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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수광부 Oct 06. 2024

50년생과 친구가 되는 상상

내 부모와 친구가 된다면?


김 작가님의 에세이를 읽다가 문득 이런 상상을 해 보았다.  


부모와 친구가 된다면?’


주민등록상 1950년생인 나의 부모님과 친구가 되는 재미있는 상상에 빠져 보았다. 나의 상상은 팩트를 기반으로 하되 양념을 좀 뿌려댔다. 그들과 나는 갑자기 대학생 1학년 새내기가 되었다.




필순이는 초등학교만 졸업했지만 검정고시로 중·고등학교 과정의 공부를 모두 마쳤단다. 주경야독(晝耕夜讀)을 한 모양이다. 그녀는 늘 공부가 하고팠고 학교가 고팠다. 대학 등록금도 본인이 모은 돈으로 해결했다. 대학에 와서는 주독야경(晝讀夜耕)을 했다. 낮에는 공부하고 밤에는 일했다.


밤낮없이 바쁜 필순이를 보고 있자니 엉덩이에 가시가 돋는다. 먼 산을 바라보며 커피나 마시고 있는 내 팔자는 어느 양반집 개 팔자구나 싶었다. 필순이 부모는 왜 이름을 그리 지었을까? 뭔가 평생을 순종하고 참아내야 할 팔자 같았다.


'반드시 순해라가 뭐야?'


필순이 부모의 50년대스러운 작명은 여하튼 맘에 들지 않았다.


필순이는 수업을 아주 열심히 듣는 학생이다. 교수님 말씀 하나하나를 마음에 새겼다. 삐뚤빼뚤한 글씨로 필기는 아주 꼼꼼하게 했다. 배운 내용은 쉬는 시간에 나에게 그대로 읊어주었다. 쉬는 시간에도 교수님이 나가시지 않은 느낌이었다. 필순이는 다 좋은데 가끔 말이 많은 게 단점이다. 정치, 사회, 사건사고, 친구들 얘기까지 30분은 기본이다. 주위에 아주 관심이 많은 친구다.


내가 필순이와 친한 것은 그럼에도 그녀는 구김살이 없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그러진 않았다고 했다. 다만, 언젠가부터 고생만 하는 본인의 삶을 되돌아보니 해탈의 경지에 이르렀고 웃음만이 살길이라는 생각을 했다고 했다. 흥도 있고 낭만도 알고 여행도 좋아하는 그 친구가 좋다.


필순이는 나중에 딸을 낳으면 꼭 유럽여행을 함께 가는 게 소원이라고 했다. 이탈리아, 프랑스, 스위스는 꼭 가보고 싶다고 했다.


백수광부 : 내 느낌에는 2024년 가을이 오기 전에 다녀올 수 있을 것 같은데?

필순 : 2024년? 그때까지 살아있을까?


백수광부 : 그때도 우린 젊어. 우리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자.

필순 : 다리에 힘만 있다면  그때라도 꼭 가보고 싶다.  






유곤이는 우리 과에서 제일 잘 생겼다. 덜 떨어진 계집애들이 자꾸 내가 유곤이랑 친하다는 이유로 소개해달라고 들들 볶는다. 그러면 나는 유곤이는 필순이만 좋아한다고 선을 딱 그어 주었다. 왠지 나는 둘이 사귀고 결혼까지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이도 많이 낳고 말이다.


유곤이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당에 다녔다고 했다. 서당 출신이라 그런지 한자를 많이 알고 있었다. 글씨가 아주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다. 중요한 문서작성을 할 때나 편지 봉투에 이름을 쓸 때면 그에게 종이와 펜을 내밀었다. 심지어 교수님들도 결혼식이나 상갓집에 갈 때 봉투에 이름 쓰는 걸 맡겼다. 모나미 최저가 볼펜으로도 저런 글씨체가 나올 수 있는지 놀라웠다. 그래서 나는 유곤이 이름이 새겨진 고급펜을 생일 선물로 주었다. 잘 쓰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유곤이는 남자애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았다. 심심하면 친구들이 술 마시자며 그를 불러냈다. 술과 그림(동양화), 유머를 즐기는 풍류가였다. 그는 이름부터 남달랐다. 필순이와 대비되는 느낌이다. 버들, 유(柳) 땅, 곤(坤)이란다. 곤은 돌림자라 별개로 치더라도 버드나무 흩날리는 모습이 연상된다. 자유로운 유곤이랑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백수광부 : 너 술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야? 나중에 마누라가 잔소리 좀 하겠네.

유곤 : 술 마셔도 이해하는 마누라 만나야지.


백수광부 : 그런 마누라가 어디 있냐?

유곤 : 왠지 너처럼 술에 관대한 여자가 있을 것 같은데?


백수광부 : 그러게. 우리 엄마도 가끔 나한테 술 권해. 고기 먹을 때 소화 잘 되라고. 꼭 그런 여자 만나.

유곤 : 우리 필순이 불러서 막걸리나 한잔 하자.


산 아래 평상에 둘러앉아, 휘날리는 버드나무를 쳐다보며 파전에 막걸리 한 사발씩 하는 상상에 빠져본다. 우리 셋이서.


아, 왜 이리 행복하지?







부모와 친구가 되는 상상을 해보니 아주 흥미롭다. 갑자기 부모님 예전 사진을 뒤져 보았다. 일평생 서로 다정다감이란 없었던 그들이었는데, 이런 사진이 있었다니 놀랍다.  아마 신혼여행 때인 것 같다. 중매결혼이었는데 찰나만 담아내는 사진이니까 친해 보인다. ^^



내 머릿속에 저 흑백사진은 화려한 2024년대 컬러 사진으로 인화되었다. 


시대를 잘 타고났다면 우리 부모님도 지금 젊은이들처럼 마음껏 즐겼을까?      


왜 이리 눈물 나게 짠하지?





p.s) 훗날(2024년 여름), 필순이의 꿈은 백수광부의 동생들에 의해 실현되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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