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주부인가 아니면 그 이상의 어떤 존재인가
집근처 새로 생긴 클라이밍 센터에 아이 체험을 예약했다. 긴장감이 높은 아이들에게는 클라이밍처럼 온몸으로 힘을 분산하는 운동이 좋다기에 냉큼 신청했다. 유일하게 셋이 모이는 주말이었지만 혼자만의 여유로운 주말을 만끽하는 것이 나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서둘러 아침밥을 먹고 오전 11시 남편과 아들은 클라이밍 센터로 향했다.
혼자 남은 집은 역시나 천국이다. 조용히 커피를 내리고 오랜만에 영화를 보았다. 점심시간이 다가왔지만 한 끼 정도는 안 먹어도 배부른 시간이었다. 미리 찜해두었던 <미시즈 해리스 파리에 가다>를 보았는데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중간에 끊김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감상한 영화는 실로 오랜만이었다.
해리스 부인은 꿈에 그리던 디오르 드레스를 사기 위해 수첩에 드레스 가격을 적는다. 그리고 아르바이트, 저금통 등 돈이 모일 때마다 기록해 나간다. 이 장면에서 내 가슴은 오두방정을 떨기 시작했다. 부인처럼 똑같은 사이즈의 수첩을 꺼내 들고 <아이와 발리에서 한달 살기> 목표금액을 적어 내가 모을 수 있는 돈들을 적어나가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갑자기 나도 해리스 부인이 된 것만 같았다. 해리스 부인은 파리에, 나는 발리에! 생각만 해도 황홀했다.
이윽고 대충 손가락을 접으며 수첩에 적을 비상금을 따져보는데 연필을 들지 못했다. 쓸 수 있는 돈은커녕 앞으로 나갈 돈만 잔뜩이었다. 이참에 나도 발리를 향한 아르바이트를 할까? 그때부터 나는 당근마켓 알바구인광고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평일 아르바이트는 오전에는 학교 하원시간과 겹치고, 오후시간은 학원픽업시간과 겹쳤다. 에라이! 심통이 날 때쯤 주말알바 구인광고가 눈에 띄었다. 당장 지원버튼을 클릭했다.
쇳불도 단김에 빼랬다고 오늘 나는 면접을 보고 왔다. 이력서를 십 년 만에 쓰다 보니 괜스레 뭉클했다. 2014년도에 멈춰버린 나의 사회생활이 애달프게 그리웠다. 사장님은 주말 아르바이트여서 그런지 지원자가 많다고 하시며 이틀 후에 최종결과를 알려주신다고 했다. 실은 내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분야여서 합격해도 문제, 안되면 아쉬움이 남을 것 같은 기분으로 면접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어쨌든 지금 내 수첩에는 <아이와 발리에서 할 달 살기>가 적혀있다. 보기만해도 설레인다.
부인은 청소부인가 아니면
그 이상의 어떤 존재인가?
최고로 아름다운 드레스를 꿈꾸는 청소부죠.
해리스 부인은 드디어 디오르 드레스를 살 수 있는 돈을 모으고 드레스를 사기 위해 파리로 떠났다. 파리에서 우연히 만난 디오르 직원과 모델이 함께하는 식사자리에서 대화를 나눈다. 그들이 나눈 대화들은 내 가슴을 한 번 더 요동치게 만들었다. 문득 '나는 주부인가 아니면 그 이상의 어떤 존재인가?'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내 앞에 따라붙는 수식어들이 궁금해졌다.
나는 감정을 쓰고 넘기며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들을 기록으로 표현하기를 좋아한다. 때문에 이 세상의 모든 기록들을 탐험하는 기록탐험가이고 동시에 불안이 많은 사람이며 조급한 사람이다. 그리고 아들에게는 잔소리와 걱정이 많은 엄마이고 남편에게는 화가많은 아내이다. 그 밖에도 잠이 많은 잠순이, 누워있길좋아하는 게으른 어른, 게으르면서 하고 싶은 게 많아 머릿속만 바쁘게 움직이는 꿈이 많은 아줌마다.
그나저나 '꿈'은 이루는 것일까
이루어지는 것일까?
이 드레스에 걸맞은 삶을 살 수 있겠어요?
내 꿈이에요.
내 돈도 남의 돈과 똑같아요.
물론 꿈을 살 순 있죠
하지만 그걸로 뭘 하죠?
