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버튼 하나만 눌러 보세요

오늘의 이야기는 어떤 맛일지 궁금하니까

by 강하라



나 자신이 거대한 자판기 같다고 생각했다. 전원 코드는 '호기심'이라는 콘센트에 꽂혀 있고, 내부에는 타인의 탐나는 재능과 작품들이 캔음료처럼 차곡차곡 쟁여져 있는, 아무 때나 버튼 하나만 누르면 요상하고 기괴한 무엇이라도 툭 뱉어내는 자판기 말이다. 가끔 포카리스웨트를 누르면 데자와가 나오고, 너구리를 끓이면 육개장 맛이 나는 식이지만, 단순히 뽑아내는 것 하나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질보다는 양. 마감 기한 하나는 끝내줄 정도로 잘 지키고, 마감이 없다 해도 계속 글을 써내는, 미련하고 우직해 보이는 정도로의 성실함을 갖추고 있는.


누군가가 내 영혼을 관통해 그대로 번역한 듯한 문장, 당장이라도 캡쳐하고 싶은 영화 속의 아름다운 미장센, 혹은 지나가는 할아버지의 발렌시아가틱한 옷차림까지. 나는 내 눈에 들어오는 것들을 미친 듯이 흡수했다. 남들은 그저 킬링 타임으로 보는 예능 프로그램을 봐도 왜 저 사람이 요즘 인기가 많을까? 저 사람의 어떤 면이 대중의 욕망을 자극한 걸까? 하면서 본능적으로 그 사람의 매력을 훔치려고 하고, 연출 스타일이나 자막의 배치나 플롯을 나도 모르게 분석하고 있었다. 오죽하면 동생이 언니는 무슨 예능 하나도 공부하냐고 말할 정도였다. 그렇다고 예능 피디가 될 것도 아닌데. 대체 왜?


언젠가의 내가 동전 투입구에 '영감'이라는 주화를 짤그랑 집어넣고 나면 신의 응답을 받듯 긴 시간이 지난 후의 내가 그것들이 엉키고 설키고 소화해 덜컹거리며 툭 뱉은 무언가를 받아들였다. 알 수 없는 포장지로 둘러 쌓인 그것의 뚜껑을 탁 들어올리고, 벌컥벌컥 마시면 머릿 속엔 전율이 일었다. 대체 이 맛은 뭐지? 나 혹시 천잰가? 그렇게 오랜만에 맛 볼 땐 매번 짜릿하다. 다만 기억에 남은 그 맛을 다시 찾기 위해 긴 시간이 또 흐른 뒤에 다시금 마셔보면 그냥 김빠진 인스턴트 콜라맛이었다. 아무도 사주지 않고, 들이키지 않을. 어딘가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채로 밍숭맹숭하고, 가끔은 떫고 달기만 한 그 맛.


언제나 내 창작의 원료는 언제나 타인의 작품을 향한 '좋아하는 마음'이었다. 그건 '질투하는 마음'이라고 읽어도 무방하다. 너무 좋아서 괜히 짜증내고 싶은 마음이랄까? 성애자들이 가끔 자신의 파트너에게 틱틱 거리고 시험하려 드는 것이 이해가 될 것도 같다. 좋아하면 질투가 나고, 가지고 싶고, 가질 수 없으면 미워지고. 사랑이 다 그런 거 아닌가? 이것도 하여간 사랑이랍시고 사랑을 연료로 돌아가는 이 자판기 역시나 참 변덕스럽다. 무엇인가에 푹 빠져버린 나날동안은 남들이 한 달 걸려 쓸 분량을 단숨에 써 내려가다가도, 영감이 다 떨어지면 며칠 밤낮을 한 문장도 뱉지 못한 채 '품절' 램프만 껌뻑거린다. 그런 내가 요즘 다시 ‘시’라는 음료를 뽑아보고 싶어졌다.


예전처럼 펄떡거리는 원색의 진술을 감정적으로 쏟아내는 시는 아니다. 그건 너무 뜨거워서 보기만해도 부담스럽고, 누구나 식은 눈빛으로 쳐다보게 될 테니까. 대신 누군가의 시를 읽고, 그가 말하지 않고 둔 빈 행간에 나의 문장을 끼워 넣는 방식으로 쓰는 시가 새로 재밌는 것 같다. 언젠가 이 시집이 까만 새벽 푸른 외계 신호를 보냈을 때 빛의 속도가 흐른 뒤 나의 답시를 보내는 것이다. 아마도 굴절로 인해 잔뜩 휘어지고 형체를 잃어버리겠지만 그 나름대로 매력이 있을 것이다. 이건 언젠가 양안다 시인이 말한 것처럼 내 첫 시집의 새로운 룰이 될지도 모른다. 우주를 빙글빙글 도는 미아같은 시들이 파일 한 켠에 가득 쌓여가고 있다.


