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를 운영하다 보면,
어느새 내 이야기가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는 날이 있다.
나의 얘기가 안주처럼 돌고 도는 밤.
웃으며 듣지만, 어딘가 쑥스럽다.
얼마 전에도 그런 밤이 있었다.
내가 뉴욕에 2박 3일로 다녀온 이야기를
친한 형이 슬쩍 꺼내자,
테이블 분위기가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얘, 미친놈이야. 누가 뉴욕을 2박 3일로 다녀와?
그것도 퍼스트로!"
그 말에 손님들의 반응은 갈수록 뜨거워졌다.
"진짜요? 제주도도 2박 3일이면 아쉬운데,
뉴욕은… 지구 반대편이잖아요?"
"설마 자유의 여신상 앞에서 인증샷 하나 찍고 바로 돌아오신 거예요?"
"그걸 대한항공 퍼스트 타고 갔다고요?"
그 순간부터 내 얘기는 살이 붙고, 속도가 붙는다.
내가 뭘 했든, 뭘 느꼈든 상관없다.
사람들은 '2박 3일 뉴욕'이라는 설정 자체에 빠져든다.
그 반응들, 이해 못 할 건 없다.
맞는 말이다.
편도로 13시간.
왕복 퍼스트 클래스 항공권이면 1,300만 원쯤 된다.
그렇게 시간과 돈을 들여 2박 3일?
누가 봐도 제정신은 아니다.
솔직히,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럼 그 여행을 언제 계획했느냐고 묻는다면,
출발 당일 새벽이라고 말해야 한다.
잠이 덜 깬 새벽녘,
며칠간의 여유가 생겼다.
공허한 마음을 달래고 싶었다.
어디든 좋으니, 떠나고 싶었고,
익숙한 습관처럼 항공권을 검색했다.
처음엔 동남아나 일본 정도를 생각했다.
가깝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갈 수 있는 곳.
그런데 아무리 항공권을 들여다봐도
이상하게 전혀 설레지 않았다.
여행은 사실 떠나기 전부터 시작된다.
목적지를 고르고, 티켓을 사고, 짐을 싸고,
공항으로 가는 길에 느껴지는
그 들뜸, 그 어수선한 흥분.
그런데 이번엔 아무것도 없었다.
너무 익숙해서였는지,
마음이 무뎌져서였는지,
나를 흔드는 감각이 없었다.
그러다 문득, 뉴욕이 떠올랐다.
정말, 그냥 스치듯.
별생각 없이 검색했는데
마침 퍼스트 클래스 마일리지 좌석이 왕복으로 열려 있었다.
그 순간,
눌려 있던 감각이 한꺼번에 튀어 올랐다.
‘뉴욕이라니.’
말도 안 되는데, 이상하게 끌렸다.
가야 할 이유도, 가지 말아야 할 이유도 뚜렷하진 않았지만
묘하게 마음이 움직였다.
물론 대기업 회장도, 부자도 아니었기에 제값 주고 갈 수는 없었다.
다행히 마일리지가 충분히 쌓여 있었다.
신줏단지처럼 아껴둔 건 아니었다.
언젠가 신혼여행을 갈 때,
아니면 부모님을 모시고
편하게 해외여행을 다녀올 때쯤
퍼스트나 비즈니스를 한 번쯤 타보려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언제나 나 혼자만의 몫이 아니었고,
그래서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때 내 버킷리스트 1순위는 산티아고 순례길이었다.
그 길 위를 두 달쯤 걷는 상상을 하며,
적어도 비행기에서는 편하게 잠이라도 자고 싶어서
그때를 위해 마일리지를 아껴두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현대인이 그러하듯,
현실적인 이유들 앞에서 결국 그 길은 접어야 했다.
시간은 흘렀고,
‘그럼 파리 올림픽이라도 퍼스트로 가보자’는 생각도 했지만
그마저도 이런저런 핑계로 흘려보냈다.
물론 미친 척하고 갔다면
어떻게든 갔겠지만,
계속 미루는 사이
서른 살에 했던 다짐은 흐려졌고,
어느새 나는 서른일곱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도 못 간다면,
나는 아마 마흔이 넘어서도
또 다른 이유로 못 갈 거다.’
늘 그랬다.
후회하다 놓쳐버린 시간들.
그게 곧 내 지난날이었다.
내가 사랑했었던 그녀와 나는 사귀기 전, 어느 연인들이 그러하듯
서로를 더 알고 싶어 이런저런 질문을 주고받았다.
그녀가 나에게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뭐야?”라고 물었을 때,
머릿속엔 어바웃타임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지 못했다.
괜히 쑥스러워서,
두루뭉술 다른 영화를 말해버렸다.
영화의 주인공 팀은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 그는 그 능력을 사랑을 얻기 위한 데에 쓰지만, 결국 알게 된다. 시간이란 되돌릴 수 있어도, 그 안에서 느끼는 감정만큼은 되풀이할 수 없다는 것을.
사실 나도 팀 레이크처럼
다시 고쳐놓고 싶은 순간들이 너무 많다.
그 생각에 잠 못 이루는 날도 많다.
어머니께 사랑한다고 더 말할 걸.
그때 그렇게 말하지 말걸.
좀 더 안아줄 걸.
좀 더 친절했어야 했는데.
그녀에게 내가 어바웃타임을 좋아한다고 말했다면,
아마 “왜?”라고 물었을 거다.
그랬다면 나는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고치고 싶은 과거가 너무 많아서.”
아니면,
“돌아가고 싶어서.”
하지만 사실은, 그 영화가 좋다고 말하지 못한 건 단지 쑥스러워서만은 아니었다.
내가 얼마나 많은 걸 후회하며 살아왔는지, 그 건강하지 못한 마음의 결을
그녀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고,
무엇보다 그 과정을 설명하고 떠올리는 일 자체가 버거웠기 때문이었다.
물론 영화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시간 여행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건 아니다.
팀은 결국,
인생의 소중한 순간들을 되새기며
행복의 진짜 의미를 깨닫게 된다.
하지만 나는 아직,
그 과거의 후회들이 내 삶을 조금씩 갉아먹고 있다고 느낀다.
건강하지 못한 감정일지 몰라도,
그게 내 진심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다.
이렇듯 후회로 좀먹는 내가 그 미친 2박 3일을 결정하게 된 큰 이유는,
다시는 시간 흘려보낸 뒤 후회하지 말자는 다짐 때문이었고,
루실 볼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말이 지금 시대에 회자되는 건,
결국 많은 사람들이 하고 싶은 일을 앞에 두고 이런저런 이유로 참아버리고,
나중에 그것을 후회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 내가 뉴욕에 가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5년 후, 10년 후쯤
어바웃타임의 팀 레이크처럼 옷장 안에 들어가
그날 뉴욕을 가지 못한 나를 떠올리며
눈을 질끈 감고 후회하고 있진 않았을까?
그래서 나는 결국, 뉴욕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건 단지 여행이 아니었다.
후회를 한 번쯤 멈춰세우기 위한 시도였고,
더는 옷장 속으로 도망치지 않겠다는 조용한 결심이었다.
돌아보면, 그 짧은 시간은 나를 완전히 바꿨다고는 말 못하겠다.
하지만 적어도, 멈추지 않게 해줬다.
그 정도면, 그때의 나는 꽤 괜찮은 선택을 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