나는 상류층이 되고 싶다는 꿈은 한 번도 꿔본 적이 없다. 그냥 나랑은 다른 세계의 것이라고 무의식마저 거리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기록'이라는것으로 한 번쯤 유명인이 되고 싶다는 바람을 가져본 적이 있다. 내 이름이 새겨진 책을 세상에 출판하고 그동안 탐혐한 다양한 기록레시피들로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이 되보는 것이 나에게는 디오르 드레스를 입는 것만큼이나 황홀한 꿈이다.
그보다 유명인이 되보고 싶은 이유는 다른것에 있다.그동안 SNS 속에서 동경만 하던 사람들을 사적인 자리에서 만나 깊은 대화를 나눠보고 싶다. 지금은 쉽게 만날 수 없지만 유명세를 빌리면 그분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열리지 않을까? 하는 기대때문이다.
그러나 저러나 해리스 부인이 마침내 디오르 드레스를 산 것처럼 꿈도 돈으로 살 수 있다면 꿈을 이룬 다음에는 뭘 해야 하지? 책을 출판하고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하고 약간 유명해지고...그다음에는? 돈을 벌고 수첩에 적어둔 발리에가서 한 달동안 여행을 떠나면 되는 것일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은 영화가 끝난뒤에도 엔딩크레딧을 따라 하염없이 올라가고 있었다.
영화 속 디오르 직원들은 해리스 부인의 드레스를 꼭만들고 싶어했다. 자신과 비슷한 삶을 살아온 평범한 사람도 상류층만 입을 수 있다고 믿었던 디오르 드레스를 입을 수 있다는 희망때문이었다. 해리스 부인이 디오르 드레스를 입는 것은 부인의 꿈임과 동시에 그저 평범한, 지금의 나같은 사람에게도 꿈을 꾸게 만들어 주는 용기였다. 세상에 몇 안되는 상류층에게만 열려있던 디오르 브랜드가 평범한 대중들도 경험할 수 있는 제품들로 진입장벽이 낮아졌고 이제는 소수의 브랜드가 아니라 모두의 브랜드로 거듭났다. '꿈' 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닐까?
하염없이 올라가던 엔딩크레딧은 그제서야 사라지고 영화는 끝이났다.
내가 꿈꾸고 있는 바람도 이루어지는 순간이 온다면 이뤄낸 성취감과 기쁨도 물론 크겠지만 그 꿈을 이뤄내는 과정이 나와 비슷한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었다 것. 누군가 내 모습을 보고 나도 해볼 수 있겠다는 긍지가 솟아나는 것. 아무것도 아닌 주부가 기록을 탐험하다가 어느 날 책을 출간하고 유명인들 사이에 어우러져 있다면 지금 나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주부들도 그게 무엇이든 무언가 해보고 싶다는 의지가 조금 더 솟아나지 않을까? 어찌 보면 한 사람의 꿈이라는 것은 개인에게는 이루어지면 그뿐이지만 이뤄내는 과정과 모습들은 무한한 영향력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게으르게 누워있던 나의 의지도 부지런히 강해지는 것만 같았다.
얼마 전에는 친정식구들과 가족모임이 있었다. 제부가 우연히 꺼낸 운명에 관한 화두로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제부는 모든 사람의 운명은 정해져 있기 때문에 과거의 경험이 오늘을 선택하게 하고 오늘의 선택이 내일을 이끄는 것이라고 말했다. 뒤이어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아무리 아등바등 노력해 봤자 정해진 운명대로 흘러가기 때문에 띵까 띵까 놀던 옆자리 동기가 먼저 승진하는 것" 이라고 말했다. 삶 전체를 두고 운명을 탓하기엔 앞으로가 너무 절망적일 것 같아서 나는 아주 부지런히 반박멘트를 날렸다.
나는 전적으로 운명론을 믿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마다 운명의 아우트라인은 정해져 있다고 믿는다. 노력해서 아우트라인을 바꾸거나 아니면 정해진 대로 순응하며 살아가는 것은 자신의 선택에 달려있다고 여긴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꿈이 이루어지는 시기는 내가 정할 수 없는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열심히 하루하루를 살아내다보면 운명적으로 정해진 그때에 꿈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어도 정해진 때에 그냥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그냥저냥 살아가면 꿈이 이루어지는 운명적인 그때도 그냥 지나가버린다
그저 열심히 오늘을 살아가다보면 어느새 꿈꾸는 내일을 맞이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의 오늘은 지나가며 이윽고 내일이 밝아올 것이다.