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세청이 보내준 '효도 청구서'

연말정산 화면 속, 숫자 뒤에 숨은 엄마의 일 년

by 야옹이

1. 클릭 한 번에 펼쳐진 낯선 풍경


1월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연말정산 시즌. 올해도 어제 회사 메일함에 안내 메일이 떴다. "2025년 귀속 연말정산 간소화 자료 확인 바랍니다." 늘 하던 대로 홈택스에 접속했다. 공동인증서 로그인, 부양가족 자료 제공 동의 체크, 의료비 항목 클릭. 손에 익은 루틴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모니터를 가득 채운 엑셀 시트 같은 화면 속에서, 내 눈은 한 곳에 멈춰 섰다.


어머니 명의로 찍힌 의료비 내역들.

스크롤을 내릴 때마다 끝없이 이어지는 진료비, 수술비, 약제비 항목들이 화면을 채웠다.

...

8월 25일, ○○대학병원, 정형외과, 450,000원
9월 22일, ○○대학병원, 수술비, 3,200,000원
10월 5일, ○○정형외과, 물리치료, 85,000원
10월 12일, ○○정형외과, 물리치료, 85,000원
...

차갑고 건조한 파란색 숫자들이 줄을 지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숫자 하나하나가 작은 바늘처럼 가슴을 찔러왔다. 나는 무심코 마우스 휠을 계속 돌렸다. 8월, 9월, 10월... 항목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2. 숫자가 말하지 못하는 것들


작년 2월, 어머니는 예상치 못한 사고를 당하셨다. 빙판길에 미끄러지시며 손목과 무릎을 심하게 다치셨고, 곧바로 수술대에 오르셨다. 수술은 성공적이었지만, 그 후유증은 생각보다 길고 깊었다. 석 달 넘게 이어진 물리치료, 주 3회씩 병원을 오가는 일상, 밤마다 욱신거리는 통증을 견디는 시간들.

그때 나는 뭘 했던가.

"엄마, 많이 아파? 병원 잘 다녀와."
"치료 잘 받아. 내가 주말에 갈게."
"돈은 걱정 마. 내가 다 해결할게."

전화 너머로 건넨 이런 말들이 전부였다. 실제로 병원에 함께 간 날은 손에 꼽을 정도였고, 어머니가 얼마나 힘들어하셨는지, 하루하루가 어떻게 흘러갔는지 나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아니, 알려고 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회사 일이 바쁘다는 핑계, 주말에 좀 쉬어야 한다는 변명 뒤에 나는 편안하게 숨어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 연말정산 화면 속 숫자들은 내가 외면했던 시간들을 너무나 정직하게 증언하고 있었다.

85,000원이라는 물리치료비 하나는 단순한 금액이 아니었다. 그것은 어머니가 홀로 택시를 타고 병원까지 가신 거리였고, 치료실 침대 위에서 묵묵히 참아내신 통증의 무게였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서 저녁 늦게 돌아오시던 그 시간들, 나는 사무실에서 커피를 마시며 SNS를 스크롤하고 있었을 것이다.


3. 비교하고 싶지 않았던 두 개의 숫자


연말정산 화면을 계속 내리다 보니, 내 신용카드 사용 내역과 어머니 의료비 내역이 나란히 놓였다. 국세청 시스템은 참 냉정하게도 이 둘을 한 화면에 정렬해 보여줬다.


나의 지난 1년:

스타벅스, 127회 방문, 약 635,000원

온라인 쇼핑몰, 의류 구매 24건, 약 1,840,000원

OTT 구독료, 연간 198,000원

배달음식, 월 평균 8회, 연간 약 1,920,000원


어머니의 지난 1년:

수술비 및 입원비, 3,680,000원

통원치료비(8~12월), 2,210,000원

약제비 및 보조기구, 840,000원

합계: 6,730,000원


나는 한 해 동안 별생각 없이 카드를 긁었다. 출근길 커피 한 잔(5,600원)은 당연한 일상이었고, 스트레스 받을 때마다 클릭했던 온라인 쇼핑은 작은 위안이었다. 금요일 저녁 치킨 한 마리(23,000원)는 한 주를 견딘 나를 위한 작은 선물이었다.


