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매한 재능으로 먹고 살 수 있을까

무언가를 조건없이 사랑하는 마음에 대하여

by 강하라



오래도록 재능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그렇다는 말은 살면서 나에게 무엇인가 확실한 재능이 없었다는 뜻이 된다. 메모장에 ‘재능’이라고 검색하면 한탄하듯 써내려간 꽤 많은 문장들이 있었다. “천재니 재능이 있다느니 뭐 이런 말, 누군가를 달콤하게 익사시키는 말.” “재능은 있다가도 없는 것.” 어중간한 재능이란... 뭘 해도 그걸로 먹고 살긴 힘들다는 걸 은유한 표현이 아닐까.” “다 잘한다는 건 아무것도 못한다는 뜻” “재능은 무언가를 잘하는 능력이 아니라, 무언가를 오래 좋아하는 지구력이라고 생각해” “재능이 어디있을 줄 알고 도전하는 것을 멈추니”


나는 재능이란 놈을 해부하고, 그 정체를 빨리 밝히고 싶었던 것 같다. 누군가에게 재능있다는 말을 들을 수록, '재능 없음'에 대한 불안이 싹트면서 나에게 재능이 확실히 있는지 시험해보고 싶었다. 때때로 재능 있는 척 하는 내가 사기꾼 같이 느껴진 적도 많았다. 하지만 나는 재능 앞에서 가해자보단 피해자에 가까웠다. 섣불리 희망을 주고, 곧바로 앗아가버리는. 이미 곁에 있는 것처럼 굴다가 사실은 나를 사랑한 적도 없었음을 밝히는 로맨스 스캠같은 놈. 아주 못된 놈. 나는 온 생 내내 그를 갈망했다. 그를 이기고 싶었고, 이긴 것 같다가도 매번 졌다.


나는 음악에 대해 아주 뛰어난 재능이 있다고 굳게 믿어온 사람이다. 작사가와 작곡가로 쌓아온 커리어를 빼고, 열심히 음색을 가꿔온 시간을 빼고, 그냥 음악이 미친듯이 사랑해본 적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것 하나는 자신있었지. 밥은 굶었어도 음악은 굶으면 곧바로 죽어버릴 것 같았다. 듣고 있어도 듣고 싶었고, 새로운 음악에 무척이나 허기졌다. 지금의 나는 그 시절이 까마득하다. 음악과 나는 다 식은 커피 앞에서 침묵하는, 권태기가 온 연인같다. 오늘 나는 이별을 고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는데, 이미 우리는 헤어진 연인이었다. 아니, 우리가 사귀었었어? 그런 말을 들을 것 같다.


이제 나는 헤드폰 없이 산책하는 건 오히려 좋아도, 포카리 없이 산책하는 건 힘들다. 음악을 들으면 강박적으로 크래딧을 확인한다. 아는 사람의 이름이 보이면 기뻐할 여유가 전혀 없다. 이 세계에서 내 이름이 영원히 배제될 것만 같다. 좋은 음악을 들으면 신나다가도 슬픈 표정이 되고, 나도 만들 수 있는 음악을 들으면 입천장이 마른다. 내가 쓰고 싶었던 샘플이 확대되어 들리고, 미래의 내가 써야 할 멜로디를 빼앗긴 기분이 든다. 머릿 속에 남는 후킹한 가사를 따라부르면서도 이런 가사는 너무 쉽다,는 생각이 든다. 쉽다는 생각이 들면 나도 쓸 수 있었을 것 같고, 내 자리가 없어진 것 같다. 괴롭다. 이건 아직도 음악을 사랑하고 있다는 반증같다. 그래서 더 짜증난다.


