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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별점 없는 세계의 영화들

5. 당신에게도 당신만의 필름이 있다면

by 구미래


“인생영화가 뭐예요?”라는 질문은 늘 곤란하다. 장르별 top3라면 모를까. 차라리 "너는 어떤 인간이야?"라는 물음에 답하는 것이 더 쉬울지도 모른다. 모든 영화가 나에게 뭔가를 줬지만, 그 어떤 영화도 나를 완벽히 대변하진 못했다. 나는 항상 무언가를 열렬히 좋아하는 부류와 그 존재를 모르는 부류의 중간 경계 어딘가에 머물렀다. 이 세계에 속한 듯, 동시에 바깥에 머무는 외계인처럼.


얼마 전, 구름 언니와 교환 독서를 하기로 했다. 언니는 공유 메모장에 ‘오직 나에게만 5점짜리인 책’ 리스트를 올렸고, 나도 에세이와 자기계발서 코너에 몇 권을 골라 적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하리만치 소설 카테고리는 올릴 수 있는 책이 없었다. 참 이상하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소설책인데. 내가 푹 빠져들었던 그 이야기들은 되돌아보니 어딘가 납작하고 허술해서 부끄러웠다. 한줄로 요약하자면 뻔한 사랑 이야기나 사람 이야기들. 내가 울고 웃었던 순간들은 한 발짝 떨어져 보니 그건 아주 상투적인 단어들로 요약이 됐다. 소설 속에서 느낀 고양감은 책을 덮는 순간, 증발되어버린 걸지도 모른다.


어쩌면 책을 추천한다는 건, 내 세계의 밑바닥을 내보여주는 일이기도 했다. 조심스레 그 마음을 언니에게 고백했더니, 언니도 똑같다고 말하며 웃었다. 그러니까 영화도 비슷한 것 같다. 영화나 소설은 결국 ‘체험’이니까. 실용성이나 재미, 메시지를 따지는 게 아니라, 그건 거의 ‘삶’에 가까운 무엇이니까. 누군가의 인생을 별점으로 평가할 수 없듯이.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누군가 나에게 “내가 좋아할 만한 영화 추천해줘!” 하면 나는 숨도 안쉬고 따발총처럼 내뱉는다. 인간AI 알고리즘 같다는 소리를 듣는 것도 은근히 즐거웠다. 하지만 가만히 돌아보면, 그건 나와 감도, 취향도, 정서도 맞는 사람들과만 나눠왔던 확신이었다.


나와 결이 맞는 친구들, 세계와 어딘가 불화하는 이들, 청춘, 낭만, 희망을 입에 달고 살며 터무니 없는 미래를 꿈꾸는 이들, 아티스트라기엔 늘 지망생에 가까웠고, 생존을 도모하기에 그릇이 너무 큰 사람들. 평범한 척하지만 아주 이상한 사람들, 어디론가 휙 떠나버려도 걱정이 되지 않고 그저 응원하게 되는, 이 세계의 유일무이한 캐릭터들. 그들을 생각하면 웃음이 터져나온다. 함께 있으면 어디로 튈지, 어떤 사건이 펼쳐질지 예측 불허하기 때문에.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가 역주행하기 전, 나는 그 영화를 몇몇 친구들에게 추천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들 모두가 인생 영화가 됐다고 했다. 우리는 "너와 나"도 사랑했고,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괴물'도 애틋해했으며, ‘썸머필름을 타고’를 지난 여름의 일부처럼 추억한다. '소년시절의 너'를 보고는 서로를 껴안아주고 싶어 했고, '블랙 위도우’가 받은 대우에 같이 분개했다. 그리고 늘, ‘델마와 루이스’의 질주를 꿈꿨다. 여름이 오면 우리는 ‘수박’을 다시 보았고, ‘불량공주 모모코’와 ‘릴리슈슈의 모든 것’을 따라하며 언젠가 이런 영화를 만들어보자고 다짐했다. 보통의 나는 이렇고, 나에게 보통인 친구들을 꿈꿨다. 아마 당신은 이 영화를 보지 않았더라도 사랑할 것이다.