그런데 이 모든 소비를 합쳐도 어머니의 의료비에는 한참 못 미쳤다. 아니, 액수의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내 작은 즐거움을 위해 기꺼이 지갑을 열었지만, 어머니의 고통 앞에서는 얼마나 인색했던가. 병원에 함께 가는 하루가 아까워 "일이 있어서"라고 둘러댔고, 치료 후 회복식을 챙겨드리는 대신 "배달시켜 드세요"라며 계좌이체로 책임을 면했다.


675만 원.


이 숫자는 어머니가 홀로 감당하신 아픔의 총량이었고, 동시에 내가 외면했던 시간의 무게였다.



4. 화면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숫자들을 하나씩 훑어 내려가는데, 이상하게도 각각의 항목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8월 22일 수술 날, 네가 와준다고 했었는데 갑자기 회의가 잡혔다고 하더라. 괜찮아, 혼자서도 할 수 있어. 엄마가 뭐 애기도 아니고."

전화 속 어머니는 그렇게 말씀하셨다.

목소리는 밝았지만, 수화기 너머로 묻어나오는 외로움을 나는 애써 모른 척했다.

'수술은 의사가 하는 거니까 내가 꼭 있어야 할 이유는 없어.'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9월 17일, 물리치료 받고 나오는데 다리에 힘이 하나도 없더라. 그날따라 택시도 안 잡히고... 버스 정류장까지 한참을 걸었어. 근데 버스 안에서 자리도 안 비켜주더라, 요즘 젊은 사람들은."


어머니는 이 이야기를 웃으며 하셨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그날 어머니가 얼마나 힘드셨을지. 60대 중반의 몸으로, 수술한 몸을 이끌고, 버스 손잡이를 붙잡고 서서 집까지 오셨을 그 30분이 얼마나 길었을지.


어머니는 늘 그러셨다. 당신의 고통은 축소하고, 나의 부담은 덜어주려 애쓰셨다.


"나는 괜찮아" 라는 말로 모든 대화를 마무리하셨다.


그리고 나는 그 말을 너무 쉽게 믿어버렸다. 정말로 괜찮으신 줄 알았다기보다는, 괜찮기를 바랐던 것이리라.



5. 국세청이 아닌, 하늘이 보낸 청구서


모니터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연말정산 서류는 단순한 세무 서류가 아니라, 누군가 나에게 보낸 메시지가 아닐까.

국세청이 작성한 공문서지만, 마치 하늘이 나에게 보낸 일종의 '청구서' 같았다.

돈을 내라는 게 아니라, 관심을 내라는. 시간을 내라는. 사랑을 미루지 말라는.

'효도 청구서'였다.


청구 항목: 지난 1년간 외면했던 시간들
청구 금액: 따뜻한 관심, 함께하는 시간, 진심 어린 대화
납부 기한: 지금 당장
연체 시 불이익: 영원히 갚을 수 없는 후회


우리는 늘 '나중에'라는 단어로 미룬다. 나중에 시간 나면 여행 가자고, 나중에 여유 생기면 더 잘해드리겠다고, 나중에 돈 더 벌면 큰집 사드리겠다고.

하지만 '나중'은 온다는 보장이 없다.

어머니의 의료비 내역을 보며 깨달았다. 부모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조금씩 늙어가고 계신다는 것을. 건강은 어느 날 갑자기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내가 '나중에'를 외치는 사이, 정작 중요한 시간들은 모래처럼 빠져나가고 있다는 것을.



6. 숫자 너머의 시간을 보다


화면을 끄고 책상에 앉아 한참을 생각했다.

675만 원이라는 금액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나는 그 돈을 낼 능력이 있다. 문제는 그 숫자 뒤에 숨겨진, 어머니가 홀로 견뎌내신 365일의 무게를 나는 너무 가볍게 여겼다는 것이다.

3월의 수술 날, 병원 복도 긴 의자에 홀로 앉아 계셨을 어머니.
5월의 물리치료실,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말없이 통증을 참으셨을 어머니.
7월의 약국, 두툼한 약봉지를 들고 터벅터벅 집으로 향하셨을 어머니.

