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럭키 벗러키 데이

나의 구멍난 양말을 꿰매어주는 낯설고도 다정한 세계에서

by 강하라



"세상에 공항 가면서 여권을 안 챙기는 사람이 어딨어?"


내 인생의 예고편은 하이투웬티 청춘 성장물. 허나 까보니 보는 사람 혈압 오르게 만드는 B급 재난 영화였달까. '갓생' 살아보겠다고 아침부터 밤까지 비장하게 계획표를 짜놓고는, 정작 입장권은 홀라당 까먹어버리는 '헐랭함'이란. 뇌세포의 절반이 도파민에 절여져 기능을 단단히 상실한 게 분명하다.


사건의 발단은 새벽 한 시였다. 오피스텔의 소음이 바닥으로 침전하고, 냉장고 모터 돌아가는 소리만이 웅웅거리는 시간. 출국을 코앞에 둔 나는 침대라는 도넛 튜브 위에 떠서 면세점 어플이라는 망망대해를 부유하고 있었다. 어떤 걸 사야 현명한 소비일까? 면세점에서 꼭 사야할 베스트 탑텐! 따위의 게시물을 읽어 내리면서 후회하지 않게 만반의 준비를 다했다.


작년 치앙마이의 습한 벼룩시장에서 땀을 비 오듯 흘리며 양말 따위를 찾아 헤매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번엔 절대 궁상을 떨지 않으리라. 면세점 가입하면 주는 쿠폰까지 알뜰하게 챙겨 흰 양말 8개 묶음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갈아신을 수 있는 여분의 양말들이 내 인생의 구멍을 막아줄 수 있을 것처럼.


‘여권 번호를 입력하세요.’


그 네모난 빈칸에 자연스럽게 손이 움직였다. 갤러리 속 여권 사진을 찾아 습관적으로 숫자를 옮겨 적으려던 손가락이 허공에서 멈췄다. 불길한 예감은 흰 셔츠에 튀어버린 짬뽕 국물처럼 빠르고 정확하게날아왔다.


‘잠깐, 실물 여권은 어디에 있지?’

등골을 타고 흐르는 서늘함이 발끝까지 닿았다. “여권이 없어.” 중얼거리자마자 윗층에서 동생이 나의 귀여운 애착 비모 캐리어를 뒤지는 소리가 직― 하고 고막을 긁었다. “뭐야, 니 미쳤냐?”라는 소리가 들리는 순간 나는 재빠르게 복층의 계단을 두 칸씩 건너뛰고 캐리어 속 온갖 지퍼를 열어보았다. 그 안에는 친구들이 크리스마스와 연말을 대비해 미리 써준 엽서들뿐이었다. 혀를 차는 소리. 그제야 울상 짓는 나.


150km 밖, 본가의 책상 서랍 안에 주인을 잃고 덩그러니 놓여 있을 초록색 수첩이 고화질 VR 영상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고작 양말 몇 켤레, 그 몇 천 원의 가성비에 영혼을 파느라 정작 나를 국경 밖으로 데려다줄 유일한 신분증을 유기해 둔 나. 아니다, 양말을 생각하지 못했더라면 여권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에게 여권이란 당연히 집 나간 반 걸음의 보폭을 두고 나를 졸졸 따라오는 유령 영혼과 다름없었으니까. 나사 하나가 헐렁이는 채 출고된 불량품 같은 나. 그런 디폴트값이 기어이 발목을 잡는 구나.


새벽 두 시. 신호 연결음이 영원처럼 늘어지던 끝에 들려온 엄마의 목소리는 물에 젖은 솜처럼 잠겨 있었다. “어쩐지. 신춘문예 당선됐다고 붕 떠 있을 때부터 불안하더라니.”엄마의 한숨이 수화기를 넘어 내 귀 옆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엄마는 나보다 더 마른 입술을 하고 내 걱정을 떠안았다.


엄마의 작전은 ‘인상 좋은 여성 분께 부탁하기’였다. “내일 공항 버스가 4시라고? 그럼 여기 터미널에서 11시 반까진 여권 태워 보낼게.”