어느 날, 인터넷에서 이런 우스갯소리를 본 적 있다.
“한국의 락 팬덤이란 비틀즈 팬 10명, 와싯 팬 10명, 블러 팬 10명, 핑크 플로이드, 롤링 스톤즈, 너바나, 아틱 몽키즈 팬 각각10명을 다 합쳐봐야 총 12명이다. 그리고 SF 팬덤 12명과 합치면 총 15명이 된다.”
우습지만 묘하게 찡했다. 나도 그 ‘15명’ 중 하나가 되었던 시절이 있었다. 영화제, 북페어, 내한공연, 복합 문화공간… 그 작은 동선 안에서 궤적이 겹치던 도하와는 절친한 친구가 됐다. 우리는 함께 ‘멋진 할머니가 되자’고 약속했다. “죽기엔 아까운 세상이지 않냐”며. “죽는 건 하나도 안 무서운데, 죽으면 새로 나올 콘텐츠들을 못 본다는 게 더 억울할 것 같다”며.


스타트랙 시리즈 광팬 친구를 보며, 해리포터를 ‘책으로’ 꼭 다시 보라고 조언하는 친구를 보며, 반지의 제왕을 실재하는 하나의 세계로 받아들이는 친구를 보며, 나는 문득 “세상엔 정말 볼 게 많구나”라는 생각으로 벅차올랐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삶의 리스트가 뚱뚱해졌다. 먼 미래에 사랑하게 될 무언가를 발견하고 지도에 별을 그리는 일은 짜릿한 모험의 시작이다. 추천받고, 추천하는 일. 그건 클라우드를 결제하는 것처럼 삶의 용량을 조금씩 확장시켜나가는 일이었다


우리 동네에 집순이 신기록으로 유명한 친구가 있었다. 이모들은 그 애를 방 밖으로 꺼내면 5만원씩 준다며 내기를 걸곤 했다. 하지만 그 애를 마주치는 일은 희귀 포켓몬을 만나는 일보다 드물었다. 그 애는 매일같이 방에서 마스카라를 올리고, 틴트를 바르고 있다. 또 어떤 날은 노란색, 또 어떤 날은 보라색과 핑크색 그라데이션으로 머리를 혼자 물들인다고 했다. 스스로 디자인한 그림으로 폰케이스를 만들고, 마켓을 열어 몇십만 원씩 용돈을 벌기도 했다. 이모가 파인애플 탕후루를 해준다던 날, 아랫 집에 놀러갔다가 나는 그 애의 판도라 상자를 열어버렸다. 기나긴 수다 여정에 물꼬가 트이던 날이었다. 나는 우리가 이렇게 될지 오래 전부터 예감해왔다. 내가 선을 자꾸자꾸 넘을 때마다 그 아이가 세계에 그어둔 선이 점점 넓어졌다.


그 애는 한 달에 한 번 우리집에 만화책을 배달해줬다. ‘언니, 지금 가도 돼?’ 라는 아이메세지를 받고 나먼 벨이 띵동 울렸다. 그는 활자중독, 컨텐츠 중독인 내게 신세계를 열어줬다. 아이돌 2차 창작만화부터 BL, GL, 인터넷에 서치되지 않는 희귀한 책들까지. 표지부터 투명한 포장지에 꼼꼼하게 쌓여있는 바람에 처음에는 펼쳐보기가 겁이 났다. 그래도 매달 정해지지 않은 날짜에 열리는, 어딘가 예감되지만 예측할 수 없는 그와의 이벤트는 늘 기다려졌다. 그는 우리 집에 오면 굉장히 불편한 기색으로 누구보다 편해했다. 항상 어딘가 애매한 자리에 털썩 앉았다. 막내 하나의 배를 벅벅 긁으면서 ‘이것만 주고 금방 갈 거야’라며 극구 소파자리를 거부했다. 우리는 식탁 근처 바닥이나 복도에 쭈그리고 앉아 해가 질 때까지 밀린 수다를 떨었다. 어느 날은 해가 다 지도록 안방 침대에 나란히 누워 BL 드라마 '사라진 첫사랑'을 정주행했다. 세상에... 어디 납치된 줄 알고 애를 찾으러 온 이모는 이 광경을 보고 기함을 했다.


