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고 입성기 8. 우리가 힘을 모을 수 있다면

그게 기적일 거야

by 아보카도

지난주 토요일 점심, 큰애가 신청해 둔 2025 공우 비전멘토링에 데려다주고 기다리는 동안, 생각이 많아졌다.


자 이제 4시간 반동안, 나는 이 낯선 곳에서 뭘 해야 하지. 그리고 같이 따라온 둘째는 이 추운 날씨에 어디서 뭘 하게 될까.


산 하나가 대학 부지일 만큼 넓은 땅, 구석구석 종잡을 수 없는 갈래길. 건물 밖에 걸어 다니는 학생들이 거의 없는 1월 말의 추운 날. 그렇다고 들어선 로비에 우두커니 앉아있자니 괜히 열심히 준비한 학생들을 불편하게 하는 것 같고. (학생들이 자유롭게 떠들고 간식도 먹는 공간을, 낯선 외부인이 괜히 어렵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일단 첫째를 들여보낸 뒤 둘째랑 건물 안 복도를 따라 게시판을 쳐다봤다. 채용공고부터 차근차근, 이 학교 학생들한테는 지금 어떤 기회가 열려 있는지 바라보며. 게시판 맞은편 실내 운동을 할 수 있는 곳이 맘에 들었는데, 안내데스크에 아무도 없어서 선뜻 들어갈 수는 없었다.


한 층의 끝 구석까지 돌고 나니 둘째가 물었다. "엄마, 왜 1층인데 B1이라고 쓰여있어?" "글쎄, 잘 모르겠는데 학생과학관에 그렇게 표시돼 있는 걸 본 적이 있어. 기준이 다른가 봐." 대답을 흘리고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갔다. 제법 큰 기계공작실(?)이 유리창 너머로 내려다 보였기 때문인데, 막상 내려가니 문이 잠겨있어서 들어갈 수는 없었다.


다시 1층. 춥지만 나가서 어딘가 있다는 (어딘지 모르는) 카페를 찾아보려 했을 때, 학생 중에 한 분의 큰애 있는 시청각실(?)에 들어가 들으셔도 된다고 안내해 주셔서 '고맙습니다~'하고 조심조심 들어갔다.


뒷자리 구석진 곳을 눈으로 찾고 있는데 둘째는 '언니 옆에 앉을게~'하고선 쌩 앞으로 가 버렸다. 나는 조용히 맨 뒤 가운데 남은 자리에 앉아 텀블러를 꺼내놓았다. 아아. 여기가 그 유명하다는 서울대 공대군. 나는 주최 측이 부담스럽지 않게 빠르게 스캔했다. 고등학생 멘토링 행사에 대학생들이 되려 들뜬 분위기였다. 누가 대학생인지 누가 고등학생인지 뒷모습만 봐서는 한 번에 알 수 없었지만- 참가신청한 학생들은 아무래도 불확실한 미래 앞에 신중하고 진지했고, 주최한 학생들은 지나온 지 얼마 안 되는 그 치열하고 성공적인 시간들이 떠올랐는지 행복한 모습이었다. 봄날 풀밭에 동동 구르는 주황 고무공들처럼.


아무래도 아이 진로가 걸려있다 보니, 나는 그 분위기 속에서도 얼음이 돼서는 자연대와 공대의 차이점, 의공학에 공학이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관한 간단한 설명을 프레젠테이션으로 듣고 있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꿈꾸자면 넘어야 할 산이 까마득했다. '세상엔 에베레스트도 있고 높은 산이 많죠. 이 뒤에는 백운산이 있습니다.' 하시던 교장선생님 말씀이 허공에 맴돌았다. 그 말씀 뒤에 큰애 보고 웃으면서 '너 백운산 저~아래 입구에 겨~우 도착했잖아'하면서 눈물 나게 웃었던 시간이 스쳐 지나갔다.


high hope. 서울대를 못가도 서울대에서 내놓는 입학자료는 봐야 한다더니, 고입 입시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나는 '신청할 거면 해'라는 말도 없이 온라인 신청서를 애한테 보내고 선택 여부를 기다렸다. 큰애는 겁도 없이 용감하게 '신청했어-'라는 말로 (일주일에 반나절 있는) 휴일의 반납을 예고했었다.


5시 반에 예정돼 있던 종료 시간을 훌쩍 넘겨 6시가 지났을 때, 큰애는 옅은 미소를 띠며 거의 제일 마지막으로 나왔다. 명찰과 함께, 수료증을 받아 들고서, '그렇게까지 열심히 해야 하나 싶은 일을, 그렇게까지 정성 들여 열심히 하더라'는 선배학생분들의 모습을 전하며.


이 날 의외의 정보는 하이라이트 '세*고'였다. 나는 못 봤는데, 명단에 그렇게 주르륵 '세*고' 학생들이 있었다고 했다. '세*고가 어디야 엄마? 거기 학생들 진짜 많더라-'하는 말에 나는 당장 검색창을 켰다. 아뿔싸. 영과고(8개 영재교 20개 과학고)만의 수시싸움이 아니라는 걸 알아버렸다. 도대체 이 학교는 왜 단체로 이곳에 아이들을 보냈을까.

큰애 학교에서 신청한 학생은 얘 한 명이라고 했다. 이곳에서 우연히 선배나 동기를 만나면 반갑겠다 생각했는데, 큰애는 혼자였다. 그래도 뭐, 동생이라고 곁에 있어줬으니 됐지 싶기도 했다. 어쨌든 보이지 않는 정보들의 조합 강도는 제법 셌다. 도대체 누구랑 싸워서 이겨야 하는 건가 싶을 정도로 전국구는 만만하지 않았다.


겨울마다 반복되는 부부싸움, 냉기, 좁은 집. 그 안에서 펼쳐졌던 무기력, 분노, 원망. 남편의 반복된 거짓말, 무책임, 무능력, 핑계. 뒤바뀐 우선순위.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싶은 이곳에서 아이들이 자라 어두움을 마주하면서도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이 자리에 섰다. 충분히 쥐어주며 해낼 만한 상황을 만들어주지 못한 나는, 아이들에게 무언가 해내야 한다고 쉽게 말할 수 없었다. 무언가 목표하기를 기대한다는 말조차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다만 아이들이 이 상황에서도 용기 내어 주기를 기도하며, 우리가 힘을 모을 수 있다면 그게 기적일 거라는 말을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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