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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일영 Feb 24. 2017

공간사유

모든 것은 사라지고 결국 사유만이 남는다

이제야 진지하게 고민한다.


건축과 인테리어, 공간을 다루는 전문 매체에서 전문 기자로 일하고 있지만 정규 교육 과정 동안 이와 관련한 교육을 받은 적은 없다. 이 일을 하기 전에는 건축이 무엇인지, 인테리어는 무엇인지, 심지어 공간이 무엇인지조차 생각하고 고민한 적 없다. 그렇게 '공간이 무엇인지'라는 개념조차 없이 일을 시작했다. 당연히 개념 없는 글을 썼고 개념 없이 일을 했다. 딴에는 전문지 기자랍시고 한껏 아는 척을 하고 다녔지만, 정말이지 아무것도 몰랐다. 실은 여전히 잘 모른다. 다행히도 이제는 알아야겠다고 알고 싶다고 생각한다.


공간은 무엇인가. 이제야 이런 고민을 한다. 고민이 대부분 그리고 늘 그렇듯 쉽게 풀리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평생 해답 없는 고민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개념 없는 풋내기에서 개념이 무엇인지 궁금해하는 풋내기가 되었지만 사실 나아졌다고 하긴 부끄럽다. 그럼에도, 늦었지만 이제라도 고민을 시작했다는 점에서 조금은 대견하다 생각한다. 고민은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하는 거라 믿는다. 고민하는 과정이 곧 성장이며 성숙이라 믿는다. 이제야 진지하게 고민한다. 공간은 무엇인가.


그동안 내게 공간이 주요한 사유의 대상이 되지 않았던 것은 부끄럽지만 내가 정말 공간을 잘 몰랐기 때문이다. 문학과 문화를 공부해온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나와 나를 포함한 인류 그리고 인류가 만들어낸 사회와 문화였다. 지금 생각하면 참 바보같이도 나, 인류, 사회, 문화라는 주요 관심사 어디에서도 공간을 발견하지 못 했다. 차라리 관심사가 부동산에 있었다면 더 빠르게 발견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조차 의식하지 못 할 만큼 미개하고 무지했다. 반성한다.


왜 내가 아파트에 사는지 미처 생각하지 못 했다.


the Modern Age.

미개하고 무지한 날 깨우친 것은 르 코르뷔지에다. 르 코르뷔지에라는 이름이 낯설게 여겨지는 이들이 많으리라 생각한다. 당연하다. 나도 그랬다. 지금이야 하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입으로 발음을 해서 익숙하지만, 얼마 전까지는 사람 이름인지도 몰랐다. '르'로 시작하는 걸 보니 불어겠거니 짐작만 할 정도였다. 르 코르뷔지에는 건축가다. 그것도 아주 유명하고 위대한. 그 건축가의 이름을 알게 되고 그를 통해 많은 걸 배우게 된 계기는 재밌게도 헨리 포드 덕분이다. 포드 자동차를 만든 그 사람 맞다.

 

공간 전문 기자라고 공간 기사만 쓰는 건 아니다. 취미 생활과 관련한 기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핸드 크래프트, 수작업을 테마로 다양한 취미를 소개하는 기사였다. 수작업으로 만들어지는 것들의 공통점은 균일하지 않다는 점이다. 똑같은 사람이 똑같은 의자를 여러 번 만든다면 어떻게 될까. 그렇게 만들어진 의자는 다 다르다. 손으로 만드는 가방, 그림, 케이크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만드는 건 그렇다. 공산품과 손으로 만드는 것들의 결정적인 차이가 거기에 있고 거기에서 생겨나는 매력이 있다. 비정형의 매력 혹은 맞춤의 매력이다.


수작업의 매력을 소개하기 위해 반대의 것, 균일하고 정형화된 공산품에 대해 공부해야 했다. 알아야 비교할 수 있으니까. 덕분에 산업혁명이 초래한 대량 생산의 시대와 그 결과를 알게 됐다. 그리고 거기 컨베이어 시스템과 현대(the Modern Age)가 있었다. 또 현대와 현대적인 것의 의미를 찾다 헨리 포드의 아주 멋진 그리고 의미심장한 말을 발견했다. "I invented the modern age." 맙소사, 이 얼마나 오만한 말인가. 하지만 아니라고 확실히 말할 수 없었다.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내 동의하게 됐다.


포드가 만든 위대한 현대는 이렇게 생겼다.


집은 살기 위한 기계


기사를 위한 준비는 그 정도로 충분했지만, 마감이 끝난 뒤에도 컨베이어 시스템과 현대라는 개념이 무겁게 남았다. 이전까지 내가 알던 현대가 수업 시간에 모더니즘과 포스트 모더니즘을 배우며 눈으로 훑었던 하나의 '단어'였다면 새롭게 알게 된 현대는 단순한 단어가 아닌 하나의 세계관이었다. 그동안 현대는 멀리 있는 말이었다. 나와 현대와의 거리는 선사시대와 현대와의 거리보다 멀었다. 내가 현대에 살고 있다는 걸 깨닫자 모든 것이 다르게 느껴졌다. 핸드 크래프트의 매력을 소개하는 기사를 쓰다 현대라는 시대에 매료되어 버렸다.


