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심이 아닐 때는 꺼내지 않는 말
"고마워."
나는 웃지 않고 말했다. 남편더러 '흰색 쓰레기통 비워야 해'라고 말했고, '알았어, 내일 아침에.'라고 대답한 게 어젯밤이었으니까 오늘 아침 쓰레기를 비운다고 나선 뒤 비워진 쓰레기통을 가져왔을 때 입을 열었다.
언제는 남편이 버리지 않았을까. 십수 년 간 매일 돌아가는 시곗바늘처럼 소리 없이, 쓰레기통과 재활용바구니를 비우는 건 그의 몫이었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나는 고맙다는 말을 전하지 않았다.
아마도 여러 가지 큰일이 겹쳐서였을텐데 남편을 향한 한심함, 배신감, 창피함 이런 감정들에 복받친 몇 달 동안, 칭찬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밥도 죽지 않을 정도로만 담고 반찬도 제일 안 좋은 걸로 내밀었다) 칭찬 한 번 잘못했다가는 엉덩이가 들썩거릴 5살짜리 같은 남자애를 볼 게 뻔했다. 중요한 문제는 해결할 기미도 없이 입꼬리를 씰룩거릴 남편을 보는 건 매우 불쾌한 일이다.
그래도, 오늘은 고맙다는 말을, 했다. "이 추운 아침에 쓰레기장을 오가는 일이 당연한 건 아니잖아." 눈이 동그래져서 처음 듣는다는 듯이 "와 엄마가 아빠한테 지금 고맙다고 한 거야?"묻는 둘째한테 간단히 설명했다.
어쩐 일인지 둘째가 신이 나서 현관문을 나섰다. 고맙다는 말은 딱- 한 번, 비워진 쓰레기통을 받으면서 눈도 안 마주치고 내뱉은 건데, 둘째 엉덩이가 신나서 씰룩거리는 걸 보니 기쁘고 슬펐다. 이 한마디가 뭐라고 주변 공기가 밝아지는 느낌은 또 뭐람.
'언젠가 이 망할 콩가루 집구석(시가)이랑 영영 안녕을 고해야지, 못 배워먹은 사기꾼 집안 같으니라고.' 이 생각을 안 하는 건 아니지만, 헤어질 때 헤어지더라도 불평 한마디 없이 매일 당연한 듯 쓰레기를 버려주는 점은 분명 고마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