어느날 그 애는 나에게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보러 가자고 했다. 그 애가 영화관에 가는 게 거의 십 년만이라는 이모는 감격하며 간식 가방을 바리바리 싸주었다. 우리는 선생님 몰래 과자 먹기 챌린지처럼 조용히 귤을 까 옆으로 돌렸다. 과자를 혀로 잽싸게 녹여먹면서 킥킥 소리 없이 웃었다. 냄새는 숨길 수 없어서 민망했다. 입 닫고 입 열기. 열심히 딴짓하기 바빴던 상영관에서 나오는 동안, 그 애는 갑자기 사과했다. “시간 낭비하게 해서 미안해”라고. 나는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그 순간 처음 알게 됐다. 누군가에게 “영화 보러 가자”는 말은, 그 이상의 무엇이구나. 영화 선택이라는 그 막중한 무게를 처음으로 느껴보게 되었다. 나는 과거에 얼마나 많은 실수를 해왔나, 반성하는 계기도 됐다. 나는 스물이 되자마자 중학교 동창 친구에게‘아가씨’를, 사회에서 만난 친구에게 ‘티탄’도 보러가자고 한 사람인데.


그 영화는 딱히 내 취향이 아니었지만, 무척이나 뜻깊게 봤다. 그리고 내가 별로인 작품을 아주 열심히 착즙하는 성향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영화가 재미없을수록 더 애정을 기울이고, 어떻게든 의미를 찾고, 오히려 더 즐기려 든다. 덕분에 블로그에 영화 해석 글을 올렸더니 하루 방문자 3천 명을 찍었다. 저품질이라고 생각했던 블로그가 서치되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그 네이버 블로그는 열심히 키웠는데 어느 날 해킹을 당했는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또 하나는, 영화의 OST가 한국어로 들리는 환청 덕에 음차 개사를 완벽하게 해낸 것이다. 그건 다음 작사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낼 과제가 되었다.


세상에 정말 망작이란 게 있을까? 망작도 다 이유가 있는 것 아닐까. 나는 혹평받는 영화들에 오히려 끌린다. 반골 기질 때문일 수도 있고, 그냥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욕망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망작’이라는 말에 담긴 모종의 낭만 때문이다. 나는 누가봐도 망작인 작품을 보면 그 영화 감독이 궁금해진다. 그 영화가 처음 태어날 때, 시나리오를 처음 손에 쥐었을 때 “와, 이거 엄청난 게 될 거야!”라고 믿었던 누군가가 있었다. 그건 어쩐지 청춘병을 앓게 만든다. 오타쿠는 이렇게 생성되는 걸까? 그는 왜 이 시나리오를 쓰레기통에 버리지 않았을까. 귀신에 홀렸던 걸까. 처음으로 ‘아, 좆됐다...’는 생각이 든 순간은 언제였을까. 아마 그 순간이 아직 오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영화가 감독 한 사람만의 착각으로 완성된다면 이토록 낭만적이진 못했을 것이다. 단지 한 인간의 치기나 객기쯤으로 치부될 수 있다. 근데 그 작품을 믿어준 투자자들, 밤을 새가며 그것을 현실로 구현시킨 스태프들, 그리고 적어도 한 번은 그걸 극장에서 끝까지 봐준 관객들이 있었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망작엔 기묘한 힘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그 사람들을 설득했을까? 그들만의 비즈니스 비법이 따로 있을까. 그렇다면 차라리 자기계발서나 전자책으로 내줬으면 좋겠다. 나도 배우게. 영화가 어느정도의 뻔뻔함을 넘어서면 그건 예술이 된다. 솔직히 인터스텔라 제작기보다 망작 제작기가 더 궁금하지 않나?