헨리 포드의 말은 여전히 오만하다 생각하지만 적어도 그가 만들어낸 시대에 내가 살고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확실히 나는 현대라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래서 현대는 내게 시간도 단어도 아닌 세계관이다. 세계관으로서의 현대란 무엇인가. 아직 잘 모른다. 다만, 고민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동안 중요하게 여겨왔던 것들과 그렇지 않았던 것들의 위상이 달라지는 걸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머릿속에서 도시와 자연, 시골과 기술, 풍요와 건강, 아파트와 마당 등 연관 없어 보이는 것들이 서로 연결되고 미묘하게 위치와 자세를 바꾸고 있었다.


그러던 중 예술의 전당에서 열리던 전시를 통해 르 코르뷔지에를 알게 됐다. 전시를 취재하기 위해 자료를 찾고 르 코르뷔지에에 대해 공부하면 할수록 르 코르뷔지에와 그가 만들어낸 시대, 그의 세상에 매료됐다. 현대였다. 거기 현대가 있었다. 르 코르뷔지에가 만들어낸 것 또한 현대였다. 헨리 포드가 현대적인 산업 시스템을 만들었다면 르 코르뷔지에는 현대적인 공간을 만들었다. '집은 살기 위한 기계'라는 선언으로 그는 모든 것을 바꿨다. 포드가 그랬듯이. 드디어 내 관심사에 공간이 들어선 순간이었다.


내 아버지는 아니지만 내가 사는 시대의 아버지인 건 확실하다.


모르는 것은 자꾸 많아진다.


현대적인 공간이란 무엇인가. 공간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는 내게는 어려운 질문이다. A를 모르는데 A*B를 알 수는 없으니까. 르 코르뷔지에 자료를 읽다 문득 생각했다. 모든 현대적인 공간이 르 코르뷔지에의 작품은 아니지만 르 코르뷔지에는 현대적인 공간의 원형을 만들었다. 르 코르뷔지에가 만든 공간은 인간을 위한 공간이었다. 르 코르뷔지에의 현대적인 공간은 결국 인간을 위한 공간이다. 인간을 위한 공간. A*B=C 방정식에서 B와 C를 안다면 A를 유추할 수 있다. 물론, 여전히 어렴풋하다.


공간이란 무엇인가. 공간이 무엇인지 정의하는 말과 글은 많다. 많은 건축가와 디자이너, 철학자가 각자의 생각을 남겼다. 아직 완전히 마음에 드는 정의를 발견하지 못 했다. 질문을 바꿔 다시 생각했다. 좋은 공간이란 무엇인가. 마찬가지로 많은 정의와 견해가 있을 것이다. 르 코르뷔지에에게 묻는다면 어떨까. 아마도 인간을 위한 공간이 좋은 공간이라 말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인간을 위한 공간이란 무엇인가. 역시나 많은 정의와 견해가 있을 것이다. 인간을 위하는 방법은 많고 각자의 생각은 다르다.


한때 '작가란 무엇인가'라는 고민을 한 적이 있다. 꽤 오랫동안 고민하고 내가 내린 결론은 '작가는 질문을 던지는 자'였다. 나는 원래 그렇게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었다. 여기 또 많은 질문이 남았다. 알게 된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모르는 것은 자꾸 많아진다.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나. 르 코르뷔지에가 그리고 헨리 포드가 만들어낸 현대의 가치는 무엇인가. 현대적인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좋은 공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을 위한 공간은 무엇인가. 인간을 위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공간이란 무엇인가. 아직 어떤 답도 찾지 못했는데 질문만 자꾸 는다.

 

르 코르뷔지에가 남긴 것은 건축물이 아니다.


공간에 담긴 사유와의 대화


르 코르뷔지에는 '모든 것은 사라지고 결국 사유만이 남는다'는 말을 남겼다. 르 코르뷔지에가 내게 남긴 나침반이다. 이 나침반을 품고 공간을 대하려 한다. 누군가 공간에 남긴 사유를 찾고 그 사유와 대화하려 노력한다. 말이 잘 통하는 공간도 있고 전혀 말이 통하지 않는 공간도 있다. 앞으로 더 많은 공간을 만나고 대화하려 한다. 공간에 담긴 사유와의 대화를 통해 나름의 답을 찾으려 한다. 긴 모험, 먼 여행이 되겠지만, 나침반이 있기에 두렵지는 않다. 그리고 그 기록을 여기 남기기로 한다. 이 일지의 제목은 그래서 쉽게 정해졌다. 공간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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