어이어이 믿고있었다구-! 왠지 엄마라면 다 해결해줄 것 같았다. 엄마는 내 인생에서 발생하는 온갖 '시스템 오류'를 수정해 주는 나만의 개발자니까. 엄마의 침착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의 어떤 잔소리도 그다지 크리티컬한 타격을 선사할 수 없었고, 오히려 모든 일이 해결될 것 같은 낙관에 마음이 편해졌다. 나란 놈은 엄마와 아무리 멀리 떨어진 곳에 있어도 영원히 정신적으로 독립할 수 없는 캥거루 마마걸이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막상 부모님이 도착한 터미널의 형광등 불빛은 창백하고 건조했다. 김영하 소설가가 묘사하는 전형적인 한국처럼. 엄마가 마주한 버스 기사의 눈빛에선 계산기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권이라고요? 그럼 엄청 중요한 거네. 만 원 더, 아니 이만 원은 더 줘야지.” 그런 흥정에 엄마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았으니까 빨리 출발해주세요.” 타인의 절박함이 누군가에게는 ‘급행료’가 되는 순간. 자본의 논리가 언제나 앞서는 당연하고도 비정한 풍경 앞에서, 엄마는 토스 송금 어플을 켰다. 기사의 등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히든 퀘스트를 건네주는 NPC처럼 틈입했다.


“아니, 듣자 듣자 하니 너무한 거 아닌가요? 주세요. 제가 가져다줄게요.”


그는 다섯 살배기 아들과 인천공항으로 ‘비행기 구경’을 가려던 참이라고 했다. 졸지에 내 여권의 운반자가 된 그는, 엄마를 안심시키려 아이 사진을 보여주고는 씩씩하게 버스 계단을 올랐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그 역시 급한 마음에 표를 잘못 끊어 기사에게 핀잔을 듣는, 본인의 발등에도 불이 떨어진 사람이었다. 생면부지의 타인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불편을 감수하며 굽신거렸을 사람. 헐랭한 사람이 헐랭한 사람을 구원하는 법칙. 타인을 돕는다는 것은, 넘치는 여유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나의 결핍을 쪼개어 상대의 구멍을 메워주는 일이라는 것이 아닐까. 죄책감과 고마움이 뜨거운 덩어리가 되어 아래서부터 울컥 차올랐다.


너무 감동이야ㅜㅜ

이런 문장으로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내가 바보같았다.


오후 1시, 공항에 도착한 나는 캐리어 두 개가 담긴 카트를 끌고 왔다갔다 정신없이 방황했다. 그는 실시간으로 위치를 공유하며 나를 진정시켰다. 나는 그가 아들과 방문한다는 라운지로 미리 향하려 했다.


[나] 제가 먼저 그곳에 가서 메뉴판 찍어드릴 테니 음료랑 디저트랑 원하시는 거 다 주문해주세요.

[여권 공항 천사 선생님]: 괜찮아요. 아들이 배고프다고 해서 밥부터 먹을 것 같아요.

[나] 그럼 혹시 여기는 어떠세요? 안내 스크린에 담긴 모든 음식점 로고가 담긴 사진과 함께, 제발 제가 밥이라도 사드리게 해주세요ㅠㅠ


눈물과 싹싹 비는 이모티콘의 남발. 하지만 그는 단호했다. "아니요. 그럴 시간 없어요. 인생의 변수는 하루에 하나만 합시다.“ 그는 오직 나의 '무사한 출발'만을 바랐다. 나의 부탁과 그의 철벽이 펜싱 대회 속 칼날처럼 맞부딪히면서 튕겨나가길 반복했다.


[여권 공항 천사 선생님]: 저는 그냥 아저씨라 다 똑같이 생겼고, 노란 모자 기억하세요. 그리고 여권 받고 바로 튀세요! 여행 가서 이쁜 사진이나 한 장 보내주시면 됩니다. 그게 쿨거래니까.


2시 58분. 제1터미널의 출국장은 거대한 물살처럼 흐르는 인파로 어지러웠다. 그 혼란스러운 풍경 속에서, 그가 묘사했던 ‘노란 모자’가 눈에 들어왔다. 마치 회색 도화지 위에 노란 물감이 봄으로 번져 밀려드는 것 같았다. 저 멀리 꼬마가 아빠의 손을 잡고 나타났다. 아이의 작은 손에 들린 여권 봉투가 깃발처럼 펄럭였다. 그것은 지구라는 행성에서 쏘아 올린 가장 귀여운 구조 신호 같았다.


나는 순간적으로 달려가 그 작은 아이를 으스러져라 안았다. 공항의 차가운 공기 사이로 아이 특유의 따뜻한 우유 냄새가 훅 끼쳐왔다. “고마워 진짜 고마워 너 꼭 행복해야 해.” 눈을 맞추며 내 마음이 전해지길, 아이의 앞날에 비칠 행운을 그 어떤 사람들보다 절실히 기도했다. 감사합니다! 백번 남발하며 수화물 접수대로 카트를 끌고 날아갔다. 뒤돌아보니 사라진 그에게 미리 준비해둔 기프트콘을 전송하고 또다시 비행기를 타기 위해 질주했다.