어느 날, 루와 함께 ‘더 문’이라는 영화를 봤다. 루는 상영이 끝나자마자 이딴 게 영화냐며 짜증을 냈고, 나는 어떻게든 그 영화에서 의미를 착즙해내려 애썼다. 그리고 그건 내 인생의 좌우명이 됐다. “영화는 주인공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 그건 ‘더 문’이 나에게 준 메시지였다. 우주 한복판에 떨어져,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상황에서도 인생이 어찌어찌 뭍으로 데려다 놓는다는 감각. 살다 보면 어떤 것이든 다 해결될 거라는 배짱. 내가 나를 포기하지 않으면 된다. 기막힌 낙관은 영화의 본질, 그것이 인생에도 적용될 것이라는 확신은 지금껏 나를 살게 했다.


동생은 공감성 수치가 폭발하는 영화를 진저리치며 싫어한다. ‘디어 에반 핸슨’을 보다가 중간에 도망치듯 나가버렸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그런 영화로 부끄러움을 견디는 연습을 해야한다고 믿는다. 공감성 수치도 계속 겪다 보면 면역이 생기지 않을까? 인생은 예쁜 장면만 추려만든 감성 브이로그가 아니니까. 어쩌면 온갖 찌질함과 고통스러운 순간이 어쩌면 더 큰 의미를 가져다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영화는 내게 인간관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수많은 쪽팔린 일들을 보여준 다음 ‘솔직해져도 괜찮다’고 말해줬다. 결국 내가 한 거짓말과 꼬여버린 실타래를 내 손으로 풀어내야할 날이 온다고. 그걸 직면하고, 솔직하게 인정하고, 반성하는 게 주인공의 몫이라고 말해줬다. 영화가 부끄러움을 피하지 않고 직면할 때마다 그도 나도 비약적으로 성장하게 됐다. 그래 일단 겪어보자, 도망치지 말고.


“주인공은 죽지 않아.” “주인공은 완벽하지 않아.” 이건 주인공의 법칙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를 인생에서 홧김에 주인공으로 만들어버리는 주문이기도 하다. 나에겐 미의 정석으로 보이는 친한 언니가 있다. 그런데 그 언니가 배우로서 하는 고민은 단지 ‘예쁜 것’이었다. 자신을 포함한 누구라도 자기를 보면 ‘주인공을 괴롭히는 악녀’나 ‘일진’, 술집이나 클럽에서 단순하게 소비되는 여자 역할밖에 안 떠올릴 거라고 말했다. 언니의 한숨에는 아주 복합적인 맥락의 사회구조적 문제들이 숨어있이서 무척이나 서글펐다. 하지만 나로 하여금 세상을 좀 다르게 보게 해준 계기도 됐다. 영화는 정말 공평한 세계구나. 예쁘든 못생겼든, 결핍이 있든 없든, 그 사람만의 서사가 있다면 주인공이 될 수 있구나. 단순하게 칭찬받고 선망되지 않는 부류일 수록, 흠있고 이상하고 배척당하고 남다른 캐릭터일 수록 사랑받는다. 이상하고 복잡할 수록 그를 더 알고 싶고 그 세계를 궁금해하게 만든다. 그래서 영화 속 세계가 현실보다 공정하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원래 주인공은 망한 상태에서 시작한다. 애초에 다 잃고 나서야 영화가 비로소 시작되니까. 면접을 말아먹고, 사람들 앞에서 비위 맞추고, 광대처럼 웃다가 문득 자괴감에 빠지고, 혼자 집 가는 버스 안에서 눈물이 차오를 때 그 모든 순간은 설정값이다. 이제 괜찮아질 일만 남은, 서사의 필연적 기점일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인생이 조금은 견딜 만해진다. 되는 일 하나 없고 세상에 내 편 하나 없다고 느낄 때, 사건이 꼬이고 꼬이고 꼬일 때, 헐뜯는 말에 반박 한번 하지 못하고 돌아설 때, 그냥 다 영화라고 생각하면 서사가 된다.