나 아니어도 되는 가사, 나를 통하지 않고도 나왔을 멜로디들. 나는 여태까지 내가 이뤄온 일들이 다 운같이 느껴진다. 운이라면 뼈저리게 감사하고, 노력의 댓가라면 배신감부터 드는 초라한 커리어. 현재는 감사가 배신감보다 더 큰 걸 보면 나 자신을 ‘고평가저량주’라고 평가한 것이 틀림없다. 이제 내 노력은 가치가 없다. 엿이랑 바꿔먹은지 오래다. 이 문장을 쓰는데 슬프지도 않았다. 얼마전 응원하던 가수의 신보를 듣는데, 내가 시안에 쓴 문장과 겹치는 문장들이 몇 발매되었다. “사람 머리는 거기서 거기야.” 조윤경 작가님이 해주신 말이 떠올랐다. 그럼 내 가사는 어떤 한끝으로 탈락된 걸까 생각해보다가 역시나 내 가사니까 그렇지, 하고 자조한다. 쉽게 대체될 수 있는 나라는 존재. 그게 나의 아이덴티티, 그게 나의 개성, 시대의 부품으로서의 나. 좋아하는 마음이 유일한 재능이었는데, 그 재능마저 빛을 잃고 말았다.


초등학교 1학년, 7살의 나는 친구들보다 머리 하나가 작고 어리바리해서 선생님의 걱정을 샀다고 한다. “아이가 왕따인 건 아세요?” 셋이 나가면 둘이 돌아오고 나는 어딘가 학교 한 구석에 버려져있었다고 했다. 기억도 안나는 시절을 엄마는 꽤나 오래 아픈 손가락으로 기억했나보다. 얼마전 구름 언니가 집에 놀러왔을 때 막걸리에 취한 엄마는 그 이야기를 했다. 한편 그 시절의 나는 마이클잭슨의 ‘heal the world’나 비틀즈의 ‘Imagine’, 웨스트라이프의 ‘my love’같은 팝송을 헬로키티 노트에 필사했다고 한다. 영악하게 느껴질 정도로 똑부러진 나와 엄마의 눈에 아주 작고 둔하고 모자란 새끼 곰돌이같은 나. 어떤 게 나인지 아직도 모르겠다. 나는 종종 사진으로 과거를 떠올리고, 사진 밖의 과거를 꿈으로 떠민다. 간신히 기억되는 과거 역시 내 것이 아닌 것 같다. 지금을 충실히 살아낼 수록 나를 종종 잃어버리는 기분이 든다. 내가 굳게 믿는 나의 열정은 소모되는 부품일까. 그렇다면 얼마만큼의 배터리가 남았을까.


내 일기장은 ‘음악’이라는 남편을 놓지 못하는 네이트판 결시친 게시판같다. ‘나만 놓으면 끝날 것 같은 짝사랑’이라는 제목으로 온갖 에피소드가 있다. 음악은 참 웃긴 게 ‘널 잊는다.’고 선전포고하면서 구질구질하게 마음으로 붙잡을 때 절대 나에게 오지 않더라. 그러다가 ‘이제 진짜 됐다, 지쳤어. 끝내자.’ 싶으면 말하지 않아도 나에게 온다. 픽스 소식, 뻐꾸기처럼 입에 쪽지를 물고 저 태평양 건너편에서 날아오는 연애 편지. 나는 “여행가면 좋은 소식이 들린다.”는 징크스를 믿었다. 내가 도망치면 곧이어 쫓아올 테니까, 강박적으로 여행을 좋아하게 됐다. 메일함을 들락날락거리지 않고, 전화를 기다리지 않는, 바깥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잔뜩 만나는, 내가 삶의 중심인 일상. 그러다보면 음악은 사랑한다는 말을 품고 나를 잠잠히 기다리고 있었다.


이상하게 여행지에서 나는 음악을 좋아하지 않는 척 군다. “취미삼아 하는 거예요.” 하이볼에 살짝 달아오르는 볼을 감싸며 이별 상담을 한다. 어차피 헤어지지도 않을 거면서 울고불고 하는 애들이 이해가 됐다. 음악으로부터의 회피와 도망은 나에겐 생존의 방식이었다. 그가 내게 회피형 연애를 가르쳐준 탓이다. 꽃다발 하나 받으면 기뻐서 입에 함박웃음이 지어졌다. 그렇게 내가 착취당하는 줄도 모르고 밤을 새 작업을 했다. 누가 나를 이용하려 들 때마다 “역시 음악은 나를 사랑해. 나에겐 재능이 있지.” 그렇게 나를 세뇌시켰다. 대한민국의 무수히 많은 연인들처럼 ‘결국엔 너더라.’면서 나는 로직을 켰다. 역시, 재능은 세뇌의 영역이다. 누군가를 착취하고 싶다면 “너 재능있다.”고 말하면 된다.


