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의 'ㅅ'을 배우는 중입니다
과정에서 엄청난 성과가 있었던 건 아니지만,
아이의 중학교 3년은 치열하지 않았던 적이 없습니다.
1학년 입학 후 같은 반에 아는 얼굴이 아무도 없는 환경은 첫 유치원 생활 이후 처음이었으니까-
나름 침착한 성격의 큰아이였지만
꽤나 마음이 조급했던 것 같아요.
홈그라운드가 아닌 곳에서 섣부르게 친구를 사귀려다가 된통 뒤통수를 맞고는, 한동안 '친구란 무엇인지' 깊게 생각하는 시간을 보냈던 것 같습니다. 2학년때는 각 과목 공부법을 찾아간다고 치열했습니다. 첫 중간고사에서 순진하게도 서점의 **중학교 중간고사용 모음집을 기출문제인 줄 알고 사서 풀었다가 난이도 차이가 극명하게 나서 어처구니없었던 기억도 나고요.
초등학교 때도 그랬지만 중학교 때도, 아이는 줄곧 책상에 오래 앉아있었습니다. 그 흔한 만화책이나 게임, 채팅에 빠진 적 없이- 바보같이 한결같게 책상에서 책을 펴 들었네요. 너무 답답해서 '고3도 너처럼 오래 앉아있진 않겠다'라고 좀 일어나라고 잔소리한 적이 많습니다. (심지어 척추 측만입니다)
피곤함에 절어 늘어졌을 때.. 아이는 과학 인강을 듣거나 과학책을 보거나 했습니다. 그때만큼은 눈동자가 반짝인다는 걸 느낄 수 있을 만큼요. 국어선생님이 과학고 지원했다는 걸 국제고 지원한 걸로 착각하셨을 만큼 국어시간을 좋아하던 아이기도 했습니다.(보통 영과고 합격생들은 3-2 국어시간에 소홀해집니다, 당장 중요하지 않으니까요) 마지막까지, 고등 가서는 다시 이렇게까지 듣지 못할 비싼 수업이라 생각하니 열심히 들어지더랍니다.
어찌어찌 아이는 과학고생이 되었습니다. '성실하다고 꼭 잘하는 거 아니다' '전략과 효율이 중요하다'는 말들의 홍수 속에서 아이는 하루를 허투루 쓰지 않고 책상 앞에 앉았습니다. 힘든 길이 예상되는 수학을 짊어지고서라도 과학을 배우고 싶다고 말하더군요.
아뿔싸. 방학동안 과학은 좀 공부할 줄 알았더니 한달 내 수학의 연속입니다. 수학만 잡고 매달립니다. 고효율 고성능 엔진을 장착하지 못한 아이에게 여가시간 따위는 없습니다. 마음 놓고 여행 하루를 다녀오기도 힘듭니다. 실력정석은 아이에게, 제대로 이해하지 않으면 문제에 손을 댈 수 없는 상태를 선사했습니다. 공수 1을 안 했던 게 아닙니다. 다른 책들이랑 뭐가 다르냐고 물었더니 다른 책들은 정말 '더 이상 친절할 수 없을 정도로 친절하게 차근차근 설명해 준 거였다', 실력정석(이하 실정)은 친절하지 않다, 대신 제대로 이해해야만 손댈 수 있게 '설계'돼있다, 도대체 이런 문제는 어떻게 만든 건지 모르겠다고 답했습니다.
내심 불안했고, 동시에 안도했습니다. "과학 좋아서 과학고 간다더니 약점인 수학을 제대로 배워서 나오게 생겼네."라는 말이 튀어나왔습니다. 중학교 내내 아니 초등학교 때부터 수학을 제대로 공부했던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5지선다를 찍어서 맞춘 적도 없는 애지만(평가절상되었던 적이 없음), 서술형을 제대로 공부한 적도 없는 것 같습니다. 가장 많은 공부시간을 수학에 할애하면서 얘는 뭔가 삽질을 여기저기 해놓은 느낌입니다. 그래도 의미 없는 삽질은 없다는데, 그렇게 파두었던 구덩이들의 의미가 재정의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아이가 과고 입학하면서 '뇌를 갈아 끼우고 싶다'는 표현을 에둘러 질문으로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엄마, 뇌는 일정한 계단처럼 자라는 거야? 아니지?" 이 질문에 저는 아이의 어린 시절을 돌아보게 되더군요. "글쎄.. 내가 기억하는 건, 너는 꼭 어디 여행 다녀오거나 새로운 경험을 하면 말이 갑자기 늘더라. 그러니 단계적으로 똑같은 높이의 계단처럼 성장하지는 않는 건 확실해."
아이가 오늘, 이번 주, 이번 달, 올해에 어떤 기적 위를 걸을지 상상하고 있습니다. 과학고 입학 전에 수학의 'ㅅ'을 백번쯤 다시 쓰고 있는 큰아이 옆에서요. 아이가 고른 과학고라는 도화지 위에 어떤 그림을 그려나갈지 기대될 때가 있습니다. 어젯밤 아이가 불을 끄고 자기 직전, '이거 재밌어!'라는 말을 흘릴 때 그랬습니다. 원하는 길을 가기 위해서 수학을 포기하지 않았던 수많은 시간들을 기억합니다. 온갖 방법을 다 써보고도 뜻대로 결과가 나오지 않았던 그 시간들을 기억합니다. '그게 그렇게 어렵냐' '그렇게까지 하고도 안되면 그쪽은 길이 아닌 거 아니냐' '모지리'라는 소리를 듣고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아이의 걸음을 기억합니다. 수학의 'ㅅ'을 백번이 아니라 백만 번 써도 좋습니다. 아이는 어떤 식으로든 해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