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도 당신만의 필름이 있다면
타인이라는 장르 - 영화가 연결해준 세계
“인생영화가 뭐예요?”라는 질문은 늘 곤란하다. 장르별 top3라면 모를까. 차라리 "너는 어떤 인간이야?"라는 물음에 답하는 것이 더 쉬울지도 모른다. 모든 영화가 나에게 뭔가를 줬지만, 그 어떤 영화도 나를 완벽히 대변하진 못했다. 나는 항상 무언가를 열렬히 좋아하는 부류와 그 존재를 모르는 부류의 중간 경계 어딘가에 머물렀다. 이 세계에 속한 듯, 동시에 바깥에 머무는 외계인처럼.
얼마 전, 하늘 언니와 교환 독서를 하기로 했다. 언니는 공유 메모장에 ‘오직 나에게만 5점짜리인 책’ 리스트를 올렸고, 나도 에세이와 자기계발서 코너에 몇 권을 골라 적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하리만치 소설 카테고리는 올릴 수 있는 책이 없었다. 참 이상하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소설책인데. 내가 푹 빠져들었던 그 이야기들은 되돌아보니 어딘가 납작하고 허술해서 부끄러웠다.
한줄로 요약하자면 뻔한 사랑 이야기나 사람 이야기들. 내가 울고 웃었던 순간들은 한 발짝 떨어져 보니 그건 아주 상투적인 단어들로 요약이 됐다. 소설 속에서 느낀 고양감은 책을 덮는 순간, 증발되어버린 걸지도 모른다. 어쩌면 책을 추천한다는 건, 내 세계의 밑바닥을 내보여주는 일이기도 했다. 조심스레 그 마음을 언니에게 고백했더니, 언니도 똑같다고 말하며 웃었다. 그러니까 영화도 비슷한 것 같다. 영화나 소설은 결국 ‘체험’이니까. 실용성이나 재미, 메시지를 따지는 게 아니라, 그건 거의 ‘삶’에 가까운 무엇이니까. 누군가의 인생을 별점으로 평가할 수 없듯이.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누군가 나에게 “내가 좋아할 만한 영화 추천해줘!” 하면 나는 숨도 안쉬고 따발총처럼 내뱉는다. 인간AI 알고리즘 같다는 소리를 듣는 것도 은근히 즐거웠다. 하지만 가만히 돌아보면, 그건 나와 감도, 취향도, 정서도 맞는 사람들과만 나눠왔던 확신이었다. 나와 결이 맞는 친구들, 세계와 어딘가 불화하는 이들, 청춘, 낭만, 희망을 입에 달고 살며 터무니 없는 미래를 꿈꾸는 이들, 아티스트라기엔 늘 지망생에 가까웠고, 생존을 도모하기에 그릇이 너무 큰 사람들. 평범한 척하지만 아주 이상한 사람들, 어디론가 휙 떠나버려도 걱정이 되지 않고 그저 응원하게 되는, 이 세계의 유일무이한 캐릭터들. 그들을 생각하면 웃음이 터져나온다. 함께 있으면 어디로 튈지, 어떤 사건이 펼쳐질지 예측 불허하기 때문에.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라는 영화를 추천하는 건 누군가를 좋아하게 될 때 필수로 거치는 관문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들 모두가 인생 영화가 됐다고 했다. 우리는 "너와 나"도 사랑했고,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괴물'도 애틋해했으며, ‘썸머필름을 타고’를 지난 여름의 일부처럼 추억한다. '소년시절의 너'를 보고는 서로를 껴안아주고 싶어 했고, '블랙 위도우’가 받은 대우에 같이 분개했다. 그리고 늘, ‘델마와 루이스’의 질주를 꿈꿨다. 여름이 오면 우리는 ‘수박’을 다시 보았고, ‘불량공주 모모코’와 ‘릴리슈슈의 모든 것’을 따라하며 언젠가 이런 영화를 만들어보자고 다짐했다. 보통의 나는 이렇고, 나에게 보통인 친구들을 꿈꿨다. 아마 당신은 이 영화를 보지 않았더라도 사랑할 것이다.
