금해서였다. 죽음, 상실, 아픔을 이야기하는 사람 글에서 한여름 산들바람향이 난다고나 할까?


<널 보낼 용기> 북토크 6시간 전, 작가님께 선물할 문장을 만들었다. 브런치에 많은 글을 썼고 구독자가 무려 260명이 되는 작가의 붓펜이 흰 종이를 스쳐가며 한 글자씩 써 내려갔다. 디자인까지 가미한 캘리그래피였다. 고요해야 할 사람은 작가님이 아니라 나였다. 내 손은 명랑하게 총총거렸다. 비루한 캘리그래피 실력을 원망하며 숱하게 흰 종이를 버렸다. 그래도 제일 낫다 싶은 종이를 챙겼다. 작가님께 전할지 말지 정하지 못한 채 북토크 장소로 향했다. 총. 총. 총.

인간 송지영은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코를 찡긋하고 웃으니 김혜수 배우가 되었고, 재미있는 이야기에는 냥이 펀치로 애교를 뿜어댔다.

작가 송지영은 힘 있는 사람이었다. 웃음기 뺀 작가가 되면 무한한 힘을 내뿜었다. 인생사라는 원운동 안에서 튕겨나가려는 이를 잡아주는 구심력 그 자체였다.


"제가 그 분야(슬픔) 전문가잖아요."

라고 말했을 때 소름이 끼쳤다. 슬픔이란 분야에도 전문가가 있다니? 사실이었다. 그녀가 그 분야 경험자이자 전문가였다. 경험했기에 빚을 수 있었고, 고민했기에 표현할 수 있었고, 힘들었기에 일어설 수 있었던 사람이다. 슬픔 전문가라는 그 씁쓸한 말이 내겐 전혀 씁쓸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문장 뒤에 숨어있는 결의가 시큰거려 눈물샘은 곧 터질 듯했다. 눈물을 흘리지 않는 그녀 앞에서 눈물을 틀어막으며 그녀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사실 그날 바닥에 엎어져 통곡할 뻔했다.) 유경험자가 아니어도 알아야 할 인생사 한 챕터가 펼쳐졌다.

어른이 되고 보니 절망 없는 삶이 꼭 행복한 삶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장애물을 넘어가며 배우는 인생은 인간을 겸손하게 하고 삶을 겸허하게 받아들일 여유를 준다. 태어나 죽을 때까지 성숙의 기회를 많이 얻어 더 많은 세계를 포용할 수 있다면 그 얼마나 값진 삶인가? 피할 수 없는 나의 아픔 앞에서도 누군가에게는 희망 씨앗이 될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다면 그 얼마나 가치 있는 삶인가?


시점의 문제이지, 사회라는 틀 안에서 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이라면 상실과 슬픔을 피해 갈 수는 없다. 슬픔을 겪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마냥 슬퍼할 수만 있는 것도 누군가에겐 사치다. 무슨 헛소리를 하냐고 묻는 사람도 있겠지만, 책임감 강한 사람에게는 슬픔에 빠져 휘청이는 일조차 뒷전으로 미뤄야 한다. 돌봐야 할 다른 가족이 있거나 나를 걱정하는 시선이 있다면 마음 편히 슬플 수도 없어, 그 상처는 목구멍에 낀 가시가 되고 만다.


죽음 이후 가족의 삶을 걱정한 딸아이 부탁에 송 작가는 용기를 내었다. 글 쓰는 손에 힘을 주었고, 허리를 세워 여럿을 끌어안았다. 한 생명은 보냈지만, 여럿을 구하고 있다. 내 슬픔은 곱게 접어 연으로 띄우고, 그 연줄은 새끼손가락에 건 채, 숨어있는 곳곳을 살피는 중이다. 그녀의 글과 말에서 힘을 얻는 자들을 지켜보며 생각했다. 이 책은 한 개인의 상실을 그린 에세이가 아닌 많은 이에게 살아갈 용기를 주는 지침서라고 말이다. 잘 살고 싶으면 이거 실천해라는 명령형, 바르게 살고 싶으면 저거 하자는 청유형 문장이 아닌 다정하게 스며들어와 인간 내면의 성장을 돕는 새로운 형태의 자기계발서라고나 할까?


이 책을 미리 알았더라면, 내 주변에서도 종종 있었던 쓰라린 사고와 상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을까? 아픔의 후유증으로 고통받는 이들에게 힘이 될 수 있었을까? 괜찮다고 했을 때, 여전히 괜찮지 않은 마음 상태란 걸 알아챌 수 있었을까? 괜찮다 하니 괜찮은 줄로 알고 넘겼던 순간들이 목에 가시처럼 걸린다.

"작가님, 책 제목 너무 좋아요."

<널 보낼 용기>는 내 책장에서 나와 함께 걷다가 내가 휘청일 때마다 나를 토닥이며 용기를 줄 것 같다.

다시, 송지영이라는 인간으로 살아가는 그녀의 발걸음에 귀 기울여본다.

"작가님, 슬픈 이들의 사연을 접하면 (지난 일이 떠올라) 힘들지 않으세요?"

그녀는 이렇게 답한다.

"북토크 다녀오면 며칠을 앓아요. 하지만, 제게 오는 이들은 살려고 오는 거예요. 그들과 얘기 나누는 일은 하나도 힘들지 않아요."

작가님께 2번 물어서 확인한 결과이다. 힘들거나 위태로운 청소년이나 청년들, 아이를 떠나보내고 삶이 막막한 부모와 가족, 사고사로 힘든 분들, 그들의 지인 등은 꼭 이 책에 닿기를 바란다. 송지영 작가님과 닿으면 더 좋다. 자주 연락해도 괜찮단다. 오히려 더 좋다고 한다. 괜히 바쁘실까 봐 괜히 미안해서 괜히 용기가 안 나서 망설이는 일은 없기를 바란다.

'살아갈 용기'라는 행운의 카드는 그녀 손에 있으니 살포시 그녀를 건드리면 된다. 톡.톡.톡.

브런치에만 이 책 서평이 30개가 넘는다. 굳이 더하지 않아도 될 책 얘기를 하는 것은 '나를 담아낸 나의 글에게'라는 나의 브런치북에 소중한 북토크 경험을 남기고 싶어서다. 브런치를 통한 글쓰기를 하였기에 닿을 수 있었고 담을 수 있는 이야기다. 용기가 필요한 누군가는 용기를 내길 바란다. 지금이 아니어도 좋다.

용기날 때 찾아보라고 책 사진과 링크도 생략한다. 검색할 용기(책, 브런치, SNS)는 각자의 몫으로 남겨둔다.

화요일 연재
이전 13화선배를 향한 나의 시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