나는 먹고 사는 일 빼고는 다 좋아한다. 자본주의 체제의 대안과 혁명같은 주제로 지피티와 토론하면서 속세에서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 내 생각에 기독교인과 소설가는 돈이랑 가장 먼 직업 같지만 실은 돈되는 법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목사님은 음모론에 등장하는 기업의 주식을 사면 되고, 소설가는 그가 비판하는 인물들과 친해지면 된다. 그렇게 다 알면서 핵심을 빗겨나가는 일이 얼마나 낭만적인지 다시 한번 감탄하게 된다. 하지만 나는 그런 중요한 일들을 그들처럼 명징하게 직시하면서도 휘말리지 않을 자신이 없다. 돈보다 ‘가오’를 택하는 건 드라마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 아닐까, 그런 비겁한 생각이 동시에 든다 ‘가오’의 본질은 윤리와 정의, 선에 맞닿아있는데 현실의 윤리나 정의는 ‘가오’와 멀리 있으니까. 쓰레기 줍기가 ‘플로깅’이라는 영어 이름을 갖기전엔 아무래도 유난이라는 소리를 들었겠지. 나는 멋진 사람이 되고 싶은데, 진짜 멋진 사람이 되어 욕 먹을 용기는 없다. 아무렴 어중간한 사람이니까. 나는 경계선을 요리조리 밟으면서 고무줄 놀이나 하고 있다. 그런데 어중간한 게 가장 어렵다는 걸 당신은 알까?


차라리 나를 놓으면 많은 것이 쉬워질 거다. 양심의 영역을 잘라내는 수술을 받은 것처럼 살아간다면, 집과 떳떳함은 따놓은 당상이겠지. 그렇지만 어중간함, 그럭저럭 먹고 삶의 영역이 실은 가장 어렵다는 것. 특히 나같은 ‘자칭 예술가’는 더욱 말이다. 돈 되는 일을 하려면 예술을 하면 안된다. 모두가 익히 아는 사실. 그런데 예술에 대한 숭고함만 버려도 반쯤은 쉬워진다. 어쩌면 예술을 팔아 낙동강에 건물을 세울 수도 있을 것이다. 나같은 변방의 음악가에게도 ‘전자책’이나 ‘강의’ 제안을 주는 세상이니까. 그런데 말이지. 저작권료로 월 천만원 버는 비법. 이런 썸네일은 죽어도 가오가 안 산다고. 어쩌다 한번 들어오는 돈이 평생 연금으로 둔갑하는 꼴이 이곳저곳에서 손오공의 묘술처럼 등장한다. 우리 엄마도 가끔 그런 착각을 한다. 내가 이렇게 놀고 먹는 것이 어쩌면 음악의 황금 거위 배적인 성질 덕분이 아닐까 하는 기분 좋은 의심을 하는 것이다. 다… 허상인데… 그냥 대책이 없을 뿐인데.


보통 인디하는 친구에 대한 편견은 그렇다. 돈에 질색팔색할 것 같은 이미지. 하지만 그들은 사실 누구보다 CEO에 가깝다. 현실적이고 악착같다. ‘이랑’의 트로피가 계산된 퍼포먼스가 아니라 정말 간절한 몸부림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온갖 사업들과 지원금을 타내기 위해 자신의 존재를 이 지구에 분명 어떠한 방식으로든 도움이 될 것이라고 어필하는 능력이 타고났다. 그러니 항상 필요한 존재가 되기 위해 애쓴다. 그건 마치 자신이 이 세상에 필요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는 것 같다. 예술가는 절망하는 방식으로 희망한다. 자신이 추구하는 방식이 자신을 굶어 죽이게 될 거라는 숙명을 받아들이면서 별처럼 소멸하며 빛난다. 그리고 무엇이든 판다. 내가 매번 재능에 대해 고민해왔던 것은 미약한 재능이라도 찾아서 얼른 갖다 팔아먹고 싶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걸로 오늘 하루 벌어먹으려고. 내 명란으로 젓갈을 만들 수 있다는 방법을 알게 되면 내일도 장터에 나갈 수 있으니까. 내 생존의 유효기간을 가늠해보기 위해서. 아…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 매일 영혼의 어느 부분을 얼마만큼 갉아먹고 있는지 상상해본다.