어느 날, 인터넷에서 이런 우스갯소리를 본 적 있다.“한국의 락 팬덤이란 비틀즈 팬 10명, 와싯 팬 10명, 블러 팬 10명, 핑크 플로이드, 롤링 스톤즈, 너바나, 아틱 몽키즈 팬 각각10명을 다 합쳐봐야 총 12명이다. 그리고 SF 팬덤 12명과 합치면 총 15명이 된다.”우습지만 묘하게 찡했다. 나도 그 ‘15명’ 중 하나가 되었던 시절이 있었다. 영화제, 북페어, 내한공연, 복합 문화공간… 그 작은 동선 안에서 궤적이 겹치던 도하와는 절친한 친구가 됐다. 우리는 함께 ‘멋진 할머니가 되자’고 약속했다. “죽기엔 아까운 세상이지 않냐”며. “죽는 건 하나도 안 무서운데, 죽으면 새로 나올 콘텐츠들을 못 본다는 게 더 억울할 것 같다”며. 스타트랙 시리즈 광팬 친구를 보며, 해리포터를 ‘책으로’ 꼭 다시 보라고 조언하는 친구를 보며, 반지의 제왕을 실재하는 하나의 세계로 받아들이는 친구를 보며, 나는 문득 “세상엔 정말 볼 게 많구나”라는 생각으로 벅차올랐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삶의 리스트가 뚱뚱해졌다. 먼 미래에 사랑하게 될 무언가를 발견하고 지도에 별을 그리는 일은 짜릿한 모험의 시작이다. 추천받고, 추천하는 일. 그건 클라우드를 결제하는 것처럼 삶의 용량을 조금씩 확장시켜나가는 일이었다
영화를 좋아하는 친구 중 한 명은 에프터썬을 거의 스무 번이나 봤다. 신기했다. 한 번이면 충분하지 않나? 나는 어떤 영화를 봐도 두 번째부터 감흥이 바스러졌다. 화면 속 인물들이 전처럼 살아있는 것 같지 않고, 뒤의 카메라맨과 스텝들, 대사를 암기하는 장면들이 겹쳐보였다. 그래서 이상하게 어떤 영화를 깊이 좋아할수록, 다시 보는 일이 겁이 났다. 그건 내가 에에올을 재탕하지 못하는 이유다. 그 친구와 나는 라이카시네마에서 에프터썬을 함께 봤다. 그건 친구의 여덟 번째 에프터썬이었다. 나는 그 옆자리에서 그 아이의 손이 수첩 위를 휙휙 날아다니는 걸 지켜봤다. 뭔가를 미친 듯이 적어내려가는 모습에, 순간 나는 스크린이 아니라 그 손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저기에 뭐가 있다는 거지?”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잠깐 스쳤고, 아이러니하게도 그게 나에겐 영화 속 어떤 장면보다도 더 선명하게 남아버렸다.
내가 에프터썬을 떠올린다면 너, 그리고 캠코더. 그 친구가 카페에서 종일 떠들던 99개의 장면들이 잘 기억 나진 않는다. 다만 에프터썬은 나에게 다른 의미로 깊게 남아있다. 어떤 영화은 휘발된 것 같아 보여도 몸에 깊은 잔향을 남긴다. 그 친구와 헤어질 때 나는 가끔 공항에서의 소피를 흉내냈다. 안녕, 인사하고 등을 돌렸다가 고개를 휙 돌려 상대를 쳐다보고, 해맑게 웃다가 다시 휙, 휙. 그 장면을 아는 친구는 웃음이 터졌다. 그건 우리만의 비밀 신호가 됐다. 분명 에프터썬은 ‘시네마’였다. 다만 내가 완전히 공감할 수는 없는 조금 더 고차원적인 감정선의 악보였다. 나름대로 해석해 연주해보지만, 내 작품이라 단언코 말할 수 없는 애매한 명작. 그럼에도 불구하고 먼 미래의 나는 언젠가 그들을 온전히 이해하는 날이 올 것만 같았다. 그때는 내가 지금보다 조금 더 아파봤거나, 조금 더 사랑해봤거나, 조금 더, 이별을 해봤을 때일까. 어쩌면 나도 그 영화를 유리처럼 입 안에 피를 잔뜩 흘리면서도 콰득콰득 씹어먹는 날이 오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흘려보내는 정도로 그 영화를 좋아했다.
