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고 입성기 10. 소생권법 실력정석

피했던 교재로 회생의 불씨를 일으킬 줄은

by 아보카도

몇 주 전 큰아이는 여느 때와 다르게 힘이 풀려서는 어깨가 축 처진 채 집으로 돌아왔다. 수학의 'ㅅ'을 쓰는 와중에 나름대로 정리를 해보려다가 막혀서 더 이상 진도를 못 나가고 자리를 접었다는 거였다. 실력정석 공통수학 1을 두 달간 붙들고 이제 거의 끝내려던 참이었다. (문제당 네댓 번은 풀었다지만, 솔직히 제대로 공부한 것 같지 않았다. 점수 나오기 전까지는 네버~~ 못 믿는다)

어지간해서는 붙들고 있을 성격인데 그러는 걸 보면 '올 게 왔구나'싶었다. 이런 날들이 주기적으로 반복될 걸 예상하니 앞이 까마득했다. 침착하려고 노력했지만 이 길을 걷는 여느 아이들처럼 초등 3-4학년부터 제 키높이를 훌쩍 넘기도록 풀어온 수학 문제집들과 그 안에 매몰돼 있던 아이의 모습이 떠올라 울컥함이 조금 있었다.


연산 공백이 있던 것도, 기초 개념을 다지지 않은 것도, 에이급 같은 심화서를 피한 것도 아니었다. 독해력이 부족해서 장문의 문제를 파악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학원 문을 두드려 요령을 알려줘도 점수가 요지부동. 고등학교 수준도 아니고 중학교 수준의 문제에서 넘어지길 반복하니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손 놓았던 적도 없고 시간과 정성도 최대치로 들인 후의 결과였으므로 나는 나름대로 체념했었다. 돌대가리인 걸로.


'할 만큼 했으니 그만하자'라는 마음에 나는 "다른 길도 있어, 그 길만 있는 거 아니야"라며 이공계 진로를 말렸다. 그런데.. 아이가 그만두지 않았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맹랑하게 과학고에 덤빈 다음 '실력정석'에 달려들었다. 사실 뭐 선택의 여지가 없다. (학교 교과서니 피할 길이 없음) 실력 정석.. 나도 넘지 못한 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던 거대한 산길에 큰애가 들어선다니 앞이 캄캄했다. 이제 뭐가 어떻게 되는 거람. 어쩌자고 여기까지 와서 이러고 있는 거지. 호랑이 굴에 제대로 들어온 기분이었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 돼'.


과거 일을 회상하며 곱씹고 괴로워하지 않는 편이지만, 내 머리 위로 친모가 던진 쟁반이 날아와 방과 베란다를 잇는 창문이 와장창 깨지던 중학교 2학년 무렵- 반항심에 공부에 손을 놓은 게 너무 후회됐다. 그때 힘들더라도 수학을 끝까지 해 봤으면, 이렇게 별 짓을 다하고도 점수가 안 나오는 아이한테 뭐라도 알려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미안함이 솟구쳤다. 한편으론 중학내신 시험문제를 출제하셨던 학교 선생님들께 누적 시험지를 내밀며 물어도 자꾸만 '해보지 않은 무언가'를 시도해 보라며 명쾌한 해답을 내놓지 못하셨으니, 나도 어쩔 수 없지 않았을까, 결국 큰애가 답을 찾을 일이라고 선을 그었다. 명의를 찾는 심정으로, 일단 질러놓은 도전장을 쳐다보며 큰애도 나도 골몰해 있었던 것 같다. 무엇보다 입학 전까지 시간이 많지 않았다.


피치 못해 실력 정석을 마주했을 때 아이의 반응은 조금 의외였다. '제대로 이해하지 않으면 한 문제도 풀 수가 없더라'라는 말에 나는 갸우뚱했다. '그동안 구경한 다른 개념서들이 얼마나 친절했는지 느끼게 됐다'는 말을 큰애가 이어나갔다. 그러더니 갑자기 "나 그동안 뭐 한 거야.."라며 몇 번이고 탄식을 하는 거였다.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수준도 안 맞는 어려운 교재를 허세로 들고 다니는 건 질색이라며 그동안 권하지 않았던(의도적으로 피했던) 실력정석(이하 실정)은 그렇게.. 큰애한테 소생권법을 가르쳐 주었다. 정확히는 '이렇게까지 입학 전에 가르쳐 주는 건 처음 있는 일'이라며 온라인으로 실정을 가르쳐주셨던 선생님 덕분이었고, 그걸로는 부족해 결제했던 인강의 한 선생님 덕분이었다. 놀라울 정도로 '야 이거 정말 재밌지 않니?'라는 뉘앙스로 두 분 다 실정을 대하셨다. (나는 내용을 모르니 느낌만 있다)


실정을 접하고 한 달 뒤 배치고사를 보던 1월 초, '깊이 있게 생각하는 법'을 추상화로만 그리던 큰애가 구상화(사실적 그림)로 그리는 것 같았다. 1월 중순, 이대로는 안될 것 같아 급하게 독서실을 등록했다. 그 뒤로 하루도 빠지지 않고 다니며 하루 13시간 정도 공부했고 1시간씩 걸었다. '나 그동안 뭐 한 거야..'머리를 쥐어뜯으며 탄식하던 아이는 정체구간을 버텨냈다. 점수가 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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