‘비긴 어게인’에서도 그랬다. 간신히 쌓아온 정상성의 탑이 무너지고, 직장과 가족과 꿈을 다 잃고, 엉망진창이 된 삶 위에서 음악이 시작됐다. 주인공은 잃어야 할 것을 죄다 잃어버리고 나서야, 어떤 결정적인 만남을 하게 됐다. 그의 모든 불운이 마치 이 한 장면을 위해 존재했던 것처럼. 그건 운명의 비겁한 변명이 아니라, 예술이 삶을 다루는 방식이다. 그래서 우리는 울면서 납득한다. "응, 오래 기다렸지? 바로 이 장면을 위해서야." 우리는 그 한마디를 기다리면서 버티는 걸지도 모른다.


영화의 필수 요건은 이렇다. 잘나가다가 망함. 애초에 망함. 결국 다 ‘망함’으로부터 시작된다. 누구나 망한다. 잘나가던 악당도 결국엔 꼬꾸라진다. 마치 결말이 주어져있고, 그걸 위해 포장치처럼 불운이 준비되어있다는 마냥. 그래서 영화의 결말을 되감아보면 은근히 인생이 위로된다. 연속되는 불행도, 엉킨 실타래도, 결국에는 의미있게 완성될 것이다.


한번은 에무시네마에서 페춀트전을 보러 갔다가 화장실에서 다슬기를 마주쳤다. 우린 둘 다 ‘피닉스’를 보기 위해 구불구불한종로의 골목길을 걸어왔던 거였다. 영화가 끝난 뒤, 함께 집으로 가는 길에서 다슬기는 페춀트가 얼마나 대단한 감독인지, 피닉스가 얼마나 ‘시네마’인지 잔뜩 흥분해서 말했고, 나는 그 앞에서 담담하게 말했다. “난 이 영화가 끔찍하게 싫어.”


당황한 친구가 나를 설득하려 했지만, 몇 마디 후에 곧 포기해버렸다. 그 순간 알 수 있었다. 우리 사이가 여기

서 영영 갈라질지도 모른다는 무서운 직감. 용산 CGV 박찬욱관, 그래비티 재개봉관, 에무시네마. 이상하게도 우리 둘은 영화관 화장실에서 자주 마주쳤다. 기묘하게 반복되던 그 짧은 만남들은, 우연한 듯 정교했다. ‘우연이 반복되면 운명이란 말’처럼 우리는 서로를 운명으로 착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의 궤도는 가까워질 수록 충돌했다. 우연히 같은 상영작을 택했을지라도, 우리는 매번 그 영화의 전혀 다른 얼굴을 보고 나왔다.


나는 그때 이렇게 말했다. “가부장제 속 여성들이 마치 우아한 복수를 한 것처럼 위안하는데, 실제로는 그냥 착취당한 것뿐이잖아. 저런 걸 아름답게 그리는 연출이 오히려 화가 나.” 그 영화는 나에게 피아노 소리같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분노로 다가왔다. 사실 내 말이 친구에겐 너무 폭력적이었을 수도 있다. 아니, 분명 그랬겠지. 그 순간부터 우리 사이의 공기는 뻑뻑해졌고, 말을 꺼내려다가 억누르길 반복했다. 우린 서로의 집으로 가는 버스 몇 대를 보내고, 서로의 정거장으로 데려다주면서도 그 대화를 쉽게 마무리 짓지 못했다. 속마음은 사랑니처럼 갈피를 못 잡고 삐뚫어졌고, 논쟁은 풀리기보단 가치치고 뻗어만 갔다. 나는 그때 말했다. “영화가 사회 문제를 품고 있을 때 현실을 재현하는 데 그치면 안 돼. 현실 너머를 제시하는 매개가 돼야지.” 그 말은 지금 돌이켜보면 내내 모순적이었다. 나는 영화를 단지 킬링타임, 혹은 메시지 하나 건지기 위한 용도로만 소비해왔으면서, 왜 그 하나의 영화에 그렇게까지 무게를 실었을까.