내 인생은 마치 ‘어중간한 재능으로 밥 벌어먹고 살기 프로젝트’ 같다. 성공할 수 있을까? 인생에서 성공은 무엇을 의미할까. 세상은 종종 보잘것 없는 내게 관대했다. 대단히 열심히 하지 않아도 ‘재능있다.’고 나를 칭찬하면서 얼마만큼의 돈으로 내 재능을 등가교환해줬다. 지원금이나 상금 등이 그렇다. 당장 쿠팡에서 상하차를 뛰며 벌게 될 일당의 몇 배, 몇십 배는 되는 무수한 돈. 그런데 아무리 큰 돈을 갑작스럽게 받게 되어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공허함이 삶에 깊숙히 파고들었다. 내 재능의 가치가 그것을 웃돈다는 것을 믿으면서도 내가 거품이나 사기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드는 것이다. 이걸로 이만큼의 돈을 벌 수 있는 건 내 인생 마지막 행운일 것이라는 절망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돈으로 살 수 없는 유일무이한 가치를 지녔다. 가치 그 자체다. 예술가는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스스로의 가치는 돈으로 매번 환산한다. 세상에 쓸모있는 사람이 되어야하기 때문이다. 자신에 대한 평가를 얼마나 뾰족하고 날카롭게 하는가가 예술가로 살아남기 위해 가장 필요한 덕목이다. 내 빈자리를 채울 수 있는 사람들과 나의 가치를 비교한다. 이 때의 비교는 양심으로써의 비교이다. 언제든 양보하고 사라질 준비가 되어있다는 자세. 이렇게 겸손하지 않은 예술가는 이 세상에 아마 없을 것이다. 예외인 아티스트들이 머릿 속에 떠오른다면 그들은 프로다. 예술가는 반면 그걸 감추고 포장하는데 능해져야하기 때문이다. 모순 가득한 세상에서 가장 모순 덩어리인 존재들. 예술가는 해리성 장애가 생기기 딱 좋은 직업이지 않은가.


먹고 살기 위해 나를 팔다보면 돈이 내 진심을 앞서는 날이 온다. 나는 언젠가 그것이 나를 망치게 될까 두렵다. 도파민 체계를 온통 뒤흔들고는 나몰라라 할 것 같다. 그렇지만 우리 모두가 슬퍼하는 건 돈이 내 진심보다 한참 뒤떨어지는 현실. 논리적으로 납득되지 않는 평가 기준, 랜덤이나 운같은 것들. 하지만 그것이 다 재능의 영역이었다면 할 말이 없어지는 것이다. 애초에 재능이 없었다면 나의 실패가 매번 다 말이 되니까. 그렇지만 누가 아는가? 치열하게 달려보지 않은 사람이 재능을 언급할 수 있을까. 그냥 다 모르겠다. 재능이란 단어를 계속 계속 파고들다보니 천국이나 이데아같이 아무도 모르고 붕 떠있는 관념처럼 느껴진다.


에술로 알 수 없는 돈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발악하다보면 꼭 예술이 ‘곧 죽을 80대 노인과 사랑에 빠지는 일’처럼 느껴진다. 이 사랑이 진실한 사랑이 맞는지, 어쩌면 내 마음 깊은 곳에선 사망보험금의 수령자를 어서 내 이름으로 바꾸고 싶은 건 아닌지, 의심하고 부정하는 알 수 없는 기시감과 싸우는 것이다. 그렇지만 계속 한다. 계속 쓴다. 계속 버린다. 어떻게 하면 이걸로 먹고 살 수 있을까. 어떻게 더 오래 할 수 있을까. 이 사랑이 얼마나 지속될까. 생각하면서. 이런 고민하는 시간에 그냥 하는 게 답이라는 건 모두가 안다. 그렇지만 문득 그것을 시험해보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게 된다. 그건 악플을 굳이굳이 찾아 읽게 되는 자해같은 행동의 원인일지도 모른다. 너무 좋아하면 영원을 꿈꾸게 된다. 그런데 영원은 나 혼자의 힘으로 되는 게 아니다. 당장 10초 뒤의 내 마음을 확신할 수도 없다.