매번 여유롭게 준비해도 달리고, 달리고, 아슬아슬하지만 어찌저찌 일이 해결되는 도파민 가득한 하루하루다. 달리기만 시키면 꺄르르 웃어서 걱정이라는 아역배우들처럼 나는 어쩐지 홀가분한 기분에 지난 과오는 잊고 갑자기 행복해졌다. 오늘도 아슬아슬하게 세이프- (찡긋)


그리고 그는 마지막까지 나를 희극의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려 애썼다. 비행기가 이륙을 준비할 때 엄마에게서 캡처 사진 한 장이 와 있었다. 사진 속에는 공항의 거대한 통유리창에 매미처럼 딱 붙어 활주로를 내려다보는 꼬마의 조그만 뒷모습이 담겨 있었다.


[여권 공항 천사 선생님]:“이 수많은 진에어 중 하나겠네요^^”

[엄마]: ㅎㅎ우리 애 진에어 탄대요?

[여권 공항 천사 선생님]: "네 ㅎ 손 흔드세요. 딱 저 비행기예요 ㅋㅋㅋㅋ“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낯선 아저씨와 노란 모자 꼬마가 창가에 서서 내가 탄 비행기를 향해 손을 흔드는 풍경. 우리는 서로 알지 못하지만, 서로의 안녕을 비는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 다정함이 비행기 엔진보다 더 강력한 힘으로 내 등을 떠밀어 하늘로 올려보내는 것만 같았다.


독립을 위해 한국을 떠난 나는 어쩐지 평생 이렇게 사랑으로 지지된 어떠한 끈에 묶여있을 것만 같았다. 언젠가 벼랑 끝에서 떨어질 때에도 이렇게 누군가 온 힘을 다해 끌어 올려줄 것만 같은 느낌. 누군가 자립을 홀로 서는 것이 아니라 여러 곳에 기대는 것이라고 말했던가. 그런 의미에서 나는 내가 이번 치앙마이 두달 살기에서 배워야할 것이 독립이 아닌 자립이 아닐까 생각했고, 그것에 대한 첫 관문을 지난 것 같았다.


도착한 치앙마이의 밤공기는 익숙하고 선선했다. 1년 전에 예약한 레지던시는 작년 월세의 반의 반값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친절한 경비원과 깨끗하고 넓은 방이라 마음에 쏙 들었다. 캐리어에서 짐을 풀고 샤워를 하고 나왔을 때 그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여권 공항 천사 선생님]: "저도 20년… 더 전에 치앙마이에서 일주일 살다 왔었어요. 치앙마이 초등학교에 벽화도 그려주고 왔는데 아직도 있으려는지 모르겠네요. (...) 아들도 집에 가서 어떤 누나가 칭찬해 줬다고 엄마한테 자랑하더라고요. 부디 좋은 여행 잘 되기를 바랍니다!! 혹시 책 나오면 알려주세요^^ 저도 동화를 쓰고 있답니다 ㅎ“


멍하니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았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런 게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이라면 언제까지나 눈물이 나고 싶었다. 20년 전, 이 도시의 어느 담벼락에 그림을 그리던 청년이 시간을 건너와 나의 구멍 쏙 뚫린 양말을 기워주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욕심부리던 기사님에게 기꺼이 악역을 자처하고 나선 그는, 정말로 본인이 쓰고 있다는 ‘동화’ 속 주인공처럼 내 앞에 나타났던 것이다.


신기하지. 삶은 가끔 개연성이라곤 1도 없는 막장 드라마 같다가도, 이런 순간에는 가장 완벽한 타이밍에 마침표를 찍어준다. 또 하나의 에피소드가 생겼다. 뮤지컬 <위키드>의 넘버 'For Good'이 귓가에 맴돌았다."Because I knew you, I have been changed for good." (너를 알게 된 덕분에, 내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어.)


사람은 자신의 힘만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알지 못하는 타인들의 선의에 빚지며 살아간다. 나는 구멍 난 양말 같은 불량품이지만, 세계는 언제나 반짇고리를 든 거인처럼 나를 수선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그 빚을 갚기 위해서라도 나는 어쩔 수 없이 좋은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


나의 불운이 당신이라는 동화를 만나 비로소 완성된 날. 나는 오늘, 평생을 갚아도 모자랄 예측 불가능하고도 다정한 행운을 선물 받았다. 그렇다면 다음에

나는 누구에게 바통터치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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