사실은, 내가 틀렸을 수도 있다는 예감이 어렴풋이 들고 있었다. 사람들은 다 그 영화를 좋아하는데 나만 그 영화를 싫어하는 게, 내가 빨라서가 아니라 아직 경험하지 못한 감정이 있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지금은 1점인 영화가 언젠가 5점이 될 수도 있다.’ 그 생각으로 스스로를 다잡았다. 나는 친구의 세계를 간절히 이해하고 싶었다. 언젠가 피닉스를 걔랑 다시 보고싶다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동시에 바랐다. ‘다슬기와 다시는 영화관에서 마주치지 않기를.’ 그 말은 너무 슬프고 웃겼다. 왜 처음 본 사람이 ‘인터스텔라’가 최애 영화라고 하면 우리 너무 소름끼치게 잘 맞는다고 신기해하면서, 다슬기와 나는 이렇게나 다르다고 여길까. 왜 이렇게 같을 수록 다름을 느낄까. 오랜 연인과 헤어지는 것도 이런 이유고, 가족들에게 바락바락 소리치는 것도 이런 맥락이지 않았을까 싶었다.


누군가와 함께 영화를 본다는 건, 생각보다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가까워질수록 더 불편해지는 영역이 있다. 어떤 영화는 상대의 깊숙한 트라우마를 건드리고, 그가 숨겨두었던 자아를 끄집어내고야 만다. 가까워진다는 건 가끔 더할 나위 없이 불편해지는 일이기도 하고 갑자기 확 궤도를 이탈해버리는 일이기도 하다. 아무튼 예측 불허의 세계에 눈 딱 감고 뛰어드는 일.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첫 데이트에서 영화를 본다는 건,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만 할 수 있는 치기 어린 일이라고. 영화를 보며 상대의 눈치를 보지 않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반대로,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우리는 자꾸 그 사람의 세계에 초대받고 싶어지고, 내 세계에 데려오고 싶어진다. 도복순의 왓챠 상태명엔 이렇게 적혀 있다. “영화 매칭률 90% 넘는 사람한테 청혼 예정.” 언니와 나의 매칭률은 67%. 둘다 재미있게 본 작품이 이렇게나 많은데…


영화는 묘하다. 서로를 얼마나 잘 맞는지 증명해주는 수단인 동시에, 얼마나 다른지를 들춰내는 잔인한 장치이기도 하다. 학창 시절, 나와 모든 걸 함께하고 싶다고 말했던 친구가 있었다. 우리는 ‘위대한 쇼맨’을 함께 봤다. 영화가 끝나고도 심장에서 쿵쿵 울리는 OST에 벅차올라있을 때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나, 사실 영화 안 좋아해.” 그 말은 이별의 선언처럼 들렸다. 나는 혼란스러웠고, 여전히 ‘위대한 쇼맨’이 대중픽인지 아닌지 혼란 속에 있다. 누군가에게 맞춰주는 일이 이렇게 쉬운 것이었나. 내가 그 친구와 잘 맞는다고 느꼈던 건, 그가 그냥 나에게 맞춰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나. 그건 내가 이기적이라는 반증이기도 했다.


