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감수성이라고 하면 잘 우는 친구들한테 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영화를 보다 울거나 친구의 이 야기를 들어주다가 우는 친구들을 보면, 정말 감수성이 풍부하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청소년 시절 갑자기 EQ라는 말이 유행하면서, 이제는 IQ보다는 EQ가 높은 사람이 더 살기 좋은 세상이 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난 감수성을 측정하는 것이 감성지수인가라고 생각했다. 별걸 다 측정 하는 세상이군... 하지만, 조금 다른 개념인 것 같다. EQ는 감성지수로, 감성지수는 지능지수(IQ)와 대조되는 개념으로 자신이 감정을 적절히 조절, 원만한 인간관계를 구축할 수 있는 ‘마음의 지능지수’를 뜻한다고 한다. 그뜻을찾아보니전혀다른내용인것같다
감수성이란 유기체가 내외계의 자극 변화를 수용하는 능력이라고 한다. 감수성이란 말이 맥락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해석되지만, 대체로 외부의 자극이나 인상을 끊임없이 수용하고 감상하는 성질이나 능력을 말한다.
최근에는 ○○감수성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가장 많이 들어본 말은 성인지 감수성인 것 같다. 양성평등 의 시각에서 일상생활에서 성별의 차이로 인한 차별과 불균형을 감지해내는 민감성이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양성평등에 대한 불균형을 감지하는 민감성이 다르기 때문에, 세대에 따라 환경에 따라 서로 다른 감수성을 가지고 있고, 이것에 대해 공론화하는 과정이 대두되었다.
오늘 TV를 보다가 혐오 감수성이라는 말을 들었다. 아직 흔하게 사용하는 말은 아닌 것 같다. 인지심리학자 김경일 교수가 코로나19 시대의 혐오 발생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사용한 단어였다. 사람마다 혐오를 느끼 는 단계가 다르고, 그것이 극단적이 혐오 문제가 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초반에 공부하면서 읽은 코로나 19 시대의 혐오에 대한 논문에서도 사람에게 혐오는 생존을 위한 수단이라고 이야기했었다. 그래서 다른 동물에 비해 운동능력이 대단한 것이 아니지만, 생존율이 높은 것은 혐오스러운 것을 느끼고, 그것을 피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똥 같은 것을 혐오스럽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만지게 되고, 그럼 감염으로 인한 질병과 사망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적당하게 혐오하는 것은 인류의 생존을 위한 수단인 것이다.
여기서도 항상 그렇듯이 ‘적당히’라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사람은 우선 자신과 다른 것은 경계하는데, 어느 정도까지 경계해야 하는 것인가? 그 경계가 차별이 되지 않게, 혐오가 되지 않게 하려면 어느 정도의 혐오 감 수성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인가?
하지만 나는 TV에서 들은 혐오 감수성보다는 혐오인지 감수성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다. 또는 차별인지 감 수성이라고 말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씨앗티즌 활동을 시작하면서 처음에는 사실 힘들었다. 이 감수성이 너무 폭발한 것이다. 모든 단어 하나하나에 촉수를 세우고, 이 말도, 저 말도 차별하는 말이 아닐까? 곱씹고, 괴로워했다.이 세상이 정말 혐오로 가득차 보였다. 하지만 이 감각은 나보다는 밖을 향해 있었다.
특히 뉴스를 볼 때면, 거의 모든 내용을 혐오와 연결지어 생각할 수 있을 정도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많은 이 야기를 접하면서, 조금씩 다시 평소의 나로 돌아오고 있다. 그리고 혐오에 대한 감수성은 이제 나를 향하고 있다. 나는 어떤 집단을 싸잡아 편견을 가지고 생각하고 있지 않은지, 그런 편견 속에서 예단하고 누군가를 만나지는 않는지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