나는 모두가 입을 모아 사랑하는 명작을 덩달아 사랑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내 마음이 사랑까진 아닌 것 같아. 남들에 비해 무난한 내 감정선을 부끄러워하면서 매번 한발 뒤로 물러났다.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 틈에서 매번 느끼는 엇나감. 빗나감. 이제는 그 역시 나의 개성이며 나의 방식이다 라고 믿는다. 그렇지만 어떤 시절의 나는 내가 좋아하는 무리에, 무언가를 사랑하는 집단 속에 완전히 속할 수 없다는 것이 서글프기도 했다. 영화라는 어떤 세계에서 배척된 것 같이 느껴졌던 탓이다. 너는 태생이 달라. 이곳에 속할 수 없어. 라는 낙인을 스스로 찍었다.
어느 날, 루와 함께 ‘더 문’이라는 영화를 봤다. 루는 상영이 끝나자마자 이딴 게 영화냐며 짜증을 냈고, 나는 어떻게든 그 영화에서 의미를 착즙해내려 애썼다. 그리고 그건 내 인생의 좌우명이 됐다. “영화는 주인공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 그건 ‘더 문’이 나에게 준 메시지였다. 우주 한복판에 떨어져,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상황에서도 인생이 어찌어찌 뭍으로 데려다 놓는다는 감각. 살다 보면 어떤 것이든 다 해결될 거라는 배짱. 내가 나를 포기하지 않으면 된다. 기막힌 낙관은 영화의 본질, 그것이 인생에도 적용될 것이라는 확신은 지금껏 나를 살게 했다.
동생은 공감성 수치가 폭발하는 영화를 진저리치며 싫어한다. ‘디어 에반 핸슨’을 보다가 중간에 도망치듯 나가버렸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그런 영화로 부끄러움을 견디는 연습을 해야한다고 믿는다. 공감성 수치도 계속 겪다 보면 면역이 생기지 않을까? 인생은 예쁜 장면만 추려만든 감성 브이로그가 아니니까. 어쩌면 온갖 찌질함과 고통스러운 순간이 어쩌면 더 큰 의미를 가져다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영화는 내게 인간관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수많은 쪽팔린 일들을 보여준 다음 ‘솔직해져도 괜찮다’고 말해줬다. 결국 내가 한 거짓말과 꼬여버린 실타래를 내 손으로 풀어내야할 날이 온다고. 그걸 직면하고, 솔직하게 인정하고, 반성하는 게 주인공의 몫이라고 말해줬다. 영화가 부끄러움을 피하지 않고 직면할 때마다 그도 나도 비약적으로 성장하게 됐다. 그래 일단 겪어보자, 도망치지 말고.
