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가 더 많아지면 의미는 점점 더 작아진다
어젯밤에도 잠들지 못했다. 침대에 누워 의미 없는 스크롤을 멈추지 못했다. 눈은 뻑뻑한데 손가락만 화면을 쓸어 올렸다. 마치 다음 페이지에 뭔가 대단한 게 나올 것처럼.
나는 그 어느 세대보다 많은 정보를 손에 쥐고 산다.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한 물건들에 둘러싸여 있다. 배달 앱 하나면 세상의 모든 음식이 문 앞에 도착하고, 쇼핑 앱 하나면 지구 반대편의 물건도 이틀 안에 받아볼 수 있다.
그런데 화면을 끄는 순간, 이 선명한 허기는 도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프랑스의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일찍이 이렇게 말했다. "정보가 더 많아지면 의미는 점점 더 작아진다." 그의 말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핸드폰을 다시 켰다. 또다시 무언가를 검색하면서.
정보가 지혜로 가는 징검다리였던 시절이 있었다. 책 한 권을 구하기 위해 도서관을 찾아가고, 한 편의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 앞에 줄을 섰던 시절. 정보는 귀했고, 그래서 소중했다.
지금은 다르다. 정보는 폭포처럼 쏟아진다. 아니, 폭포보다 더 거세다. 쓰나미처럼 밀려온다. 나는 그 파도 속에서 뭔가를 건져 올리려 발버둥 치지만, 손에 남는 건 거품뿐이다.
15초짜리 영상이 지나가고, 자극적인 제목의 뉴스가 스쳐 간다. 누군가의 화려한 일상이 지나가고, 또 다른 누군가의 성공담이 흘러간다. 나는 계속 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파도가 너무 높으면 그 속에 담긴 진심을 읽어낼 겨를이 없다. 우리는 더 많이 보고 있지만, 어쩌면 더 적게 이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정보가 많아질수록 의미는 옅어지고, 결국 투명하게 증발해 버린다.
보드리야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는 "정보의 과잉 속에서 의미의 기근"을 겪고 있는 것이다.
어제 나는 새 신발을 샀다. 필요해서가 아니었다. 멀쩡한 신발이 이미 세 켤레나 있었다. 그런데도 장바구니에 담았다. 결제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배송 알림을 기다렸다.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할 때를 떠올려 본다. 나는 정말 그 커피가 마시고 싶어서 샀을까. 아니면 그 브랜드의 컵을 들고 있는 '나'를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컵에 새겨진 로고, 그 로고가 만들어내는 이미지. "나는 이런 취향을 가진 사람이야"라고 말하는 조용한 외침.
SNS에 올린 세련된 공간의 사진도 마찬가지다. 그 순간이 좋아서가 아니라, 그 순간을 '좋아 보이게' 만들고 싶어서. 음식 사진을 찍느라 식은 파스타를 먹고, 완벽한 각도를 찾느라 풍경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보드리야르는 그의 책 『소비사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물건을 사는 이유는 그 물건의 쓸모 때문이 아니라고. 우리는 '기호'를 산다고. 나를 증명할 상징, 나를 정의할 이미지를 산다고.
그 말이 맞다. 내가 산 신발은 신발이 아니었다. 그건 "나는 트렌드를 아는 사람"이라는 기호였다. 내가 마신 커피는 커피가 아니었다. 그건 "나는 여유로운 일상을 사는 사람"이라는 기호였다.
그런데 이상하다. 뭔가를 사고, 찍고, 올릴수록 '진짜 나'는 점점 희미해진다. 사물은 넘쳐나는데, 그 사물과 맺는 진정한 유대감은 사라진다.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다고 믿지만, 마음 한구석엔 늘 빈곤이 자리한다.
거울을 볼 때마다 이상한 기분이 든다. 거울 속 내 얼굴보다 핸드폰 속 보정된 내 얼굴이 더 익숙하다. 어느 게 진짜일까. 거울 속의 나일까, 아니면 필터를 거친 나일까.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음악을 듣는다.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영상을 본다.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물건을 산다. 그러다 문득 궁금해진다. 이게 내가 진짜 좋아하는 건가, 아니면 알고리즘이 좋아하라고 학습시킨 건가.
보드리야르는 이런 상태를 '시뮬라크르'라고 불렀다. 원본 없는 복제. 실재보다 더 실재 같은 가짜. 우리는 지금 진짜와 가짜의 경계가 무너진 세상에 살고 있다.