내가 서울에 살 때, 나는 매달 스케줄을 짰다. 보고 싶은 전시, 영화, 가고 싶은 카페를 지도에 찍어두고 최적의 동선을 만들었다. 그리고 내 계획에 어울릴 것 같은 사람에게 연락했다. 거의 모두가 좋다고 말했고, 나는 완벽한 데이트를 마친 후 집으로 돌아오며 기뻤다. 오늘 하루도 하루치의 행복을 만끽한 것만 같았다. 최악의 평가는 ‘의외로 좋았다’였다. 평생 너 아니면 안해봤을 일을 해봤다고. 나는 그 말들을 진심으로 믿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것이 정말 ‘의외로’ 좋았던 건지, 아니면 그냥 나를 배려한 말이었는지 헷갈린다. 누군가는 내 세계에 놀러와 자신의 세계를 뚝딱뚝딱 확장시켜나가고 있었고, 누군가는 나를 놓치지 않기 위해 묵묵히 따라와줬다. 내가 짜놓은 세계에 들어오지 않으면 한참 뒤에야 만날 수 있었으니까. 어쩌면 누군가는 나와 함께 한 시간이 끔찍한 시간낭비였다고 후회할지도 모른다. 나는 그들의 속마음을 모르지만 알 것도 같다. 알아버릴 것도 같다가 언젠가 완전히 알아버릴 것 같아서 슬퍼진다. 이것을 마음의 시차라고 번역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내 멀미는 지독히 먼 훗날 발현될지도 모른다.


츠키와 나는 ‘탑건: 매버릭’이 개봉했을 때, 하루에 영화 세 편을 보기로 했다. 그런데 탑건의 4DX 좌석은 단 한 장뿐이었다. 욕심이 난 나는 그 한 장을 잡았고, 츠키에겐 아이맥스관의 명당 자리를 줬다. 스스로가 너무 쓰레기 같다고 느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날 영화가 끝난 뒤, 용산의 뽈살집에서 우리 언젠가 경비행기를 몰자는 허황된 꿈을 펼쳤다. 각자의 콜사인도 정했다. 나는 피닉스, 츠키는 오랜시간 고민했다. 그리고 나는 4DX관 앞을 지날 때마다 츠키 생각이 문득 스쳤다. 미안함은 두부처럼 오래도록 가슴 한켠에 응어리졌다. 그런데, 그 츠키가 올해 항공학교에 입학했다. 20대 후반의 나이로 파일럿의 꿈을 실행하기로 한 것이다. 츠키는 편지로 ‘매번 너의 당연한 응원 덕분에 용기낼 수 있었다’고 말해줬다. 나는 츠키에게 “이제 넌 직접 비행기 운전하니까 그걸로 퉁쳐”라고 답장했다. 드디어 마음의 빚이 밤 하늘의 빛으로 반짝였다. 이제 하늘을 올려다 볼 때마다 츠키 생각이 날 것이다. 나는 일기장에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을 펜으로 적었다. “내가 살면서 언제 비행기 운전을 또 해보겠니, 그치만 너는 이제 매일 해보겠지. 무수한 산과 바다 구름 위를 항해하는, 그때가 되면 모험담을 들려줘.”


어떤 영화는 누군가의 인생이 된다. 자신도 몰랐던 미래를 예감하고, 꿈꾸게 된다. 무한개의 평행 우주 속에서 우리는 영화를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유영한다. 현실은 더 짜릿할 것이다. 혹은 더 지루할지도 모르지만… 만약 인생이라는 영화가 100년짜리 러닝타임이라면, 그중 수백 년쯤은 남의 인생으로 살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세상엔 아직도, 말도 안 되게 영화를 사랑하고, 그걸 위해 자신의 인생을 거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그 무모한 사랑에 나도 고목나무 매미처럼 찰싹 빌붙고 싶다. 그런 철없는 사람들의 꿈에 더 철없이 기대보고 싶다. 물론 그럼에도, 내 인생이 제일 재미있을 거다.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영화를 보자는 피의 맹세. 그러니까 우리는 계속 영화를 보자. 삶에 대해 영화라는 약속을 하자. 아무리 세상이 비겁하고, 사람이 악하고, 믿었던 사람이 뒤에서 칼을 꽂더라도, 우리 뜻대로 되는 일 하나 없어도, 우리 뜻대로 할 수 있는 유일한 하나는 영화를 트는 일이니까. 그건 버튼 누를 힘만 있으면 되는 일이니까. (물론, 2시간 내내 의자에 앉아있을 코어 힘과 시력이 필요한 고도의 전문직이긴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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