“주인공은 죽지 않아.” “주인공은 완벽하지 않아.” 이건 주인공의 법칙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를 인생에서 홧김에 주인공으로 만들어버리는 주문이기도 하다. 나에겐 미의 정석으로 보이는 친한 언니가 있다. 그런데 그 언니가 배우로서 하는 고민은 단지 ‘예쁜 것’이었다. 자신을 포함한 누구라도 자기를 보면 ‘주인공을 괴롭히는 악녀’나 ‘일진’, 술집이나 클럽에서 단순하게 소비되는 여자 역할밖에 안 떠올릴 거라고 말했다. 언니의 한숨에는 아주 복합적인 맥락의 사회구조적 문제들이 숨어있이서 무척이나 서글펐다. 하지만 나로 하여금 세상을 좀 다르게 보게 해준 계기도 됐다. 영화는 정말 공평한 세계구나. 예쁘든 못생겼든, 결핍이 있든 없든, 그 사람만의 서사가 있다면 주인공이 될 수 있구나. 단순하게 칭찬받고 선망되지 않는 부류일 수록, 흠있고 이상하고 배척당하고 남다른 캐릭터일 수록 사랑받는다. 이상하고 복잡할 수록 그를 더 알고 싶고 그 세계를 궁금해하게 만든다. 그래서 영화 속 세계가 현실보다 공정하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원래 주인공은 망한 상태에서 시작한다. 애초에 다 잃고 나서야 영화가 비로소 시작되니까. 면접을 말아먹고, 사람들 앞에서 비위 맞추고, 광대처럼 웃다가 문득 자괴감에 빠지고, 혼자 집 가는 버스 안에서 눈물이 차오를 때 그 모든 순간은 설정값이다. 이제 괜찮아질 일만 남은, 서사의 필연적 기점일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인생이 조금은 견딜 만해진다. 되는 일 하나 없고 세상에 내 편 하나 없다고 느낄 때, 사건이 꼬이고 꼬이고 꼬일 때, 헐뜯는 말에 반박 한번 하지 못하고 돌아설 때, 그냥 다 영화라고 생각하면 서사가 된다. ‘비긴 어게인’에서도 그랬다. 간신히 쌓아온 정상성의 탑이 무너지고, 직장과 가족과 꿈을 다 잃고, 엉망진창이 된 삶 위에서 음악이 시작됐다. 주인공은 잃어야 할 것을 죄다 잃어버리고 나서야, 어떤 결정적인 만남을 하게 됐다. 그의 모든 불운이 마치 이 한 장면을 위해 존재했던 것처럼. 그건 운명의 비겁한 변명이 아니라, 예술이 삶을 다루는 방식이다.
그래서 우리는 울면서 납득한다. "응, 오래 기다렸지? 바로 이 장면을 위해서야." 우리는 그 한마디를 기다리면서 버티는 걸지도 모른다. 영화의 필수 요건은 이렇다. 잘나가다가 망함. 애초에 망함. 결국 다 ‘망함’으로부터 시작된다. 누구나 망한다. 잘나가던 악당도 결국엔 꼬꾸라진다. 마치 결말이 주어져있고, 그걸 위해 포장치처럼 불운이 준비되어있다는 마냥. 그래서 영화의 결말을 되감아보면 은근히 인생이 위로된다. 연속되는 불행도, 엉킨 실타래도, 결국에는 의미있게 완성될 것이다.
가끔 상상해본다. 만약 내가 신이라면, 육체도 혼란도 없이 완전한 ‘공(空)’의 세계 속에서 살고 있겠지. 모든 것을 예측할 수 있고, 모든 일이 나의 의지대로 흘러간다면, 그건 너무나도 평면적인 삶일 것이다. 완벽함, 완전함. 우리가 꿈꾸는 그런 삶이 펼쳐진다면 인간은 결국 심심해서 미쳐버릴 지도 모른다. 그럼 가끔 신도 인간이 되고 싶을까. 그런 상상 끝에서 문득 깨닫는다. 인간의 삶은 예측 불가능하고, 종종 납득할 수 없으며, 때론 감정에 휩쓸려 어딘지도 모르는 방향으로 휘청이기도 한다.
그런데 바로 그 점에서 인간은 인간다워지고, 이야기는 시작된다. 영화는 그런 복잡한 삶의 단면을 더욱 압축적이고 치밀하게 재현한다. 이분법적으로 좋음과 나쁨을 구분하려 하지 않고, 등장인물들이 감정의 기복 속에서 성장하고, 어떤 우연이 필연이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삶의 아이러니를 언어와 이미지로 빚어낸다. 그 속에서 우리는 스크린 바깥에 펼쳐지고 있는 우리의 세계와 맞닥뜨리게 된다. 영화는 단지 보고 듣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감각하고 사유하게 만드는 것이다.