인간은 너무 이상해!


불확실성 가득한 미래를 엿보다, 그 미래가 너무 아름다워보이면 확 때려쳐버리는 사람이 있다. 기대하면 실망하니까. 꿈과 희망이 솜사탕처럼 달콤하게 입에 녹아들 때 내가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로 충치가 생기고 살이 찌니까. 결국 그런 게 나를 망쳐버리게 될 까봐. 도망은 아이러니하지만 사실 가장 주체적인 방식의 사랑일지도 모른다. 나를 지키는 방식을 넘어서. 사랑 앞에선 속수무책으로 빠지거나 저 멀리 도망치는 것 말고는 도리가 없기에. 어쩌면 예술 앞에서 도망친 사람들은 한때 사랑에 용감했던 사람들이다. 헌데 나는 용감해지고 싶지 않고, 오래 오래 예술로 연명하고 싶다.


순수함은 갈수록 희귀해진다. 나이가 들 수록 더 그렇다. 내가 직접 경험해보지 않아도 어디서 주워들은 게 많아서 삶에 조금이라도 더 능숙해진다. 직접 데이고 아파하고 울 일이 그다지 많지가 않다. 사람을 만나도 조금이라도 그가 나를 해칠 것 같으면 금방 발 뺀다. 열탕에서 온탕으로 건너가기 전의 준비 자세로 도전하는 마음을 잃어버린다. 작은 돌을 소중하게 손에 꾹 쥐고 있던 것처럼. 그것이 나도 모르는 새 욕탕 깊은 곳에 빠져버린줄도 모르는 채로. 그래서 슬퍼하지 못하고, 슬픔도 까먹고, 그렇게 어른이 된다.


바뀐 세상은 르네상스형 인간의 시대라고 한다. 주위 사람들은 내가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여행을 가면 유튜브를 찍어오라고 하고, 구독자 수 10만만 되어도 광고비로 월급 이상을 벌 수 있다고 말한다. 물론 나는 영상을 찍는 것도 좋아하고, 썸네일도 잘 만들고, 내 인생에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넘쳐난다. 하지만 그것을 돈으로 바꾸라고 하면 음… 재미가 없어진다. 적당히 타협도 해야하는데 그게 가장 어렵다. 친척 어른들은 ‘나는 반딧불’의 역주행 신화를 거론하면서, 너도 곧 히트할 수 있을 거라고 위로한다. 한강 작가가 노벨상을 탔을 떄 할아버지는 우리 집에서도 노벨상 작가가 나오는거냐고 웃었고, 나는 그런 말들에 도무지 웃을 수가 없었다.


이상하지. 아무도 봐주지 않을 때가 가장 재미있다니. 아마추어가 되지 않으려고 물 밑에서 발버둥친 주제에 아마추어리즘을 동경하다는 나였다. 얼마 전 나는 ‘고상하게 천박하게’라는 책을 읽으며 내 자신이 예술가의 속성에도 부합하지 않는 이방인처럼 느껴졌다. 그건 큰 일이었다. ‘김사월’은 매일 자신의 인생에서 아픔과 절망을 꺼내고 야채처럼 재료들을 다듬어 음악으로 꺼내둔다. 일상이 음악을 만드는 일로 가득차있다. 좋아하는 사람의 웃는 표정을 보고, 길가의 간판을 읽어도 그것을 자신도 모르게 음악과 연관지을 것이다. 오롯이 한 길만 걷는 사람의 정갈한 발자국을 보면 내 길에 찍혀있는 무수한 발자국이 부끄러워진다. 절박한 사람은 멋있다. 나는 늘 절박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썼고, 이미 그것이 누군가에게 들켰을 것이다. 정말로,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사람은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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