물성 있는 남의 시집을 나만의 시작 노트로 만드는 것도 재밌다. 한권을 통으로 읽어내려가면서 볼펜으로 여기저기 질문도 하고 혼잣말을 덧붙인다. 수업 시간에 교과서 귀퉁이에 낙서를 잔뜩 하고 옆 친구에게 보여주듯이. 가끔은 여백이 많은 시의 페이지를 펼칠 때면 그 아래 내 일기를 쓸 때도 있다. 여행을 할 땐 시집을 꼭 챙겨가세요. 언젠가 나올 내 시집이면 더 좋고. 어딜 갈 때마다 시집 한 권만 가지고 다녀도 그 여행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스크랩북이 된다. 그렇게 애지중지 모은 나의 시간들이 하나로 완성 될 때 그냥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줘버리기도 한다. 어떤 사진도 남겨두지 않고.


나는 그렇게 남의 세계를 품고, 그로부터 과감하게 빠져나가고 싶어 발버둥친다.


위에서 언급한 방식의 시쓰기는 때로 편지같지만 꼭 그에게 전달될 필요는 없다는 점에서 편지는 아니다. 누군가 ‘비를 싫어하는’ 시를 썼다면, 나는 ‘함께 “비를 맞는’ 시를 쓰는 식이다. 이렇듯 남의 뜻을 잔뜩 오역해버리니까, 그것이 나만의 해석이니까. 그렇게 완성된 내 시는 그 사람에겐 전혀 가닿을 수 없고, 자신과 얽히는 맥락 조차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내가 해석한 그와 그의 마음이 함께 오늘 밤은 엇갈린 박자의 왈츠를 추는 것이다.


요즘 유행하는 시집들을 펼치면 마치 감방에 갇힌 독백들처럼 느껴진다고 친구는 말했다. 너무나 자신만의 세계가 내밀해서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것 같다고 말이다. 하지만 꾸역꾸역 문 틈에 작은 쪽지를 집어넣는 집요함이 있다면 그게 바로 시를 쓸 자격이 되는 것 같다. 그렇다면 나는 그 방의 문틈에 끼어있는, 언제 왔는지 모를 쪽지 한장이 되고 싶다. 언젠가 그런 시들이 살아움직이는 책으로 묶일 수 있을까? 상자 속에 비 맞은 채로 젖어있는 악성 재고가 아니라, 나무야 미안해, 말하게 되는 책이 아니라, 안에 누군가의 글씨로 빼곡히 적혀 선물로 전달되는 그런 책이 될 수 있을까? 만약 나도 다시 나만의 책을 가질 수 있게 된다면 누군가의 마음을 톡톡 건드리고, 어느 밤에 되돌아오는 해리포터 속 부엉이같았으면 좋겠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정말로 어엿한 시인이 되고 싶다. 내 영혼이, 내 시가 과거에 진흙창을 뒹굴고 있을 때 거기서 원석의 반짝임을 발견한 사람들에게 말해주어야 하니까. 나는 이제 '슬픔’과 '기쁨’을 슬픔과 기쁨으로 말하지 않는다고. 당신들이 바라던 그런 모습이 되었다고 시로 증명해 보여주고 싶으니까 말이다. 그러려면 무엇을 해야할까?


이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고통을 '그냥 힘들었다'며 뭉뚱그려 흐릿하게 지워버리고 싶진 않다. 대신 그때 내 상처의 테두리가 어떤 모양이었는지, 어린 내 마음을 할퀴고 간 칼날이 얼마나 날카로웠는지, 그것들을 깨진 유리조각이나 쇠붙이로 비유하는 대신 전혀 새로운 비유법을 발견해내고 싶다. 그리고 깨졌다가 다시 붙은 내 마음이 햇빛에 닿을 때 얼마나 영롱하게 반짝였는지, 그것이 어디로부터 왔는지 집요하게 묘사해보고 싶다.


내 생의 디테일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것을 넘어서 비슷한 흉터를 가진 타인을 살아움직이는, 입체적인 사랑스러운 무엇가로 재탄생시켜보고 싶다. 내 이야기 속에 나만 튀어나오지 않고, 다른 사람들 역시 나만큼 소중하고, 깜찍하고, 귀엽고, 아름답게 그려보고 싶다. 그러려면 소설을 배워야 하나... 괴상한 무엇이라도 좋으니 나는 계속 써보고 싶다. 그것들이 모여 비록 프랑켄슈타인이 된다해도... 계속 계속, 매일 매일, 하나씩, 쓰다보면 뭐라도 늘겠지. 그런 애도 말이라도 배우고, 걸음마라도 떼고, 벅벅 쓰다듬다보면 우리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될 수 있겠지. 못생겨도 귀여운 시! 못생겨도 귀엽고, 보다보니 애틋하고 정감이 가고, 그런 글을 쓰고 싶다.


그러니 오늘도 버튼을 누를 시간이다.

덜컹, 하고 떨어질 나의 다음 문장을 기다리면서


언젠가는 누군가 이 문장을 받아들고

자신의 문장으로 이어 써주길 바라면서


찰나 속았을 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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