진짜보다 더 화려하게 꾸며진 '하이퍼리얼리티', 초실재의 세상. 여기서는 모든 것이 과장되고, 증폭되고, 완벽하게 편집된다. 여행지의 사진은 실제 여행지보다 아름답고, 맛집 영상 속 음식은 실제 음식보다 맛있어 보인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이미지에 익숙해진다. 실제를 만났을 때 오히려 실망한다. "사진이 더 예뻤는데." "영상이 더 맛있어 보였는데."
우리의 감정마저도 복제된 것은 아닐까. 남들이 느끼는 행복을 따라 하고, 유행하는 슬픔을 전시한다. 누군가 "힐링"이라고 하면 따라서 힐링하고, 누군가 "감동"이라고 하면 따라서 감동한다. 내가 진짜 느낀 감정인지, 아니면 느껴야 한다고 학습받은 감정인지 점점 모호해진다.
지난주, 나는 오랜만에 오프라인 서점에 갔다. 특별한 목적 없이, 그냥. 책장 사이를 걷다가 우연히 한 권의 책을 집어 들었다. 알고리즘이 추천한 책도 아니고, 베스트셀러 목록에 있던 책도 아니었다. 그냥 표지가 마음에 들어서.
첫 페이지를 펼쳤다. 그리고 읽었다. 한참을. 아무도 내게 '좋아요'를 누르지 않는 그 시간이 이상하게 편안했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독서가 아니라, 오직 나를 위한 독서. 그렇게 한 시간쯤 흘렀을까. 밖이 어두워져 있었다.
그날 밤, 나는 그 책을 샀다.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워 또 읽었다. 핸드폰은 멀리 두었다. 알림도 꺼두었다. 그저 책장을 넘겼다.
이상했다. 아무것도 '소비'하지 않았는데, 뭔가로 가득 찬 기분이었다.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는데, 만족스러웠다.
보드리야르가 그려낸 세상은 차갑다. 의미가 증발하고, 진짜가 사라지고, 우리는 기호만 주고받는 세상. 그의 진단은 냉소적이다. 하지만 그 끝에서 나는 이 질문을 건진다.
"이 모든 소음과 화려한 껍데기를 걷어내고 남는 건 뭘까?"
어쩌면 답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는지도 모른다. 쏟아지는 정보의 파도를 잠시 멈추고 내 곁의 누군가와 눈을 맞추는 일. 화려한 기호가 아니라, 투박하더라도 내 손길이 닿은 물건의 온기를 느껴보는 일.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고 바람을 맞는 일. 아무 생각 없이 산책하며 길고양이를 마주치는 일. 친구와 통화하며 아무 의미 없는 농담에 웃는 일. 그 어떤 필터도, 보정도, 알고리즘도 개입하지 않은 순간들.
의미는 검색창에 없다. 추천 알고리즘에도 없다. 오직 당신의 고요한 사유 속에만 있다. 타인이 편집해 놓은 세상이 아니라, 당신의 호흡으로 채워진 시간 속에만 있다.
오늘도 나는 핸드폰을 집어 든다. 그리고 스크롤을 시작한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내가 찾는 건 여기 없다는 걸. 내가 채워야 할 허기는 정보로 채워지지 않는다는 걸.
그래서 오늘은 조금 일찍 화면을 끈다. 그리고 창밖을 본다. 하늘이 보인다. 구름이 천천히 흘러간다. 아무 의미도 없지만, 그래서 오히려 의미 있는 순간.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보면서, 정작 중요한 것은 보지 못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너무 많은 것을 가지면서, 정작 소중한 것은 잃어버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클릭할수록 텅 비는 이유. 어쩌면 우리가 채우려는 방법 자체가 잘못된 건 아닐까.
잠시 멈춰 서서, 고요 속에서 당신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보는 건 어떨까. 그 목소리는 당신이 생각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듣고 싶어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 Note
이 글을 쓰면서 나는 열두 번쯤 핸드폰을 확인했다. 알림이 왔는지, 누가 메시지를 보냈는지. 아이러니하다. 정보 과잉에 대해 쓰면서도, 나는 여전히 정보를 갈구하고 있었다.
보드리야르의 세계는 우울하다. 하지만 그의 진단을 읽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한 발짝 물러나 우리 자신을 바라볼 수 있다. 그리고 그 한 발짝이, 어쩌면 시작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