이 모든 장면에 나는 없었다.

물론 나도 바빴다. 회사 프로젝트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야근은 일상이었다. 주말에도 업무 연락이 왔다. 하지만 정말 그게 전부였을까. 솔직히 말하면, 나는 불편함을 피하고 싶었던 것 같다. 병원 특유의 소독약 냄새, 아픈 사람들로 가득한 대기실의 무거운 공기, 어머니의 고통을 직접 마주해야 하는 그 시간들이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나는 돈으로 해결하려 했다. 병원비 계좌이체, 영양제 택배 발송, 가끔 돈 봉투 전달. 그게 효도의 전부인 줄 착각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진짜 원하셨던 건, 아마도 그저 옆에 있어주는 것이었을 테다. 진료실 밖에서 함께 기다려주는 것, 치료 끝나고 함께 밥 한 끼 먹는 것, "오늘은 좀 어때?"라고 물어봐 주는 것.



7. 오늘, 지금, 당장


연말정산 서류를 출력하고 파일로 저장했다. 환급받을 금액도 확인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숫자가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 한구석이 무거웠다.

나는 휴대폰을 들었다.

"엄마, 나야."
"응, 무슨 일이야?"
"아니, 그냥... 저녁 먹었어?"
"먹었지, 너는?"
"아직. 엄마, 오늘 저녁에 갈게."
"갑자기 왜? 무슨 일 있어?"
"아니, 그냥 엄마 보고 싶어서. 엄마가 좋아하는 미역국 끓여줄게."

전화기 너머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금 떨리는, 하지만 분명히 기쁜 목소리였다.

"그래, 그럼 엄마가 반찬 좀 준비해놓을게."

전화를 끊고 가방을 챙겼다. 퇴근 후 마트에 들러 미역과 소고기를 샀다.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배도 한 박스 샀다. 택시를 타고 실리콘 고무장갑도 하나 샀다. 어머니 손목이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으셨으니, 설거지할 때 편하실 것 같아서다.

실천 목록을 적었다:

이번 주말, 어머니와 함께 정형외과 정기검진 가기

매주 목요일 저녁, 전화가 아닌 영상통화로 얼굴 보며 이야기하기

다음 달, 어머니가 드시고 싶어 하셨던 음식 사드리기

평일 저녁에도 가끔 들러서 함께 저녁 먹기

'나중에'라는 말 대신 '이번 주에'라는 말 쓰기


거창한 효도는 아닐지 몰라도, 적어도 더는 미루지 않는 사랑을 하고 싶었다.



8. 마지막 숫자가 찍히기 전에


며칠 뒤, 회사 후배가 물었다.

"형, 연말정산 하셨어요? 환급 많이 받으세요?"
"응, 그런데 말이야..."

나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이렇게 덧붙였다.


"올해는 환급금보다 더 큰 걸 받았어. 일종의 경고장이랄까. 아니, 기회일지도 모르겠다."


후배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그저 내 연말정산 화면 속 숫자들이 내게 준 선물을 혼자 곱씹었다.

부모님이 건강하실 때, 걸을 수 있을 때, 말할 수 있을 때, 웃을 수 있을 때. 그때가 바로 '지금'이다. 나중은 영영 오지 않을 수도 있다.

연말정산 서류는 매년 온다. 하지만 어머니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 그 시간이 언제 마지막 숫자를 찍을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나는, 오늘도 어머니께 전화를 건다.


"엄마, 오늘 뭐 했어?"

별것 아닌 질문 같지만, 이제는 안다.

이 작은 관심 하나하나가 쌓여서, 언젠가 찾아올 마지막 순간에 후회 대신 감사를 남길 것이라는 걸.

국세청이 보내준 효도 청구서.
나는 이제, 그 청구서에 응답하기로 했다.
연체되기 전에, 지금 당장.

"부모님이 살아계신 동안은, 매일이 연말정산이다.
사랑을 계산하고, 관심을 정산하고, 시간을 환급받을 수 없는 그날이 오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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