친구가 내 얘기를 듣고선 일론 머스크가 말한 시뮬레이션 우주론과 비슷하다고 했다. “죽을래?” 답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것도 틀린 건 아니다. 우리 모두 어쩌면 누군가가 설계한 세계를 살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그 서사 속에서 얼마나 밀도 높게 살아가느냐는 것. 피할 수 없는 이야기 속이라면, 기왕이면 그 이야기의 진폭을 끝까지 살아내고 싶다. 삶의 의미란, 결국 그 '몰입'의 농도에서 결정되는 게 아닐까. 세계가 무엇을 위해 설계되었든 나는 그저 즐기면 그만. 신이 아무리 내게 시련을 줘도 나만 행복하면 장땡이다. 행복한 게 이기는 거다. 신이 나를 아주 얄미워하게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서인지 어느 순간부터는 영화에 별점도, 스토리의 완성도도, 연출의 세련됨도 중요하지 않아졌다. 그저 한 편의 영화에서 단 하나의 문장, 하나의 표정, 하나의 기류만 건져도 충분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학창 시절엔 매 작품마다 연출이나 편집을 꼼꼼히 따지며 나름의 날카로운 평가를 했던 내가, 어떤 영화를 봐도 너그러워졌다. 지금은 그저 내 안에 어떤 ‘느낌’이 남는지가 중요하다. 인생에 적용시킬 하나의 메세지를 건져올리거나. 나는 가끔 스스로 만든 이론을 꺼내 들곤 한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인생은 콘텐츠다. 신은 너무 심심해서 인간을 만들었고, 예측 불가능한 전개를 위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다. 그리하여 인간은 각자의 삶이라는 콘텐츠를 제작하고 살아낸다. 인간이 만든 콘텐츠가 인생의 근원이다.' 어딘지 허술하고 우스워 보일 수도 있는 이 가설 속엔, 내가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담겨 있다. 예측 불가능하고 때로는 버겁기까지 한 이 삶을 나는 여전히 하나의 레이어로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그런 외적인 목표들이 하나둘 무의미해졌을 무렵에도, 나는 여전히 영화관에 있었다. 아무런 보상도 기대하지 않으면서도 습관처럼 극장으로 향했다. 지금에 와서야 어렴풋이 알 것 같다. 나는 영화를 보며 내 삶을 이해받는 기분을 느꼈다. 혹은, 이해하려 애썼는지도 모른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종종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갈등과 고통을 겪는다. 내면의 충돌, 타인과의 부딪힘, 도무지 피할 수 없는 사건들. 마치 신이 그들을 괴롭히는 듯한 이야기 구조 속에서, 주인공은 끝내 자신의 삶을 돌파해 나간다.
그런 장면을 마주할 때마다 나도 모르게 생각하게 된다. 내가 겪는 혼란과 고통 또한, 언젠가 는 어떤 의미를 갖게 될까? 어쩌면 이 혼란조차도 나만의 서사를 형성해주는 한 조각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 삶의 어떤 국면조차 조금은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영화는 결국 누군가의 인생을 짧고 강렬하게 체험하게 해주는 형식이다. 누군가의 고통을 온전히 응시하고, 감정을 밀도 있게 추적하며, 사건이 만들어내는 파장을 따라가는 일. 그것이 단지 스크린 앞에서 ‘보는 것’을 넘어서, 내 삶을 더 깊이 체험하도록 만드는 일로 연결됐다. 그러니까, 내가 영화를 계속 보는 이유는 단순히 재미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나 자신의 이야기를 견디기 위해, 남의 이야기를 들여다봐야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영화를 보자는 피의 맹세. 그러니까 우리는 계속 영화를 보자. 삶에 대해 영화라는 약속을 하자. 아무리 세상이 비겁하고, 사람이 악하고, 믿었던 사람이 뒤에서 칼을 꽂더라도, 우리 뜻대로 되는 일 하나 없어도, 우리 뜻대로 할 수 있는 유일한 하나는 영화를 트는 일이니까. 그건 버튼 누를 힘만 있으면 되는 일이니까. (물론, 2시간 내내 의자에 앉아있을 코어 힘과 시력이 필요한 고도의 전문직이긴 하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